#9. 굶주린 항구 (2)
“마리아 양. 멕시코는 최저시급이 얼마나 합니까? 아, 드시고 말씀하십시오. 천천히 드셔도 됩니다.”
질문을 받은 여급은 너무도 맛있게 씹던 것을 삼키고서 의아하게 되묻는다.
“최저시급이요?”
“법으로 정해진 최저한의 급여 말입니다.”
“아, 그거요? 한국은 시급제로 주는구나. 우리나라에선 일당으로 치는데.”
“그렇군요. 그래서 얼마지요?”
“북부랑 남부가 달라요. 북쪽 국경지대에선 하루에 180페소였나? 185페소였나? 아무튼 대충 그런데, 여기서는 고작 123페소밖에 안 돼요. 그나마 「엘 카카스(El Cacas)」가 한 번에 20%나 올려줬는데도 이 모양이랍니다.”
“「엘 카카스」? 그게 누굽니까?”
카카스(Cacas)는 한국어로 옮기면 ‘똥 덩어리들’이라는 뜻이다. 사소한 것이지만, 난 누구의 별명이 이리도 고약한지 궁금해졌다. 여급이 작게 지저귀듯 웃으며 답을 말했다.
“로페즈 오브라도르 대통령이요. 원래 별명은 생선(El Peje)이었는데 부패한 높으신 분들에게 “이 똥 덩어리들아!”라고 화를 낸 다음부터 새로운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죠. 바로 올해에 있었던 일이에요.”
그런 거였군. 별명을 부르는 사람들에게 악의는 없을 터이나, 오브라도르 대통령으로선 차라리 출신지의 특산물로 불리던 시절이 나았을 것이다. 끄덕인 나는 본론으로 돌아갔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그런데, 마리아 양은 왜 법정 최저수당을 받지 못합니까? 혹시 이곳 사장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고 계시는 건 아닌지?”
“부당한 대우요? 아아뇨!”
마리아가 펄쩍 뛰듯 사장을 변호했다.
“사장님은 괜찮은 분이세요. 아빠의 친구이기도 하고. 다만 이런 업종은 팁으로 수당을 채우는 계약을 하거든요. 올해 초까지만 해도 그 금액이 최저수당보다 많아서 별 문제가 없었죠. 그나마 오늘은 손님 덕분에 한숨 돌리겠네요…….”
미국에선 흔한 형식의 근로계약이 여기에도 있었다. 뒤로 갈수록 기운이 빠진 마리아는 하아- 하는 한숨으로 흐려진 말을 매듭지었다. 그러곤 기운 없는 칼질로 잘 구워진 소 안심을 썰기 시작했다. 나는 그 시무룩한 모양새를 보며 계획을 구체화했다.
‘최저수당만 내걸어도 환장할 인구가 상당하겠어.’
푸에르토 바야르타는 가난한 도시였다. 그 가난함은 대형 호텔과 호화 리조트가 즐비하게 들어찬 해변으로부터 대로 하나만 건너면 곧바로 전모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완공조차 안 되어 녹슨 철골을 드러내고 있는 흉물스러운 주택들과 거기에 세 들어 사는 초라한 사람들. 잘 정비된 구획은 일부에 불과하며, 나머지 도시 전체는 관광객의 돈과 그 돈이 지탱하는 일자리를 찾아 들어온 가난한 자들로 가득 차있었다. 때로는 부드러운 파스텔 톤으로, 때로는 강렬한 원색으로 채색된 벽들과 사시사철 피어있다시피 한 붉은 부겐빌레아 꽃들이 그 가난을 이국적인 낭만으로 포장하고 있을 따름.
이런 골목들을 구경한 관광객들은 오로지 그 겉면만을 보고서 온갖 색채로 가득한 추억을 쌓아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곤 말했겠지. 푸에르토 바야르타는 아름다운 곳이었고, 또한 멕시코답지 않게 안전한 곳이었노라고. 그러나 그들이 안전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군경의 빈번한 순찰이었을 터다.
역병이 유행한 이래, 이 헐벗은 항구는 거의 3분기에 걸쳐 심각한 기아를 겪고 있었다. 눈앞의 여급은 아직까지 일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축복받은 소수에 속하지 않을는지.
123페소.
이곳의 하루치 최저수당은 한화로 겨우 7천 원 언저리에 불과하다. 구실만 있다면 고작 7천만 원으로 1만 명의 하루를 살 수 있으리라는 이야기. 나는 지금 명목상의 유통가액이 3천억 원을 넘는 대형 거래를 하고 있으며, 내가 얻을 설계도의 잠재가치는 그보다 훨씬 더 높다고 봐야 한다. 고로 거래총액의 1~5%쯤은 안전비용으로 지출할 의사가 있었다. 위험요율을 감안할 때, 정 불가피하다면 10%까지도. 이는 이 가난한 도시 전체를뒤흔들고도 남을 거액이다.
문제는 구실. 그럴듯한 구실이 없다는 것이다. 그 많은 사람들을 얌전하게 붙들어 놓을 구실이…….
“세뇨르.”
여급이 내 주의를 환기한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게 하시나요?”
어떻게 해야 내가 떠나는 순간까지 이 항구를 평화롭게 열어둘 수 있을까. 내가 떠난 뒤엔 지옥이 되든 말든 알 바 아닌데. 과달라하라처럼 계엄이라도 발령되었다간 모든 게 끝장이다. 질문을 받고도 조금 더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불현듯 떠오르는 착상에 입을 열었다.
“좋은 일을 좀 해볼까 하고 있었습니다.”
“좋은 일이요? 어떤 일인데요?”
“이 도시의 시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일입니다.”
“……?”
먹다 말고 갸우뚱하는 마리아. 그러나 나는 농담을 하는 게 아니었다. 당장 굶어죽을 위기가 사라지면, 벌이가 좋아도 목숨이 위험한 일감은 인기가 없어지는 법. 그나마 카르텔 쓰레기들이 고기방패와 잡부들의 일당을 넉넉히 매겨 줄지조차 미지수다.
고로 이 굶주린 항구에 거짓된 희망을 베푸는 일은, 가난한 자들에게 희망의 신기루를 보여주는 일은 이 항구를 탐내는 세력들의 하루살이 시카리오 모집을 막을 예방조치가 되어줄 터였다. 적어도 내 거래가 완료되는 순간까지는.
“아까 분명 춘부장께서 항만 사무국 관계자셨다고 하셨지요?”
내 물음에 여급은 조심스레 끄덕였다.
“정부 재정 문제로 휴직 처분을 받으셨을 뿐, 지금도 관계자이긴 하세요.”
“잘 됐군요. 아무튼, 이것도 인연이니 춘부장께 사람을 소개받으면 어떨까 합니다.”
“사람을요? 우리 아빠한테서요?”
“예. 그렇잖아도 제 일과 관련해서 적당한 사람을 찾던 참이었습니다. 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멕시코는 사업가들 사이에서 「친구(Amigo)의 나라」로 유명하거든요. 사업을 하려면 우선 친구부터 사귀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즉 「친구의 나라」라는 건 친근한 나라가 아니라 인맥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나라라는 뜻이다. 중국이 그러하고, 필리핀, 미얀마, 태국 등의 정치적 후진국들이 다 그러하듯이. 나는 깍지를 낀 채 턱을 괴었다.
“마침 춘부장께서 불가항력으로 쉬고 계신다니 오늘이라도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어, 그건 그런데요…….”
“사례는 하겠습니다.”
“음…….”
갑작스러운 제안에 새롭게 고민하는 마리아. 원래는 이 여급을 징검다리 삼아 이 항구의 플라자 헤페(보스), 즉 카르텔 지방영주에게 선을 대볼 작정이었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한낱 여급에게 무슨 인맥을 바라는가 싶겠으나, 이곳은 멕시코다.
‘도로 건너엔 호화 크루즈가 수시로 들어오던 부두, 바로 옆엔 외국인들이 지폐를 뿌려대던 카지노, 남쪽엔 호텔이 줄줄이 늘어선 해변……. 플라자와의 접점이 없으면 이상한 가게지.’
이런 유명 관광지에서 카르텔에 상납을 하지 않고 장사를 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 가게도 자릿세 개념인 「바닥의 권리(Derecho de Piso)」를 지불하며 장사를 해왔겠지. 그 종업원인 마리아는 당연히 플라자 조직원들과 안면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반듯한 이목구비를 감안할 때 하급간부까지도 기대해볼 수 있었고.
요컨대 나는 ‘적당히 하찮은’ 소개인을 물색하고 있었다. 소개인이 높은 인물이면 오히려 경계심을 사기 쉬우니까. 지금의 나는 이 항구의 물정에 어두운 외국인 사업가다. 「엘 무니씨오네로」가 아니라. 그러니 마리아의 아버지가 항만 공무원이라면 나로서는 아버지 쪽이 더 괜찮은 선택지인 셈이다. 건너야 할 다리 수도 줄어들 테고.
‘어쨌든 이 여자가 징검다리 노릇을 하긴 하는 건가.’
약간의 행운이 따랐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망설이던 마리아가 멕시코인답게 승낙했다.
“좋아요, 만나게 해드릴게요! 아빠가 요즘 침울해하셔서 보기 안쓰러웠는데 잘된 걸지도 모르겠어요. 대신 수고비는 저 따로, 아빠 따로 주셔야 해요?”
“섭섭지 않게 챙겨드리겠습니다.”
“그럼 우린 오늘부터 친구네요. 그런데 전 아직 당신의 이름도 모르는데요?”
“황이라고 부르십시오.”
“후앙. 이제부터는 저를 마리라고 부르세요. 앞으로 잘 부탁해요!”
꽌시로 치면 나는 이제 신펑요우(新朋友)로부터 하오펑요우(好朋友)로 넘어간 셈이다. 타인이나 다름없는 사람에서 좀 아는 사람으로 바뀐 것. 힘겨운 시기라 관계의 벽이 낮아진 감이 있다. 웃으며 나와 악수를 나눈 마리아는 눈짓으로 테이블을 가리켰다.
“우선 이것부터 다 먹고 연락해도 되죠?”
“물론입니다. 잘 드시니 보기 좋군요.”
“그런가요?”
“예. 한국에선 음식을 잘 먹는 사람을 복스럽다고 표현합니다. 이쪽 표현으로 옮기자면…… 그래, 복된 용모(feliz cara)쯤이 되겠군요.”
“와, 새로운 걸 알았네요!”
마리아는 즐거워하며 정말 복스럽게도 먹어댔다. 나처럼 오르차따를 홀짝이며 흘낏거리던 경태가 “이야, 한국인이었으면 먹방으로 대성했겠는데?”라고 감탄한다. 먹방이 먹는 방송의 줄임말이었나? 요즘의 유행어는 헷갈리는 것들이 많다. 나는 진득한 인내로 나에 대한 마리아의 호감을 보존했다.
그리하여 거의 6인분은 될 양을 깔끔하게 다 먹고 행복해진 마리아는 곧바로 전화를 걸어 밝은 목소리로 아버지를 불러냈다. 아주 좋은 친구를 사귀었다면서.
가게 앞에 연식이 오래된 닛산 베르사(Versa) 한 대가 나타난 건 그로부터 40분쯤이 지나서의 일이었다. 차는 전반적으로 정비 상태가 좋지 않았고, 범퍼는 제 역할을 다 하느라 긁힌 자국으로 가득했다. 차에서 내린 사내는 대기 중인 경호 차량을 유심히 살펴보고서야 가게로 들어섰다. 마리아는 그와 가볍게 포옹하고 나를 소개했다.
“이쪽이 아까 이야기했던 후앙이에요. 후앙, 이분이 우리 아빠세요.”
나는 배가 불룩한 휴직 공무원과 악수를 주고받았다.
“황입니다.”
“페드로요. 페드로 산토스 산체스. 페루쵸(Perucho)라고 부르시오.”
“반갑습니다, 페루쵸.”
딸의 소개이기 때문인지, 간만에 할 일이 생겼기 때문인지 초면부터 바로 별명을 허락한다. 어쩌면 사업가로부터 성의표시를 자주 받아본 하급 항만 공무원의 생활력일 수도 있겠고. 마리아는 “두 분이서 이야기 나누세요. 후앙은 가기 전에 제게 팁 주시는 거 잊지 마시고요.”라고 말하곤 자신의 업무로 돌아갔다. 오지 않을 손님을 기다리며 사장의 불편한 심기를 못 본 체 견뎌내는 피고용인의 입장이었다.
마주앉은 휴직 공무원이 계산적인 시선으로 나를 뜯어보았다.
“그래, 사업을 하신다고?”
“예.”
“구체적으로 무슨 사업을 하시는 분이시오?”
“돈 되는 분야마다 다 한 발씩 걸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여러 나라에 농장을 보유하고 있고, 상사도 하나 운영하고, 저 앞에 떠있는 것처럼 엄청나진 않지만 여객선도 몇 척 가지고 있지요. 지금은 여객노선에 포함시킬 후보 항구들을 보러 다니는 중입니다.”
“허. 참말이라면 대단한 분이시군.”
못미더워하는 페루쵸. 그러나 나는 오직 진실만을 말했다. 요 몇 년간 여의도 김씨의 투자 포트폴리오에 빠짐없이 들어가 있는 항목 중 하나가 바로 해외의 농지 구매였고, 상사는 기본 중의 기본이며, 여객선은 외국인 전용 선상카지노가 둘에 서해와 남해에서만 노는 크루즈가 하나, 블라디보스토크를 오가는 크루즈 페리가 다시 하나다.
이 중에서 가장 작은 배는 올해 인수한 수용인원 5백인 규모의 크루즈 페리인데, 법원 경매로 사들인 가격이 고작 6억에 불과했다. 보유하고 있던 업체가 불황에 못 이겨 부도를 낸 데다, 크루즈 선에서 연달아 터진 집단감염으로 인해 구매자가 나타나질 않았던 탓이다.
‘누구나 전망이 어둡다고 봤을 테니.’
결국 유찰에 유찰을 거듭한 이 배는 신규건조가의 4분의 1도 안 되는 가격에 조직 계열사의 소유물이 되었다. 난 이 배를 러시아의 딜러인 「브라츠키 크루그(Братский круг)」와의 거래에 활용할 계획이었다.
내가 권유했다.
“우선 뭐라도 마시면서 이야기하시죠.”
“사는 거요?”
“당연한 것 아닙니까?”
위도가 낮은 항구의 11월은 살찐 사람에겐 아직 더울 때다. 이마에 땀이 맺혀있던 페루쵸는 내 권유를 선뜻 받아들였다.
“마리! 여기 달고 시원한 거 뭐 없냐?!”
“레모네이드는 어떠세요?”
“그래, 그걸로!”
페루쵸가 상체를 내게로 돌렸다.
“여객업을 시작하신 지는 얼마나 되셨소?”
“본격적인 국제선에 도전하는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런 시기에 하필 크루즈 사업을? 너무 무모하신 거 아니오?”
“오히려 이런 시기이기에 더욱 해볼 만한 겁니다. 당장 저 앞의 크루즈만 해도 하루 이틀 묶여있는 처지가 아닌 것 같은데, 가격이 과연 얼마나 떨어졌겠습니까? 불황기에 우량자산을 후려치는 자야말로 진짜 부자가 되는 법입니다. 원래 모든 사업엔 위험이 따르지요.”
“……그건 그렇지.”
휴직 공무원이 입맛을 다시며 항구에 정박한 크루즈선을 바라보았다. 거의 반년 이상 관리를 받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여객선은 항구의 앞바다에 을씨년스러움을 보태는 정적인 풍경이 되어있었다. 항만 사무국이 휴업 상태가 된 이유다.
“그래서, 내게 원하는 건 뭐요? 사업타당성 분석에 참고할 대외비 자료? 아니면 원활한 인허가 절차? 크루즈 일정에 끼워 넣을 현지 업체가 바가지 못 씌우도록 해주기?”
난 공무원의 물음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그 전에 자선사업을 좀 할까 합니다.”
“자선사업이라니?”
“말 그대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뜻이죠. 도시를 둘러보니 끼니도 못 때우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 보이더군요. 그리스도인으로서 형제자매들의 고난을 그냥 지나치기가 어려웠습니다.”
내 신실한 신앙인 흉내가 예상 밖이었는지, 조금 당황한 페루쵸가 다시 묻는다.
“구체적으로 무얼 할 작정이신지 여쭤 봐도 되겠소?”
“글쎄요. 시민 모두에게 빵 하나씩이라도 돌리는 걸로 시작할까요?”
“시민 모두에게? 하하하!”
페루쵸는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이 도시를 너무 작게 보셨구만. 세뇨르 후앙, 여기 몇 명이나 사는지 아시오? 시내에만 22만이오, 22만! 외곽까지 합치면 거의 40만이고! 5백 그램에 30페소짜리 흰 빵 한 덩이씩만 준다고 쳐도 40만 명을 주려면 대체 얼마겠소? 어?”
“40만에 30페소……. 그래봐야 천이백만 페소밖에 안 되지 않습니까?”
“…….”
천이백만 페소면 한화로 대충 7억이다. 텁텁한 한 끼나마 도시 전체에 배불리 먹이는 비용으론 싸게 치이는 가격. 잠시 말없이 나와 마주보던 휴직 공무원은, 이제야 내가 진심임을 깨달았는지 침 한 번 삼키곤 방만하던 몸가짐을 공손하게 고쳐놓았다. 곧 쟁반에 레모네이드를 올려 온 딸에겐 예의바른 아버지의 모습이 신선한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