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36화 (36/561)

#8. 엘 무니씨오네로 (4)

지하실에서 올라온 셋의 이름은 라울, 호르헤, 미구엘이었다. 리까르도는 그들을 계급 순으로 소개했다. 요컨대 군대에 몸담았을 적의 계급을 함께 말해주었다는 뜻이다. 가장 낮은 미구엘조차 일개 솔다도(Soldado/사병)가 아니라는 점이 인상적이다. 이들은 여기에 서있다는 사실 자체로 암시하는 바가 많았다.

‘집단망명은 거의 대부분 정치적인 사유로 발생하니까.’

사내정치도 정치이듯 조직 내 권력투쟁 또한 정치의 한 형태다. 추측컨대 카르텔 간부와 그 부하들의 은퇴는 아마 계파 싸움에서 밀려난 결과이리라. ‘라인’째로 축출당한 것이다. 또 제아무리 카지노의 서비스를 받았다 한들, 위아래로 넷이나 줄줄이 살아있다는 점에선 패배를 인정하고 스스로 물러나는 형식의 은퇴였음을 유추해볼 수 있겠다.

자, 범죄조직에서 은퇴하는 상관을 의리만으로 뒤따르는 경우가 많아봐야 얼마나 많을까. 그것도 하나하나가 중간간부급이라면? 한 명이면 모르겠으되 두 명이면 의심스럽고 세 명이면 다른 증거를 찾을 필요조차 없다.

조금 더 상상력을 발휘해보자면, 리까르도의 동생을 견제하는 측에 과거 리까르도를 축출시킨 세력이 포함되어있을 가능성도 있다.

나는 이 가능성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틀려도 문제 맞아도 문제이기 때문. 전자는 체면이 상하는 망신이요 후자는 지나친 간파로 경계심을 돋워놓을 경솔함이다. 상대의 기를 누르기만 하는 협상은 좋은 협상이 되기 어렵다.

“네 분은 혹시 같은 부대 출신이신지?”

내 물음에 리까르도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는다.

“그렇소. 벌써 14년째 함께하는 전우들이오.”

“역시 그랬습니까.”

“짐작하고 계셨나보군. 설마 여기까지 ‘신중함’을 발휘하신 건 아닐 테고.”

약간이나마 곤두선 신경이 느껴진다. 지하실의 친구들과 헛간으로 이어지는 터널을 들킨 여운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나는 그 날카로움을 모르는 척 대꾸했다.

“과거의 「로스 제타스」에선 그런 일들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함께 복무했던 인연이 카르텔 가담으로 이어지는. 지금은 어떻게 변했으려나 싶었는데, 그런 부분은 예전이랑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양이군요.”

“음…….”

침음(沈吟)을 흘린 리까르도가 느리게 고개를 흔든다.

“그건 아니오.”

회한이 묻어나는 목소리.

”달라지지 않기를 바랐지만 정말 많이 달라져 버렸지. 「엘 켈빈(El Kelvin)」 총사령관 시절의 「로스 제타스」는 더 이상 돌아올 수 없소. 여기 있는 우리는 가장 좋았던 시절의 풋내기들이자 과거를 추억하는 노병들일 뿐이오.”

리까르도의 눈에 묻어나는 아련함이 꽤나 우습다. 예나 지금이나 로스 제타스는 민간인 학살을 빈번하게 자행하는 조직. 그런 조직에 몸담았던 놈들이 아직도 저가 군인인 척 우수에 젖어드는 꼴이란. 적어도 나는 이딴 식으로 도취감에 빠지진 않는다. 난 더러운 세상을 살아가는 더러운 인간이지.

엘 켈빈은 로스 제타스 카르텔의 2대 총사령관, ‘Z-2’ 로겔리오 곤잘레스 피사냐가 쓰던 별명이다. 곤잘레스 지도하의 로스 제타스는 지금처럼 3대 세력과 지방영주들로 분열되어 있지 않았으며, 초대 총사령관 ‘Z-1’ 구스만이 구축한 군사적 정체성을 나름대로 잘 간직하고 있었다. 여기 있는 넷은 바로 그 시절에 조직에 투신했던 간부들인 것이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조금 놀라운 면도 존재했다.

‘이것들, 결국 대분열기의 로스 제타스에서 살아남았다는 말이로군. 카르텔 간부 치곤 정말 명줄이 질긴 놈들이야. 아무리 보급계통이라도 무사하기가 어려운 시절이었을 텐데.’

비록 협상가로서는 초짜일지언정 중간 간부로서의 능력과 처세술만은 상당한 수준이었다는 방증이다. 아니면 지독하게 악운이 좋았거나. 어느 쪽이든 눈앞의 일당에 대한 평가를 상향조정하기 충분한 이유였다. 이 바닥에선 운도 실력이고, 운으로만 쌓이는 경험이라는 것도 있으므로.

“유감이군요.”

나는 자세를 바꾸어 주의를 환기했다.

“그럼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서……. 내가 언제 얼마를 지불해야 원하는 걸 받을 수 있을지, 당신은 어떤 경로로 상품을 조달하여 어느 시점에 내게 양도할 것인지, 그리고 그럴 능력이 있음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봅시다.”

“증명이라…….”

“지급능력 확인은 모든 거래계약의 기본입니다, 리까르도.”

“나도 아오.”

퇴역 군수장교는 콧수염을 매만지며 무의미하게 번민하다가 자신의 패를 꺼내놓았다.

“「북동부파」 내부에서 동생을 후원하는 자가 기술진과 설계도를 확보하고 있소.”

“기술진과 설계도? 그건 이제부터 건조를 시작해야 한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실물 대신 기술을 이전해주겠다는 뜻입니까?”

“뒤쪽이오. 당장 급하게 쓸 한두 척이 아쉬운 거라면 모를까, 당신으로서도 생산능력을 보유하는 편이 더 이익일 것 아니오? 당신 같은 무기 상인에게는 말이오.”

당연히 이익이지. 카르텔의 잠수정은 체급이 작아 내륙에서 건조하여 강을 타고 바다로 나가는 물건이다. 건조시설도 본격적인 조선소 레벨일 이유가 없어, 겉보기엔 커다란 창고 수준에 불과하다. 그런즉 기술만 손에 넣는다면 저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 어딘가의 깡촌에다 설비와 인력을 갖춰놓고 원하는 만큼 찍어낼 수 있게 될 것이었다. 처음엔 다소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그러나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

“다 좋은데 의문이 하나 있군요.”

“뭐요?”

“당신이 대변하는 조직이 「로스 제타스」이자 「북동부파」라는 점 자체입니다. 「북동부파」가 자체적으로 보유한 기술로 내가 제시한 ROC를 충족시킬 수 있습니까? 난 회의적일 수밖에 없군요.”

ROC. 이 용어는 요구운용성능(Required Operational Capability)의 약자로서, 문자 그대로 특정 장비를 조달할 때 바이어가 공급자에게 요구하는 구체적인 성능을 의미한다.

내가 원하는 건 순항속도 4노트에 일정 시간 일정 심도 이상으로 완전잠항이 가능하며, 정숙성과 기계적 신뢰성이 높고, 최저 10톤의 화물을 적재한 상태로 대양을 횡단할 수 있는 최고 사양의 밀수용 잠수정이다. 여기에 선체는 비금속 복합재를 써서 자기장 탐지(MAD)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한다는 조건이 추가로 붙는다.

이 ROC는 모든 카르텔이 축적해온 잠수정 제작 기술의 정점에 해당하는 것이다. 「로스 제타스 북동부파」는 그 정도의 고급기술을 보유하고 있을 법한 세력이 못 되었다. 해상밀수가 주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잠시 조용하던 리까르도는 속이 거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기술진은 시날로아 쪽에서 빼냈소. 설계도 역시 그들이 가져왔다고 들었고. 비용이 꽤나 많이 들었다지.”

그런 것인가. 「시날로아 카르텔」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업계 1인자다. 소모된 비용엔 분명 많은 목숨들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너무 기분 나빠하진 마십시오.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었으니.”

“아니오. 이해하오. 우리가 그런 쪽에선 좀…… 뒤쳐진 게 사실이지.”

리까르도의 순순한 인정은 내가 이쪽 사정에 어두운 눈치였으면 결코 나오지 않았을 시인이었다. 우리를 무시하냐며 윽박이나 질러댔겠지.

나는 다시 한 번 상대의 약점을 찔렀다.

“그렇다면, 결국 처음부터 완성품을 줄 능력은 없었던 거로군요. 기술 확보가 즉각적인 생산역량을 보증하진 않으니까.”

무심한 찌르기에 조금 더 붉어지는 리까르도의 얼굴. 난 그 수치심이 너무 깊어지기 전에 적당한 공감을 내비쳐주었다.

“하기사, 이만한 불경기이니 지역사업에 대한 의존도를 낮출 필요가 있었겠습니다. 국경통제가 강화되어 육상 밀수도 예전 같지 못할 것이고. 현명한 투자였다고 봅니다.”

자칭 군수장교는 가만히 나를 응시하다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러더니 내게 양해를 구하지도 않고 라이터를 탁탁거리며 불을 붙이는 게 아닌가. 발갛게 불이 붙자 바작바작 타는 소리가 선명하게 날 정도로 폐부 깊숙이 빨아들인다. 천장을 보며 후우 뿜는 연기는 천천히 도는 실링 팬 아래에서 물에 떨어진 잉크처럼 흩어져갔다.

계속해서 말리기만 하는 협상에 속이 타는 모양이지.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 그 심정을 이해는 한다마는, 그래도 예의라는 게 있지 않나.

못 배워 처먹은 새끼가.

솔직히 이 협상은 처음부터 내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게임이었다. 「로스 제타스」는 너무도 유명한 카르텔인 반면 나의 「회사」는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는 미지의 조직이기에. 협상 준비의 난이도에서 극명한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결국 이 카르텔 떨거지는 날 무방비로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처지였다. 3분의 1쯤 태운 담배를 손가락 새에 끼우고 물을 마신 리까르도가 다시금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돈이 아니오. 무기를 주시오.”

괜한 말을 꺼냈다가 더 말리기 싫으니 간결하게 나가겠다는 품새다.

“그쪽이 극동에선 끗발 날리는 무기상이라고 들었소. 추장이 소개하길, 어쩌면 북한 놈들 보다 장사를 크게 하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고 하던데.”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말로만 듣던 동양인들의 겸손인가?”

“글쎄요……. 절반의 겸손과 절반의 사실이라는 걸로 해둡시다. 내가 잘한 것보다 그 멍청이들이 잘못한 게 많아서 역전된 우열인지라.”

북한은 무기밀매 시장에서 전통의 강호로 통했다. 특히 제3세계 시장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구가하고 있었는데, 가난한 제3세계 국가들이 운용하는 옛 소련 시절 장비들의 생산/개량/정비 라인을 아직까지도 유지하고 있는 국가가 얼마 없었기 때문이며, 그 소수의 국가들 중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밀수 시장에 발을 들일 나라는 사실상 북한이 유일했던 까닭이다.

또한 중국 입장에서 외주를 맡기기에 괜찮은 상대이기도 했다. 밀수가 기간산업인 불량국가인 데다, 외교적인 환경 때문에 배신할 염려도 없고, 무엇보다 걸리면 모든 욕을 북한이 대신 먹어주니까. 이거야말로 북한의 지위를 독보적으로 만들어준 가장 큰 힘이었다.

하지만.

‘장사의 생명은 신용이란 걸 잊지 말았어야지.’

예컨대 중국이 배송을 맡기는 경우, 그 물건이 자기네에게 없는 것이면 북한은 그걸 반드시 뜯어서 살펴보았다. 또 중국이 품질 좋은 자국제 소총과 탄약을 실어 보내면, 도착지에 이르러서는 어느새 조악한 북한제로 바뀌어 있기 일쑤였고. 여기서 중국제의 품질이 좋다는 말은 어디까지나 북한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

결국 중국은 거래선에서 북한이 차지하는 비중을 덜어내기로 결정했으며, 나는 그 결정의 간접적인 수혜자가 되었다.

“여하간, 무기를 달라…….”

생각에 잠긴 척 손끝으로 팔걸이를 톡, 톡 두드리며 적당한 여백을 만든 나는, 테이블 아래에서 초조히 주먹을 쥐는 리까르도에게 턱을 살짝 들어보였다.

“한번 들어보고 판단하겠습니다. 품목, 수량, 기한, 장소. 하나씩 제시해 보십시오.”

군수장교는 입술을 핥고서 답했다.

“8백 명을 무장시킬 자동화기, 2세대 이상의 야간투시경 및 레이저 조준기 8백 세트, 도트사이트 8백 개, 8천 개의 탄창과 24만 발의 실탄, 7천 2백 개의 수류탄, 경기관총 160정에 탄약 3만 2천 발, RPG-7(대전차로켓) 발사관 80기와 로켓 640발.”

미치광이처럼 많이 부르는군. 특히 로켓이 그렇다. 요즘 제3세계가 뒤숭숭한 터라 값이 많이 올랐는데, 이 시국에 어지간한 소말리아 군벌의 보유량 절반을 상회할 숫자를 요구한 거니까. 이 물량이면 현 국제 암시장의 통상적인 도매가로 환산했을 때 벤츠 C클래스 6천 대 이상을 한꺼번에 주문하는 꼴. 이는 내가 바가지를 씌우지 않는다는 전제 하의 ‘얌전한’ 계산이었다. 그러나 기술이전 비용이라고 치면 저렴한 가격이기도 하다. 어차피 대부분은중국 놈들을 등쳐먹다시피 해서 쌓아놓은 물건들이고.

“이상의 물량을-”

내 부하들을 자극하지 않을 느릿함으로 품에서 지도를 꺼내 펼치는 리까르도. 그는 손가락으로 멕시코 서쪽의 항구 하나를 짚어보였다.

“이달 말일까지 이곳, 푸에르토 바야르타 남쪽 부두로 가져다주시오.”

이번엔 미치광이처럼 빠듯한 일정이다. 이게 돈을 받는 통상적인 주문이었다면 프리미엄을 엄청나게 붙였을 것이다. 나는 시선을 리까르도의 손끝에 둔 채 오른손을 들어 검지를 두어 번 까딱거렸다.

“가능할까?”

“가능합니다.”

부름을 받고 다가온 수연이 항구의 위치를 확인하고서 망설임 없이 속삭이는 확언.

“재고가 충분한 품목들이니, 오늘 지시를 내리실 경우 늦어도 17일 후엔 도착할 겁니다. 말일까지는 닷새의 여유가 남습니다.”

그런가. 이 녀석이 가능하다면 가능한 것이다. 지금쯤 내 비서실장의 머릿속엔 시간 단위의 운송계획표가 그려지고 있겠지.

문제는 따로 있다. 수연을 물러나게 한 나는, 나와 수연 사이에서 한국어로 오간 대화에 신경이 곤두선 리까르도를 의문을 담아 바라보았다.

“다 좋은데, 여긴 그 「시날로아 카르텔」의 영역이 아닙니까?”

시날로아 카르텔. 멕시코 카르텔 서열 1위이면서, 지난 해 정규군을 상대로 총력전을 벌인 끝에 대통령이 사실상의 항복 선언을 하도록 만든 정신 나간 새끼들. 정부 측의 교전 중단 사유는 “정말 더러워서 못해먹겠다.”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어쨌든 일개 카르텔을 상대로 정규군 2천과 경찰병력 5천을 투입하고도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는 건 정부의 굴욕적인 패배가 맞다. 푸에르토 바야르타 항(港)은 바로 그 더러운 놈들의 영토에 위치하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