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전율하는 거인 (6)
전투가 끝났다. 총격전이 그치자 오래지 않아 숲의 전율도 잦아들었다.
서열 높은 놈에게 자백제를 투여한 결과는 썩 대단치 않았다. 진정한 마법에 대해서, 원탁과 마녀와 O7A에 대해서, 그리고 황금기의 눈을 가진 자에 대해서 특별히 아는 게 없었으므로.
‘이것들은 철저하게 버리는 패였군.’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나 조금 아쉽기는 하다. 웨일즈의 마녀 입장에선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 정도의 가벼운 감각으로 시도한 일일 것이다. 들어가는 품에 비해 기대수익이 높으니까.
의외인 건 그녀가 직간접적으로 거느린 세력의 역량이다. 영국 본토에 본거지를 둔 주제에, 원탁의 견제 밖에서 수작을 부리는 걸로도 모자라 이 정도의 광신도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소모한단 말이지…….
2인 1조로 외곽 경계를 맡고 있던 놈들과 달리, 숲의 중심부를 지키는 놈들은 열아홉이 한 패거리로 뭉쳐있었다. 이 열아홉은 암세포 형성에 따른 통제력 상실을 우려하지 않았다는 증거. 즉 끔찍한 고통조차 시험으로 받아들일 만큼 차원이 다르게 신실한 사탄의 종복들이란 뜻이었다. 장차 칠각기사단(O7A)이 외연을 확대해나간다면 1순위로 영입할 인적자원들.
마(魔)의 은총(Grace)에 침식당한 사탄숭배자들의 지하교회는 상정 이상으로 거대한 교세를 확보한 모양이다. 그 교세에 조직력은 결핍되어 있을지라도.
난 전투흥분을 가라앉히며 유일한 전리품을 살펴보았다. 손목시계처럼 생겼으되 베젤 안에 들어가 있는 건 별을 그린 원판과 구슬 하나뿐이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비어있던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었다.
“생김새만 보면 그거 같네요. 시간을 알려주지 않는 시계.”
시신을 등진 경태의 말에 나는 시선을 기울였다.
“그런 것도 있나?”
“예. 제가 또 시계를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쩌어기 스위스에서 몇 년 전에 ‘시간을 알려주지 않는 시계’를 출시했지 말입니다. 그게 오틀랑스(Heutlence) 제품이었을 겁니다, 아마. 그것도 시계판 위에 구슬 하나 올려놨던 걸로 기억하지 말입니다.”
오틀랑스……? 모르는 브랜드다. 애초에 세계 최고의 명성을 지닌 브랜드가 아니면 알 가치도 없다. 내게 있어서 명품 시계란 얕보이지 않기 위한 장식품 내지 정치인들에게 주는 뇌물에 불과하니까. 드물게는 자금세탁 및 운반 수단으로 쓰기도 하고.
그도 그럴 게 파텍 필립의 하이엔드쯤 되면 손목에 차고 다니는 수백만 달러가 아닌가. 유사시 담보물로 삼거나 비상금을 마련하기에도 적합하다.
경태는 악마숭배자의 시계를 물끄러미 바라본 끝에 이렇게 평가했다.
“근데 그게 그런 명품 같지는 않네요.”
난 가볍게 끄덕여보였다.
“이건 일종의 나침반이다. 마소와 마력을 좇는 탐지기지.”
“오우. 마법 아이템이네요?”
“아이템?”
“어, 요즘은 대개 그렇게들 부르지 말입니다. 게임에서나 소설에서나.”
“글쎄. 적어도 원탁에서는 아니었는데.”
그들이 신성시하는 「황금기」에 만들어진 것들은 성유물이란 의미에서 「렐릭」이나 「앤티쿼티」 같은 명칭을 쓰고, 고대의 유물이라도 「황금기」 이후에 만들어진 물건들은 「아티팩트(artifact)」라고 부른다. 후자에 속하는 물건들 중 특별히 중요한 것들은 철자가 하나 다른 「아티팩트(artefact)」로 구분하고.
아티팩트에도 속하지 못할 잡다한 것들은 다시 「탤리스만(부적)」으로 분류한다. 대개는 원탁의 마스터들이 이번 ‘변화’ 이전에 만들어낸 잡동사니들. 이 시계를 닮은 탐지기를 굳이 구분하자면 탤리스만에 속할 것이었다.
“뭐, 어떤 명칭으로 부르느냐가 중요하진 않겠지.”
나부터가 편의상 마법의 원천에 마소라는 임의의 이름을 붙이지 않았나. 런던의 원탁에서야 「아이테르」니 뭐니 할지라도 앞으로의 세상이 거기에 맞춰주진 않을 터. 훗날 원탁의 마스터들이 영국 정부를 등에 업고 국제표준을 정하는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야 있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결과를 볼 일이었다. 그것들도 자기들 밑천을 함부로 까 보일 처지가 못 되니까.
“아무튼 그거 혹시 끕이 좀 되는 물건입니까?”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경태의 질문에 질문을 돌려주었다.
“그럴 것 같으냐?”
“아뇨.”
“그래, 아니다.”
“역시…….”
충견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조금 기대했지 말입니다. 이 난리를 치고 얻은 보상인데.”
“진짜 보상은 따로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하. 마법 아이템이라니까 혹시나 싶었죠. 제가 좀 만져 봐도 괜찮겠습니까?”
난 말 대신 탐지기를 휙 던져주었다. 받아든 경태는 원판을 기울여가며 때때로 중력을 거슬러 멋대로 구르는 금빛 구슬의 움직임을 신기해했다.
“오오. 초딩 때 자석 실험하던 추억이 되살아나네요, 이거. 아기자기한 게 형님께서 보여주시던 마법이랑은 또 다른 맛이 있는데요.”
“마스터들도 각자 특기분야가 다르니까.”
이 손목시계형 탐지기는 예전이었다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을 하등품이었다. 감도가 낮아 어지간히 강한 마력이 아니고선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준인데, 과거의 환경엔 그 조건에 해당하는 마력이라는 게 존재하질 않았으니까.
‘원탁의 마스터 개개인을 코앞에 두고도 반응할까 말까 했을 물건인데 어디다 썼겠나.’
허나 이런 폐급이라도 만들기는 쉽지 않다.
산 제물로부터 뜯어낸 영혼을 사물에 접붙여 반영구적으로 술식을 정착시키는 기술은 그레이스가 살해한 마스터의 대표적인 장기였다. 특히 소형화 분야에서. 내 스승새끼는 뛰어난 마법사이긴 했어도 지름 2밀리미터짜리 구슬을 탤리스만으로 만들 능력까진 없었다.
이제 세계가 달라진 만큼 나도 실험을 거듭하면 흉내를 내볼 수 있을 것이다.
탐지기를 지분거리던 경태가 문득 입을 연다.
“형님. 제가 방금 기똥찬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는데요.”
“아이디어?”
“옙. 원탁에 둘러앉은 틀니들이든 십자가로 자위하는 웨일즈의 마녀든, 이런 거 백날 만들어봐야 형님의 눈보다는 못한 거잖습니까?”
“그런데?”
“이 숲의 성질머리는 아까 겪은 것보다 더 거칠어지는 거고요.”
“십중팔구는.”
“그럼 이딴 구슬 장난감 말고 형님의 눈으로만 제대로 된 길을 찾을 수 있을 곳에다 비밀 거점들을 구축하는 게 어떨까 싶어서 말이죠.”
“……그건 당연한 거 아니냐.”
“앗.”
눈을 굴리는 경태. 내가 그 방안을 구상해보지 않았을 리 없잖은가. 「황금기의 눈」이 부여하는 비대칭적 우위를 유감없이 활용할 방법인데. 녹색 미궁에 구축할 여러 거점들의 효용은 간단히 생각해봐도 무궁무진하다. 비상시 대피시설, 밀수 중계지, 비밀창고 등.
잘하면 잠재적 적성세력들로 하여금 내 근거지를 오판하도록 만드는 효과도 있을 것이었다. 이 방안을 처음 떠올렸을 때 가장 매력을 느꼈던 부분.
“문제는 좋은 터가 의외로 드물 거라는 점이지.”
“그렇군요…….”
“한국만 해도 그렇다. 그쪽에 적당한 장소가 얼마나 있을 것 같나?”
질문을 받은 경태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많진 않겠네요, 확실히.”
한국은 이런 면에서 괜찮은 환경이 아니다. 산지가 70%라곤 하나 국토의 절대면적 자체가 작고, 질적으로는 「대통령」이 있던 국립공원이나 숲 전체가 단일 유기체인 이 「전율하는 거인」에 미치지 못하니까. 적의 이목을 내 진짜 기반으로부터 떨어트려놓기 위한 더미 사이트(dummy site)로서의 후보지로는 특히 더 부적합하다.
해외로 눈을 돌리면 후보지가 대폭 늘어나지만, 그 대부분이 격오지일 터라 거점을 건설하고 유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 될 터였다. 배치할 인력부터 애매하고.
무엇보다 바다 건너에 둔 인력이 동양계 일색이면 그건 그 자체로 하나의 단서가 되어버린다. 내 진짜 근거지를 추정할 단서가. 영국 본토공략과 마찬가지로 비동양계 추가 인력을 구해야만 가능할 일인 것이다.
경태는 멋쩍어하는 낯으로 말했다.
“저는 그, 팔문둔갑(八門遁甲) 같은 걸 상상했지 말입니다.”
“팔문……뭐?”
“팔문둔갑이요. 연의에서 공명이 쓰는 술법 겸 진법 있잖습니까. 형님도 삼국지연의는 읽어보셨을 텐데요?”
소설을 낭비로 여기는 나라도 삼국지는 읽어보았다. 흥미가 일어서가 아니라 그게 일부 중국 새끼들을 상대하는 데 도움이 되는 까닭이었다. 문화대혁명으로 문화를 한 번 다 태워먹은 X신들에게 그나마 남아있는 문화적 자산의 대표 격이니까.
물론 그렇게 상대해주는 놈들 치고 정사나 연의를 제대로 읽어본 작자는 드물었다. 그들 대부분이 아는 지식은 깊이가 깊지 않았는데, 그래서 더더욱 원전을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놈들이 맞장구를 칠 수 있을 만큼의 앎을 내비쳐주면, 좋아하는 놈들은 어찌나 좋아하는지.
예컨대 연의를 수십 번이나 정독했다고 자랑하는 놈 앞에서 예의를 차려 조금 더 아는 모습을 보여주면, 제 수십 번의 정독이 허세임을 인정하는 대신 나를 더 대단한 인간으로 추켜올려 문제를 해결하는 식이다.
자존심 빼면 시체인 X신 머저리들에게 눈높이를 맞춰주기가 이렇게나 피곤한 일이다…….
난 기억 속에서 경태가 말한 내용을 끄집어냈다.
‘분명 공명은 육갑천서의 귀신을 잘 부리고 팔문둔갑에 능하다는 서술이 있었지.’
그 힘으로 24신장(神將)을 불러내 부리고 축지법을 사용하며 풍백우사의 비법으로 바람의 방향을 바꾼다는 둥 해괴한 묘사가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 갈피엔 진법(陳法)에 관한 내용도 존재했다. 팔진도니 팔문금쇄진이니 하는 것들. 개(開), 휴(休), 생(生), 두(杜), 경(景), 경(驚), 상(傷), 사(死). 열고(開) 쉬고(休) 살아남는(生) 3개의 문과 두렵고(驚) 다치고(傷) 죽는(死) 3개의 문. 그 사이에 존재하는 길은 막는(杜) 문과 밝은(景) 문을 통해 통제할 수 있다.
경태가 연상한 게 바로 이것일 터였다.
“생문(生門)과 사문(死門)의 개념을 떠올렸던 거냐?”
“예, 예! 바로 그거요.”
“……굳이 따지자면 비슷하기는 하겠구나.”
“그렇죠?”
생문은 살아서 나오는 문이고, 사문은 들어가면 죽는 문이다. 주역 팔괘에 대응하는 이론의 허무맹랑함은 차치하고, 이상적인 거점을 구축한다면 최소한 효과 면에선 유사할 것이다.
내 긍정에 경태는 기가 살아났다.
“어차피 영국 본토로 무기랑 인력을 실어 나르려면 멕시코 만에 중계기지 하나쯤은 마련해야 하지 않습니까?”
“계속해봐.”
“중남미 애들이 열대우림의 강과 늪지에서 잠수정을 건조하거나 화물을 선적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머잖아 그런 거점들 상당수가 어쩔 수 없이 버려질 게 뻔한데, 그중에 우리가 건질 시설이 적어도 하나는 있지 않을까 합니다. 찾거나 인수하거나 하는 거죠.”
어차피 버릴 거, 비싸게 매겨봐야 얼마나 비싸겠냐는 게 경태의 생각이었다.
굳이 아마존 밀림 일대가 아니더라도, 브라질 동북부엔 마약 카르텔이 거점을 숨길 만한 그늘이 허다하게 널려있다. 강과 바다가 만나 이루는 혼탁한 물길들은 무수히 많은 나무뿌리의 형상으로 밀림 가득한 해안을 파고든다. 그 잔뿌리 하나하나가 연간 수백 톤씩의 코카인을 공급할 잠재력을 지닌 마약시장의 모세혈관들이었다.
난 숙고 끝에 대답했다.
“말처럼 간단할 일은 아니겠다만, 기회가 닿으면 검토해보마.”
그리고 시선을 숲 바깥을 향해 돌렸다.
“정리할 거 있으면 정리해라. 슬슬 나가야지.”
“옙.”
중심부의 회로는 이미 확인했다. 느린 탐색이었고 낮이 짧은 계절이었으므로 이제 곧 하늘의 색이 변하기 시작할 것이다. 보안관들의 허술한 순찰을 피해 빠져나가는 건 조금도 어려울 일이 아니었다.
나는 오늘 거인의 회로도와 더불어, 런던의 원탁이 지닌 지식의 총록(總錄) 「장엄한 황금의 책(Codex Gigas Aureolus)」에도 실려 있지 않은 마법의 조각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