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37화 (37/561)

#8. 엘 무니씨오네로 (5)

리까르도는 내가 제기한 우려를 간단히 부인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좋소.”

“어째서?”

“해군과 이야기가 되어있기 때문이오. 현재 그 일대를 통제하고 있는 꼰뜨라 알미란떼 마르띠네즈가 당신에게 협조할 거요. 무기상자엔 구호물자 딱지가 붙어 공항으로 옮겨질 테고. 그러니 포장엔 신경을 좀 써주셔야겠소.”

꼰뜨라 알미란떼라. 멕시코군의 계급체계를 잘은 모르지만 대충 높으신 분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제독(Almirante)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으니까. 그러나 그렇게 지위가 높은 사람이면서 뇌물을 사양하지 않을 만큼 부패한 인격자라면 벌써 시날로아 쪽으로부터 상납을 받고 있을 터인데…….

이건 자칫 지난 미얀마 건의 재판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당시 밀림에서 스러진 다섯 명은 아직까지도 가시지 않는 아까움으로 남아있었다. 그들은 보다 값어치 있게 썼어야 할 목숨들이기에. 나는 의심의 무게를 더해 물었다.

“그 마르띠네즈라는 제독을 얼마나 믿을 수 있습니까?”

“그를 믿는 게 아니라 그에게 다리를 놓아준 옛 전우를 믿는 거요. 말하자면 친구의 보증이지. 이 친구도 그곳에 있으니 너무 염려하지 마시오.”

“뭐하는 분이시기에?”

“항만보안대 중령이오. 당신의 부하들이 현장에서 마주치게 될 사람이기도 하지.”

“이름은?”

“디에고. 호세 데 디에고 스바랄스카.”

리까르도의 대답은 확신에 차있었고, 이름을 말할 땐 자랑스러워하는 기색마저 느껴졌다. 나름 열심히 준비를 했다는 것도, 이 녀석들이 어지간히 급했다는 것도 알겠다. 이 모든 준비는 태평양을 건너오는 물건을 받기 위한 사전조치인즉, 추장이 소개한 동북아의 무기상과 계약이 체결되지 않으면 전부 무의미해지고 말 것이었으므로.

그럼에도 나는 미심쩍음을 거두지 못했다. 준비에 얼마의 노력을 들였든 결과가 실망스러우면 의미가 없는 법. 이게 과연 그 보기 드물다는 ‘보증을 서주는 우정’일까, 아니면 보증을 가장한 사기행각일까. 세상엔 후자가 흔하고 이럴 땐 당연히 최악의 시나리오를 고려하는 게 맞다. 거래를 받아들이되 별도의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자.”

짝! 리까르도가 손뼉을 친다.

“슬슬 대답을 듣고 싶소만.”

미숙한 협상가의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눈 너머에 도사린 긴장과 흥분과 불안을 엿보았다. 가격을 후려치려 들지는 않을까, 일정을 너무 빠듯하게 부른 건 아닐까, 이 협상이 실패로 끝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결국 결렬되고 만다면, 주어진 시간 안에 새로운 거래선을 찾을 수는 있을까. 성급하기는. 이래서 여유가 모자란 협상이 불리하다는 것이다. 수연이 중국 놈들을 상대할 때만 하더라도 결판을 내기까지 몇 주를 끌었는데.

“한 가지.”

나는 검지를 세워보였다.

“한 가지 조건만 받아들인다면, 당신의 형제가 무기나 탄약이 부족해서 곤경에 처할 일은 없을 겁니다.”

리까르도가 반사적인 심호흡을 하고서 묻는다.

“그 조건이 뭐요?”

“선금. 설계도의 절반을 선금으로 받아야겠습니다.”

“잠깐…….”

“그리고 그쪽 기술자와 우리 측 기술자가 통역을 끼고 통화를 할 기회도 주셔야겠습니다. 물건을 내어주기에 앞서, 당신들이 설계도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 설계도가 내가 원하는 수준의 설계도라는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으니까.”

여기까지 말하고서, 나는 시선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설마 선금에 대해선 생각도 안 해봤던 겁니까?”

잠시 고장 난 기계인형처럼 굴던 보급장교가 애써 표정을 굳힌다.

“대가는 물건을 교환하는 자리에서 확인하면 되는 거잖소.”

“진위를 현장에서 확인하라?”

말도 안 되는 소리. 난 입가에 협상을 위한 냉소를 머금었다.

“리까르도. 내가 받아야 할 건 잠수정의 설계도입니다. 어쭙잖은 반잠수정 따위가 아니라, 온갖 고급기술의 결정체인 진짜배기 잠수정의 설계도란 말입니다. 그 설계도의 기술적 검증에 며칠이 걸릴 거라 생각하시는지.”

따라서 내겐 출항한 배를 중간에 돌릴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 나는 단호하게 못 박았다.

“전체 도면의 정확히 절반. 그게 내 손에 들어오기 전까지, 상품을 실은 선단은 모항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절반은 너무 많소!”

“그럼 거래도 없는 거지요.”

“당신!”

쾅! 목청이 높아진 건 리까르도였으되 테이블을 내려친 건 내 손이었다. 순간적인 정적을 끌어낸 나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낮은 음계로 말했다.

“내가 처음부터 그쪽의 처지를 악용하지 않겠노라 약속했음을 기억하십시오.”

“…….”

“나는 당신이 부른 물량과 기한을 가감 없이 수용함으로써 호의를 베풀었고, 이젠 당신이 거기에 보답할 차례입니다. 하나가 가면 하나가 와야 한다는 건 기본적인 상식 아닙니까?”

리까르도는 불편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반박하고는 싶은데 처음부터 끝까지 정론이라 꼬투리를 잡을 구석이 없을 테지. 판이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정말 관대한 조건을 제시한 거다. 이미 곱씹은 바, 나 또한 이 협상을 망쳐선 안 될 입장이므로.

그런데도 이 녀석이 막연한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감이 안 잡히는 거지. 설계도 절반을 선금으로 내줘도 무방할는지.’

기술적인 지식이 적거나 없을 입장에선 당연할 번민이었다. 혹은 제 권한으로 거기까지 가능한지 모르는 것일 수도 있겠고.

“대답은?”

턱짓으로 답을 재촉하자, 리까르도는 신경질적으로 수염을 꼬며 방어적인 태도를 취했다.

“잠시 시간을 주시오. 이건 우리끼리 논의를 좀 해봐야겠소.”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마십시오.”

내가 상체를 뒤로 물리자 리까르도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돌아서는 순간 흐트러지는 낯빛엔 지친 기색이 뚜렷했다. 군수장교 일당은 응접실에 미구엘과 아라셀리 둘만 남겨 놓고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계급이 높은 순서로 셋이 올라갔다고 그들끼리 논의를 하려는 건 아니었다. 리까르도가 들어간 방엔 제법 본격적인 무전 시설이 데스크 탑과 연결되어 있었다. 라울과 호르헤는 그저 병풍에 불과했다.

“수연아.”

“예.”

“수첩과 펜을 다오.”

나는 수연이 건넨 수첩에 리까르도가 다루는 무전기의 주파수를 기록했다. 미구엘과 아라셀리는 한국어로 나온 말이 신경 쓰이는 듯 했으나 그뿐이었다.

‘이것들이 꼴에 위성을 가지고 있군.’

개인이 운용하는 레벨의 무선장비는 출력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유효 통달거리(通達距離)가 30~40킬로미터를 넘지 못한다. 즉 여기서 400킬로미터나 떨어져있는 멕시코와의 교신이 불가능하다는 뜻.

그러나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방법이 둘 있으니, 하나는 월면반사(Moon bounce)를 쓰는 것이고 또 하나는 위성을 이용하는 것이다. 헌데 월면반사는 달이 적합한 위치에 있을 때만 가능한 기술이므로, 멕시코로 가는 전파는 위성을 경유하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멕시코 카르텔의 전(前) 간부가 아마추어 무선 위성(AMSAT)이나 상업위성 따위를 빌려 쓰진 않을 터이므로, 결국 그 위성은 카르텔의 사유재산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게 썩 대단한 일은 아니다. 내 조직의 위장사업체들만 하더라도 41개의 위성을 보유하고 있으니까. 일반인들이 인공위성 하면 떠올릴 법한 거창한 물건이 아닌, 작게는 1kg에서 크게는 6kg에 불과한 큐브 위성(Cubesat)들. 이것들의 발사비용은 킬로그램당 1억 원 안팎에 불과했다. 기회를 잘 잡으면 그 반의 반값으로도 가능하고. 심지어 NASA는 이 금액을 올해 1천 달러까지 끌어내리겠다고 선언했었다. 중국발 폐렴 대유행 덕분에 물 건너간 계획이긴 하지만.

아무튼, 내가 감탄한 것은 카르텔 놈들이 위성을 띄울 생각을 해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어렵지는 않아도 크나큰 발상의 전환과 기술인력 영입이 필요한 일이기에. 인공위성은 카르텔의 전통적인 사업이나 조직운영 기법과 완전히 동떨어진 분야이다.

무전기와 컴퓨터 앞에서 암호 책을 펼쳐놓고 씨름하던 군수장교는, 내가 그 암호 책까지 다 베끼고도 20분이 더 지나서야 겨우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모니터 화면까지 보고 있던 나는 이미 결과를 알고 있었다. 군수장교는 E-메일 계정으로 파일 하나를 전송받았다.

내 입장에선 따분한 기다림이었으나 객관적으로 볼 때 리까르도의 형제는 굉장히 신속한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직급이 얼마나 높은지는 몰라도 멍청한 지도자가 되진 않을 듯하다.

소파에 앉은 리까르도는 테이블 위로 USB 메모리 하나를 올려놓았다.

“조건을 받아들이겠소.”

“현명한 판단입니다. 수연아.”

다시 가까워진 내 비서실장이 업무용 태블릿에 케이블을 끼워 USB를 연결했다. PDF로 저장된 파일은 본래 DWG 확장자였던 설계도를 변환한 것이었다. 난 도면을 한 장 한 장 빠르게 훑어보았다. 본사에서 제대로 검증을 해봐야 확실해질 터이나, 무기상의 안목으로 볼 때 가짜일 확률은 희박해 보인다.

마지막 장까지 확인한 내가 태블릿으로부터 시선을 들어올렸다.

“기술자들의 의견교환 기회는?”

“추장을 통해 따로 알려주겠소. 이후의 연락 방법 역시 그때 전달하지. 그러니 우선 선적부터 시작해주시오. 말일까진 반드시 도착해야 하니까.”

“그렇게 합시다.”

“우릴 실망시키지 않는 편이 좋을 거요.”

“물건이 너무 빨리 도착했다고 당황하지나 마십시오. 받을 준비를 일찌감치 해둬야 할 겁니다.”

“……그 자신감을 믿어보겠소.”

이제 와서 센 척은. 난 여상한 끄덕임으로 상대를 안심시켰다. 이 정도면 굉장히 만족스러운 협상이었다. 현장에서 받을 나머지 절반의 설계도에 수작을 부릴 수도 있겠지만, 미리 절반을 확인해둔다면 수작을 부렸는지 안 부렸는지 확인하는 데 걸릴 시간이 극적으로 감소할 것이었다. 상대측 기술자도 그렇게 이야기를 할 테고. 즉 헛짓거리를 하기가 부담스러워진 거지.

이 자리의 용무는 다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리까르도가 묘한 화제를 꺼냈다.

“그런데 혹시, 당신의 조직에 타우-러너는 얼마나 있소?”

“타우-러너?”

“그 왜 요즘 들어 힘이 이상하게 강해진 사람들 말이오. 여기선 타우-러너니 타우-마스터니 부르는데, 당신네 나라에선 뭐라고 칭하는지 모르겠군. 벤데시도(Bendecido)는 당연히 아닐 테고.”

난 뜻을 몰라 되물은 게 아니다. 질문이 너무 뜬금없었을 뿐이지.

이곳, 그러니까 미국 남부에선 근래 소수의 사람들이 얻은 특별한 육체능력을 「다우머터지(Thaumaturgy)」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이는 본디 마법을 뜻했던 사어(死語). 죽은 단어를 발굴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그리스 문자 「타우(T)」는 두문자(頭文字)로서 「다우머터지」의 상징으로 쓰이다가, 지금에 와서는 신비한 힘의 근원을 의미하게 되었다. 타우-러너와 타우-마스터는 당연히 「타우」를 쓰는 자들을 이르는 것이고. 이런 사람들은 민병대, 카르텔, 사설군사기업, 스포츠 구단 등 음지와 양지를 가리지 않고 온갖 단체들의 최우선 영입대상으로 떠오르는 중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벤데시도(축복받은 자)는 필시 멕시코에서 통하는 용어일 터다.

“그걸 왜 물어보시는지?”

내가 반문하니 리까르도는 다시금 묘한 이야기를 한다.

“배를 띄울 때 타우-러너들을 같이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이오.”

“용병을 원하는 겁니까?”

“아니오. 우리는 다만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고 싶을 뿐. 그쪽을 위한 권고이기도 하고. 최소한의 자위력을 갖추라는 말이오.”

갈수록 뭔가 이상해진다. 난 눈을 찌푸렸다.

“만약의 경우? 당신, 아까는 분명 항만보안대가 현장을 지킬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멕시코 해군 항만보안대 「우나쁘로쁘(UNAPROP)」는 하찮은 경비부대 따위가 아니다. 해상 및 항만 보안 작전에 특화된 특수부대로서, 해상밀수의 위험요소로 기억해둬야 할 요주의 집단 중 하나지. 리까르도의 친구는 중령이라고 했다. 해군 제독이 뒤를 봐주는 가운데 특수부대의 중령이 제 부하들을 이끌고 안전을 보장하는 거래현장. 여기에 대체 무슨 만약의 경우 따위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이 배신하는 경우 하나만 제외한다면.

“그게 말이오…….”

뜸을 들이던 리까르도가 마침내 한숨과 함께 털어놓는 정보.

“최근 과달라하라 일대에서 웬 갑옷 입은 미치광이들이 「시날로아」의 시카리오들을 장검으로 토막치고 다닌다는 소식을 들어서 말이오.”

“갑옷 차림에 장검이라고?”

“그렇소.”

“설마 「템플 기사단」?”

“댁도 그 농부들을 아시는군. 맞소. 이것도 결국은 추측이지만, 갑옷 차림에 검과 방패까지 들고 유격전을 벌일 미친놈들은 그 기사단 흉내에 심취한 광대들밖에 없겠지.”

말하면서도 설마 했던 난 꽤나 깊은 황당함을 느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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