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8월의 가로수들 (5)
「그렇지만-」
은인을 의심하는 꼴인 추장이 어렵사리 다시 묻는 말.
「이번 도움은 격이 다르지 않소? 당신에겐 어떤 이익도 남지 않는 일이오.」
달칵. 수연이 내 앞에 커피를 내려놓는다. 난 그것을 한 모금 넘기고서 숨을 길게 내쉬었다. 속고 당한 경험이 반평생인 사람인즉 무기상의 호의를 쉽게 믿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이익이라.”
하지만 저가 안 믿으면 어쩔 건가? 내 호의엔 실제로 어떤 독도 녹아있지 않은 것을. 다시 곱씹는 바, 원주민들은 침략자들의 강요 속에 절반의 자의로 눈물 젖은 길(Trail of tears)을 걷게 될 것이다. 추장이 맞이할 불행에 내가 차지할 지분은 없다. 그러니.
“우정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우정?」
“예. 전번에 말씀드렸던 그 ‘보증은 서주지 않는’ 우정 말입니다, 친구.”
잠깐 사이 세 번째로 침묵하는 추장. 그의 삶에 누가 있어 이런 말을 해주었겠는가. 어떤 호구가 이런 도움을 주었겠는가. 험하게 산 사람일수록 의외로 면역이 없을 감정. 난 지금 그 감정에 손을 대는 중이다. 처음 건드리기가 어렵지만, 일단 한 번 건드리고 나면 그 뒤는 도미노처럼 무너질 것이다.
온 생애를 통틀어 요즘만큼 약해진 적이 없었을 늙은이는 거듭할 때마다 길어지는 함묵(含默)으로 내면의 동요를 웅변하고 있었다. 약점을 내보이지 않고자, 평정을 되찾기 위하여 본능적으로 만들어내는 정적이다.
난 커피 잔을 기울여 후르륵 소리를 내고서 입을 열었다.
“당신네들의 인구가 약 1만. 확진률은 한 5%라고 치고, 1인당 의료비를 30만 달러로만 잡아도 총계 1억 5천만 달러가 되겠군요. 여기에 단체로 실직한 부족민들에게의 긴급 생계지원까지……. 이걸 자치정부와 카지노 연합이 감당할 수 있습니까? 내게 따로 대금을 치르면서?”
1인당 치료비는 30만 달러도 적게 잡은 거다. 원주민 보호구역에 있는 의료시설이라곤 보건소 레벨의 알량한 의료센터가 전부인지라, 치료를 전부 보호구역 바깥에 의탁해야 하니까. 연방 인디언 보건 서비스(Indian Health Services)는 예산부족으로 인해 있으나마나한 기관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여기에 원주민들은 보험을 들어두지 못했거나, 들어두었더라도 보장내용이 수준 이하일 것이었다. 병원 측에서 얼마를 청구하든 청구하는 대로 내야 한다는 뜻. 그렇잖아도 로비를 하느라 가용자금을 소모했을 자치국가 및 카지노 연합에겐 굉장히 무거울 부담이었다. 개개인이 죄다 파산신청을 해버렸다간 부족의 미래라는 게 아예 사라져버릴 판국이었고.
“단지 좀 이상하긴 하군요.”
내 말에 추장이 간신히 반응했다.
「무엇이…… 말이오?」
목소리가 떨린다.
“그쪽으로 보낸 키트가 벌써 5천 개. 키트 하나로 백회의 검사가 가능하니, 카지노 연합에 속한 다섯 부족 전체가 1·2차 검사를 받고도 남습니다. 그런데 왜 추가분이 필요합니까?”
「……빼앗겼으니 그런 게 아니겠소.」
“누구에게 말입니까?”
「누구긴 누구겠소? 당연히 보건서비스부대와 빌어먹을 연방재난관리청 놈들이지! 우리는 키트가 있어도 스스로 검사를 할 능력이 없으니까, 당신이 보내주는 선물은 우선적으로 그놈들 손에 들어가 버린단 말이오.」
“저런.”
핑계 좋은 강탈이다. 답을 알고 한 질문이었지만.
「그렇게 넘어가고 나면, ‘더 위급한 곳’에 사용한다는 명분으로 시간이 갈수록 증발해 버리는 게지. 거기에 관한 무슨 행정명령이 있다면서.」
“부족민들의 검체를 이쪽으로 보낼 순 없었습니까?”
「방역에 관한 모든 권한이 놈들에게 있는데, 검체 수송허가인들 순순히 내주겠소?」
“유감입니다.”
대통령이 정말 잘해주고 있다. 검진키트를 보낸 것만으로 자존심 상한다고 짜증을 낸 인간이니, 검사마저 한국에서 위탁 수행한다고 하면 아주 불을 토할 지경으로 분개할 테지. 가뜩이나 주정부들이 연방정부에 도전해서 시끄러운 마당에, 일개 원주민 부족까지 그 흐름에 편승하는 건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엔 법적인 근거도 있다. 3월 18일자로 발효된 「행정명령 13909호」는 연방정부에 미국 내 모든 방역물품에 대한 총체적인 통제 권한을 부여하며, 앞서 원주민들의 신성한 매장지를 폭파시킨 또 다른 행정명령과 마찬가지로 원주민 자치구역에 대해서도 구속력을 발휘했다. 정말이지 내킬 때만 지켜지는 자치권이다.
현재로선 미국 내 감염이 억제되긴 했지만, 워낙에 큰 피해를 입은 데다 바이러스가 완전히 소멸하지도 않았으므로, 대통령에겐 비상시를 대비해 물자를 비축한다는 명분이 남아있었다.
“별 수 없군요.”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다시 한 번 물량을 확보해보겠습니다. 이번에도 키트 자체의 비용보다는 대기 순번 앞당기기가 문제겠지만, 1만 개 정도라면 어떻게든 되겠지요. 경쟁자들이 전번만큼 쟁쟁하진 않을 테니까. 마스크나 소독제 같은 것들도 최대한 같이 보내드리겠습니다.”
처음에 5천 개를 보낼 때는 대기 순번을 겨루는 경쟁자들이 누구나 다 아는 국가의 정부들이었다. 그러나 주요 국가들이 역병을 억제한 지금은 비교적 만만한 제3세계 국가들을 상대로 밀어내기를 하게 될 터. 들어가는 뇌물의 자릿수가 줄어들 것이다.
「참으로-」
무겁게 한숨짓는 추장.
「참으로 염치없지만, 이번에도 신세를 지겠소. 그리고.」
“그리고 비너(beaner) 카르텔로 이어지는 연줄 찾기는 더 늦어져도 괜찮습니다. 운신부터 자유롭지 못한 마당에 찾기는 뭘 찾는단 말입니까.”
비너는 콩(bean) 먹는 놈들, 멕시코인의 멸칭이다. 미국 놈들은 지들도 베이크드 빈을 처먹는 주제에 누구더러 콩 먹는다고 비하를 하는지. 난 커피 잔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
“나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심력 낭비하지 말고 몸조리나 잘 하십시오. 당신이 쓰러지면 부족을 지킬 사람도 없습니다. 당신의 손녀에겐 아직 버거울 짐이에요.”
「감사, 음, 감사하오.」
나는 잠겨드는 목소리를 못들은 체했다.
“말이 나온 김에, 마샤트 양은 어떻습니까? 건강합니까?”
「물론이외다. 지금도 옆에서 듣고 있다오.」
“그거 다행이군요.”
「회장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해달라는군. 이 아이의 무사함 또한 당신이 염려해준 덕분이겠지.」
“별말씀을.”
「이 아이마저 잘못되었다면 먼저 간 자식 내외를 볼 낯이 없었을 거요. 다시 한 번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소. 내 회장을 정말로 다시 보았소…….」
이 건조한 삶에, 목구멍 아래에서 웃음이 새어 나올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게 얼마만의 일인지. 어쩌다보니 카지노의 현 지도자와 차기 지도자를 함께 녹여놓은 꼴이 되었다. 나는 잘 내려진 커피를 음미하며 스스로를 다스렸다. 비서실장의 솜씨는 언제나 일품이다. 난 맛과 향을 여유롭게 음미하고서 잔을 내려놓았다.
“추장. 가장 낮고 더러운 시궁창에서도 가끔은 답지 않은 인간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조직이 아니라 개인에게 의리를 지켰던 저 「로스 제타스 카르텔」이 대표적인 예지요.”
로스 제타스의 의리는 이 바닥에서 제법 유명한 이야기다. 마약 카르텔을 증오하는 추장이라도 이 예시를 반박하진 못할 것이었다.
“내가 결코 좋은 사람은 아닙니다만, 그 전쟁 미치광이 인간백정들보다는 고상한 인간입니다. 선과 악의 구분은 모호할지언정 아군과 적군의 구분은 누구보다도 확실히 하죠. 그런 내가 말하건대 당신과 당신의 부족은 분명히 나의 진영에 서있습니다.”
자, 그러니 나에게 매달려라. 나에게 목숨을 빚지고 나에게 의리를 지키고 나에게 충성을 다하며, 불바다가 될 런던에서 폭탄을 짊어진 채 내 원수들과 대적할 공포의 기수들을 내놓으란 말이다. 나는 채무자로서의 너희를 환영한다.
“그쪽은 이제 오후 세 시쯤 되겠군요.”
난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
“다른 용무가 없으시다면 통화는 짧게 끝내는 게 좋겠습니다. 부탁하신 물품은 가능한 한 신속하게 보내드릴 테니, 추장께선 더위가 물러가기 전에 그 망할 폐병을 이겨내는 것만 생각하십시오. 이 시기를 놓치면 많이 험난한 겨울을 맞이해야 할 겁니다.”
이제 모르는 사람이 희귀해진 사실이지만, 바이러스는 습기와 열기에 약하다. 「사막의 사람들」이 거주하는 투손 인근은 평균 기온이 높긴 하나 1년 내내 건조하여 방역에 유리한 환경이 못 되었다.
‘요즘이 그나마 비가 내릴 때지.’
습도가 0%에 기온마저 떨어질 겨울이 오면 바이러스는 다시 활개를 칠 터였다. 내가 노리는 젊은 층은 폐병으로 죽을 확률이 낮은 편이나, 후유증이 남으면 양질의 병력자원이 되기 어려웠다. 나를 위해서라도 추장은 방역에 최선을 다해주어야 한다.
「알겠소.」
들리는 음성이 아까보다는 굳었다. 좋은 징조다.
「우리는 결국 이겨낼 거요. 회장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하리다.」
“다음엔 좋은 소식을 기대하겠습니다.”
통화가 종료되었다.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잠시 후 수연에게 손가락을 까닥였다.
“조직 장학생 중에서 쓸 만한 기자를 몇 명쯤 선별해봐라.”
“어디에 쓰시려고 그러십니까?”
“청와대에서 표창이 내려올 즈음, 이번 지원에 관해 기사로 인터뷰를 내보내려고 한다.”
지시를 받은 수연이 희미한 의아함을 내비친다.
“벌써 결정을 내리신 겁니까?”
“결정……? 아.”
수연이 말하는 결정이란 ‘이 나라의 애국자가 되기’에 관한 것이었다. 통화를 하기 전까지만 해도 단발성 명성에 관심이 없었던 내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입장을 번복한 꼴이니 착각할 만도 하지. 그러나 빗나간 추측이었다.
“아니다, 아니야. 나는 단지 적을 속일 발자국을 하나 찍어둘까 싶었을 뿐.”
이는 원탁에 대한 기만책이다. 일찍이 스승새끼가 나를 피난처로 삼으려 했던 것은, 위대한 원탁의 마스터가 열등한 황인종의 몸으로 도망간다는 게 스승 자신을 포함한 제국주의자들 입장에선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던 까닭이다.
같은 맥락에서 나는 그들을 기만할 장치를 마련해둘 수 있다.
훗날, 만에 하나라도 내가 원탁의 눈에 띄어 의심을 받게 된다고 치자. 나에 대한 놈들의 뒷조사는 뜻밖의 인도주의적 행보와 발언들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원주민에게 친화적인 원탁의 마스터라니? 그 무슨 질 나쁜 농담인가.
그게 비록 의심을 무마할 결정적인 증거는 되지 못할지라도, 용의자 명단에서 내 순위를 떨어뜨리는 정도의 효과는 기대할 수 있으리라.
‘앞으로 틈틈이 착한 일을 해줘야겠는데.’
지나치게 눈에 띄면 오히려 의심을 사기 쉽다. 명예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선행처럼 보이도록 주의를 기울여야만 내가 바라는 효과가 극대화될 것이었다.
수연이 까딱 끄덕인다.
“과연. 이해했습니다. 너무 대대적으로 보도될 필요는 없겠군요.”
“그렇지.”
“찾아보면 나오는 수준으로 기사가 나가게 하겠습니다. 대본과 연출도 준비하죠.”
“맡기마.”
한마디 하면 바로 진의를 알아듣는 측근이란 얼마나 편리한 존재인지. 나는 잔에 남아 식어가는 커피를 쭉 들이켜고는 식후의 여유를 마무리 지었다.
이후엔 본사로 실려 오는 나무들을 검수했다. 급속한 성장으로 도로와 인도를 파손시킨 가로수들을, 관할 지자체의 의뢰를 받아 뽑아온 것이다. 입찰에서 독보적으로 낮은 가격을 부른 덕분에 눈독 들인 각성체들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쓸어올 수 있었다.
이 각성체…… 아니, 나무이니 각성수(覺醒樹)라고 부르는 편이 낫겠군. 아무튼 이 각성수들의 1차적인 용도는 본사 주변에 무형의 방어선을 치는 것이었다. 마법이나 초능력을 쓰는 적성세력이 본사를 치려들 경우, 고유의 역장을 형성하는 각성수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적들의 능력사용을 방해하거나 억제해줄 터.
요컨대 경태가 말했던 생문과 사문을 만들어 두는 작업인 셈이다. 이는 비단 원탁만을 경계하는 조치가 아닌, 이후에 발생할지 모를 모든 혼란에 대한 방비였다. 이런 준비들이 결국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을 수 있겠으나, 그러한 평온은 도리어 내가 바라는 바다. 사고를 내다보는 보험은 보험금을 탈 일이 없을 때가 가장 좋은 것이니.
살고자 하는 자는 항상 두려움을 알아야 한다. 용기와 만용의 차이는 두려움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이니까. 두려움에 대한 무지는 그저 소모품의 미덕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