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엘 무니씨오네로 (2)
이틀 후, 휴스턴 동쪽 근교.
추장이 소개한 멕시코의 도망자는 호수와 바다가 가까운 목장에서 담백한 은퇴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솔직히 의외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도박과 마약으로 가진 돈 다 날리고 거지 신세가 된 막장인생쯤을 예상했건만. 꼭 카르텔에 대한 선입견 때문만이 아니라, 그 지경은 되어야 비로소 제 인맥을 팔겠다고 나설 거라 여겼던 까닭이다.
‘그나저나, 오는 길에 개 사료를 사달라니.’
제 앞마당에서 보자고 한 것까지야 이해가 가지만, 살다 살다 내게 개먹이 심부름을 시키는 놈은 처음이었다. 순진한 놈인지 무례한 기선제압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추장이 전자에 가깝노라 대신 해명해주지 않았다면 간단히 무시해버렸을 거다. 내 성향을 시험해보려는 의도라면, 뭐, 들어주지 못할 것도 없지.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서늘한 바람에 희미한 분변 냄새가 실린다. 차가 달리는 속도로 「두 목동(Dos Vaqueros)」이라고 쓰인 간판이 가까워졌다.
“여긴가 봅니다.”
직접 운전대를 잡은 경태가 점포 앞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전후에 붙었던 호위차량이 양옆으로 나란히 정지한다. 목초지가 많은 땅인지라, 이 한적한 사료 가게 근처에도 회로를 개방한 수목들이 수십 그루나 분포했다. 경치는 아름다워도 사람이 살기 좋을 땅은 아니었다.
“차 안에서 기다리시겠습니까, 아니면-”
“나도 바람이나 쐬지.”
“옙.”
잽싸게 내린 경태가 문을 열어준다. 호위차량에 탄 애들은 차량 내 대기였다.
꿔억 꿝꿝-
점포 입구 근처로 간 나는 닭장 울타리 안에서 모이를 쪼는 중병아리들을 바라보았다. 이 예비 닭대가리들 중에도 회로가 뚫린 개체들이 있었다. 닭장 구석에 남아있는 핏자국과도 무언가 관련성이 존재할 테지. 경태가 입맛을 다시며 탄식했다.
“앞으로는 치킨도 먹기 힘들어질지 모르겠네요.”
비록 나처럼 눈으로 모든 것을 볼 순 없을지언정, 내가 직접 각성을 조율해준 녀석들은 마력장의 변화를 간접적으로 느낄 만큼 감각이 열려있었다. 즉 각성체를 찾아낼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종종 조직 본사로 치킨과 맥주를 주문하는 녀석의 탄식엔 진심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그게 그렇게 걱정이냐?”
“형님. 치킨은 아주 중대한 문제입니다. B와 D 사이의 C는 탄생과 죽음 사이의 치킨이라는 말을 못 들어보셨습니까? 치킨의 실종은 곧 인생의 실종과도 같습니다.”
수연이 미간을 살짝 찡그린다.
“넌 형님 앞에서 농담이 너무 가볍다.”
“아, 누님도 참. 이건 트렌드입니다, 트렌드. 제가 아니면 누가 형님께 요즘 세대의 트렌드를 알려드리겠습니까? 저는 형님께서 몸뿐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젊게 사시도록 도와드리는 겁니다. 사람은 유행에 뒤처지는 만큼 늙어가는 거라고요.”
“…….”
수연은 이제 뭐라고 대꾸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과묵한 녀석으로 하여금 이렇게 다채로운 표정들을 짓도록 만드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겠다.
농담이야 어쨌든, 경태의 예견엔 언제나처럼 일리가 있었다. 한국의 치킨집 숫자가 전 세계 맥도날드 매장 숫자보다 많을 수 있는 건 치킨이 서민적인 먹거리의 대표 격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병아리 감별에도 능력과 감각이 궤도에 오른 각성자가 필요할 것이고, 빈발하는 사고들로 말미암아 배터리 케이지를 이용한 대량 사육 및 기계적인 도살마저 어려워질 터. 그날이 오면 공장식 사육에 의지하던 모든 육류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겠지. 프랜차이즈의 성세는 결코 지금과 같을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시장엔 벌써 그 조짐이 나타나는 중이었다. 여의도 김씨의 3/4분기 투자 보고서에서도 제법 상세하게 다루었던 내용.
딸랑, 딸랑-
알림종이 맑게 우는 소리를 듣고 매대를 정리하던 직원이 미소로 우리를 환영했다.
“Hola.”
“Hola.”
인사를 받은 경태가 직원에게 쪽지에 적어온 사료 이름을 보여준다. 아하, 하고 끄덕인 직원이 넓은 매장 안쪽으로 까딱 고갯짓을 한다. 경호실 부하 하나가 직원을 따라갔다. 뒤를 보인 직원은 오픈 캐리로 권총을 휴대하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카운터 앞에 진열된 신문과 코르크보드의 벽보들을 눈으로 훑어보았다. 벽보 가운데 유난히 눈에 띄는 하나는 지역 기반 민병대의 모집공고였다.
「올드 리버 타우-밀리샤(Old river Tau-Militia)가 새로운 대원을 모집함!」
영어와 스페인어로 병기된 공고는 「타우-파워」를 보유한 지역민은 누구나 지원 가능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여기서의 「타우-파워」는 당연히 초능력을 뜻하는 이쪽 동네 식 표현이었다.
이변이 이어진 끝에 결국 폐회식조차 치르지 못하고 중단된 도쿄 올림픽은 인류가 세계의 변화를 본격적으로 인지하게 된 계기였다. 그 전에도 여러 징후와 사건들이 있었지만, 파급력 면에서 실패로 끝난 올림픽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여기에 수연이 런던에 가한 공작도 큰 효과를 보았다.
‘엑서터 후작, 윌트셔 백작, 욱스브릿지 백작, 더비의 로드 보일, 플리머스 백작의 차녀…….’
마법적 세계질서의 석권을 위해 「원탁내각」이 접촉할 가능성이 높은 귀족들의 명단. 내가 불러준 이 명단을 토대로, 수연은 원탁의 마스터들과 영국 상원 사이에 오가던 연락을 런던에 스며든 각국의 첩보망에 노출시키는 데 성공했다. 예산으로 들어간 8백만 달러가 조금도 아깝지 않은 훌륭한 성과였다. 그 예산의 절반 이상을 받아먹은 해커집단은 지금쯤 제3세계 어딘가의 호화 리조트에서 화려한 축배를 들고들 있을 테지.
한편으론 각국의 첩보계가 이미 냄새를 맡고 있었기에 한결 쉬웠던 일이었다. 세간에선 「다크 웹」 내지 「다크 넷」이라는 묘한 이름으로 묶어 부르는 토르(Tor) 네트워크 히든 서비스들만 봐도 관련 정보에 값을 매긴 의뢰들이 심심찮게 돌아다니던 마당이었으니까. 암시하는 대가의 규모만으로도 배후가 심상찮음을 알 수 있었다.
이는 원탁 지도부의 권력다툼이 상원에 출석하는 귀족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수면 위로 드러난 덕분이었다. 영국 상원이 아무리 명예직 모임에 불과하다지만 그래도 영국 정계의 일각은 일각. 그렇게 티가 나도록 다투면서 비밀이 유지되기를 바랐던 건 오만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탐욕에 눈이 멀어 선취점을 빼앗기고 만 늙은 제국주의자들. 그들이 저지른 실수에 깊은 감사를 보내는 바이다.
“찾았습니다.”
부하가 개 사료 한 포대를 옆구리에 끼고 와서는 계산대에 올려놓는다. 난 카운터 앞에 꽂혀있던 지역신문 「휴스턴 크로니클」을 뽑아 사료와 함께 계산했다.
차에 몸을 실은 나는 신문을 읽기 시작했다. 요즘은 좀처럼 인쇄된 활자를 볼 짬이 나질 않아, 오랜만에 맡는 종이와 잉크의 냄새가 각별하게 느껴진다. 「휴스턴 크로니클」의 지면은 지역지답지 않게 온갖 사건과 사고들로 가득했다. 지역 단위로도 특종거리가 쏟아질 만큼 세상이 혼란스럽다는 방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면의 머리기사는 방크 드 프랑스(프랑스 중앙은행)에서 터진 사상 최대 규모의 무장 강도 사건이었다.
“꼴좋군.”
“예?”
“유럽 짱깨 놈들 이야기다.”
“아아.”
내 중얼거림에 반응했던 경태는 유럽 짱깨 놈들이라는 말만 듣고도 무슨 사건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언론 취급을 받는 전 세계 모든 매체가 이른 아침부터 관련 소식으로 도배되고 있으니 모를 수가 없는 노릇.
전면 후사경(後寫鏡) 너머에서 경태가 분한 눈빛으로 말한다.
“감히 이 김경태마저 능가하다니. 어떻게 생긴 놈들인지 낯짝 한 번 보고 싶지 말입니다.”
“음? 너를 능가해?”
“금액 말입니다, 금액. 저는 인간사냥이고 걔들은 강도질이라 서로 종목이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제 1조 9천억의 기록을 넘겨버린 대단한 놈들 아닙니까. 제가 벌써 몇 년이나 세계 챔피언 자리를 지켜왔는데. 제반비용까지 감안하면 제 완벽한 패배 아니겠습니까?”
“…….”
헛소리에 가까운 호승심에 옆에서 수연이 이마를 짚는다.
이번에 방크 드 프랑스에서 증발한 금괴와 현금의 가치는 15억 2천만 유로, 한화로 약 2조원을 조금 넘기는 액수였다. 방크 드 프랑스 이전엔 2009년 영국 중앙은행 뱅크 오브 잉글랜드에서 터진 5천 3백만 파운드(한화 약 900억)짜리 강도사건이 최고였으니, 인플레이션을 고려하더라도 프랑스가 영국보다 거의 스무 배를 잃어버린 셈이었다. 언론들이 난리를 칠 만 하다.
난 경태가 얼굴을 보고 싶어 하는 강도들에게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찬사를 보내주었다.
‘버러지들이 아주 제대로 엿을 먹었어.’
원탁과의 악연이 없었다면 내가 가장 혐오하는 국가는 영국이 아닌 프랑스였을 것이다. 이 지랄 맞은 새끼들은 21세기에도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경영하는 독보적인 제국주의 국가였으니까. 독립은 명목상으로만 시켜주었을 뿐. 나는 이번에 털린 자산이 100% 순수한 프랑스의 금이고 지폐이기를 바랐다. 「식민지 협약」에 묶인 아프리카 국가들의 외환이면 별로 재미가 없을 터이므로.
선택 받은 인간들이 직립보행 중장비에 가까워질 수 있는 세계에서 구시대의 보안체계들은 여러모로 변화와 도태가 불가피했다.
목적지인 목장의 진입로는 국도를 벗어나 푸른 초지 사이로 6백 미터를 들어가는 길이었다. 장애물에 구애받지 않는 내 눈으로도 사방 수 킬로미터 이내에 보이는 건물이라곤 고작 몇 채에 불과하다. 그 외엔 목초지 저편에서 소유의 경계를 이루는 방풍림과 검게 물 얼룩이 진 나무 전봇대들이 드문드문 보일 따름. 통행량이 적은 사유지의 도로는 바다와 평야의 바람이 실어온 먼지가 쌓여 뿌연 흙빛을 띠고 있었다. 차량 행렬이 흙먼지를 일으키니 이름 모를 들꽃들이 정강이 높이에서 흔들린다.
안정감을 느끼게 해주는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훗날 은퇴를 하게 된다면 나 또한 이렇듯 정적이고 고요한 장소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곳에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면 좋겠다.
차량이 정지했다. 이번에도 경태가 먼저 내려 문을 열어준다. 목장 앞마당엔 커다란 야기-우다 안테나가 전위적인 장식물처럼 서있었다. 회전초를 뭉쳐 만든 눈사람 형상도 이채롭다. 차에서 내린 난 경태와 수연만 수행하도록 지시했다. 자택 현관 옆 기둥에 기대어 손님을 기다리던 전직 카르텔 간부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모자를 들었다 놓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다.
“Mucho gusto.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소.”
전직 카르텔 간부의 옆엔 아내로 보이는 여자가 서있었다. 경호실 애들 대부분이 차 근처에서 대기하는 걸 보고 적잖이 안도하는 눈치다. 나는 그녀가 비스듬히 든 엽총에 아랑곳 않고 간부에게 다가가 장갑 낀 손을 내밀었다.
“추장에게서 들었겠지만, 황이라고 합니다.”
“후앙.”
간부는 내 가명을 되뇌며 악수를 받았다.
“동양인이라 그런가, 듣기보다는 젊게 뵈는 분이시군. 난 리까르도라고 부르시오. 이쪽은 내 안사람, 아라셀리.”
리까르도와 아라셀리. 과연 본명일까 가명일까. 사실 본명이라도 큰 의미는 없었다. 카르텔의 간부급 망명자에겐 준비된 신분이 여럿일 테고, 미 당국은 이름이야 어쨌든 얌전히 살면서 세금만 잘 내면 관심을 두지 않을 테니까. 전직을 들키지만 않는다면야.
그리고 멕시칸에겐 퍼스트 네임이 익명성의 도구였다. 개나 소나 성인과 천사들의 이름을 따오느라 너무나도 많이 겹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적으론 성씨로 많이 호명하고, 사적으론 비공식적인 별명(Apodo)으로 상대를 부르는 게 보통. 카르텔 간부들이 온갖 별명으로 자신을 칭하는 것도 이러한 문화와 무관하지 않다.
망명자는 경태에게 사료포대를 받아 현관 옆에 내려놓고, 고맙다고 짤막하게 인사한 뒤, 팔짱을 끼며 넌지시 묻는다.
“아까 멀찍이 웬 드론 한 대가 날아다니던데, 당신들이 띄운 거요?”
그렇다. 이럴 때마다 정해진 절차처럼 먼저 파견되는 경호팀이 있었다. 내 시야가 닿지 않는 곳의 위협을 파악하는 역할의. 내가 끄덕였다.
“용케 보셨군요. 일상적인 사전정찰이었지요. 불쾌하셨습니까?”
“불쾌하긴. 신중함은 좋은 거지. 특히 그게 거래상대의 신중함이라면.”
리까르도는 여유롭게 웃으며 제 아내 쪽으로 고개를 까딱인다.
“그러니 당신을 이 먼 곳까지 오게 만든 것도, 내 아내의 낯가림도 신중함으로 봐주시면 고맙겠소. 아무리 추장의 소개라지만, 내 전 직장에 용무가 있는 사람을 총 한 자루 없이 맞이하긴 영 불안한 일이었거든.”
“이해합니다. 목숨은 예절의 가장 좋은 담보물이지요.”
“하하! 그거 멋진 표현이군! 당신이 벌써 좋아지는 것 같소. 들어갑시다.”
리까르도가 문을 열고 먼저 들어가라고 눈짓했다. 발걸음을 옮기자 원목을 짜 맞춘 마루가 작게 삐걱이는 소리를 낸다. 나는 마른 장작 냄새와 라벤더향이 감도는 협상장으로 발을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