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19화 (19/561)

#5. 짐승사냥 (7)

맹렬히 고민하던 프레이저가 눈치를 보며 내놓은 답은 돈이었다. 정해진 상납이 아닌, 자발적인 각출과 헌납을 미끼로 상대를 불러내겠다는 것.

‘크게 기대도 안 했다만.’

이런 놈들 수준이 거기서 거기지.

그래도 먹히기는 먹힐 것이다. 내가 한 조직의 수장이기에 쉬이 보이는 바이지만, 「백색근위대」는 관리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조직이었다.

당장 눈앞에서 질질 짜는 머저리만 봐도 그렇다. 그토록 많은 범죄를 주도했는데도 이 머저리의 거미줄 문신은 고작 세 겹에 불과했다. 감옥에서 보낸 시간이 3년밖에 안 된다는 뜻. 적어도 이놈 하나는 철저하게 지켜준 것이다.

이 바닥에서 법적인 보호는 지도자의 권능이다. 조직의 힘이 법을 능가하는 걸 보여주는 것만큼 단시간에 소속감과 충성심을 고양시키는 일도 드물다.

허나 그 권능을 행사하는 데엔 돈이 든다. 그게 뇌물이든 변호사 수임료든. 뇌물은 그냥 고정비용으로 들어가는 거고, 뇌물을 먹이고도 재판을 피하지 못하는 경우 기본적으로 수십만 달러가 깨진다고 봐야 한다. 강력범죄에 대한 변호사 수임료는 시간당 3천 달러를 가볍게 넘기곤 하니까. 로펌의 정식 파트너쯤 되면 시간당 1만 달러도 우습다. 그 정도가 아니고서는 가야 할 감옥을 안 가게 만들어 주거나, 형량을 무의미한 수준으로 줄여줄 수가 없다.

여기에 조직의 운영비용은 또 별개.

그러므로 제이가 그간 이놈들로부터 받아왔던 상납금은 유지비용과 충성맹세 이외의 의미가 크지 않은 것이었다. 돈을 헌납하겠다고 나서면 금액 무관하게 좋다고 받을 첫 번째 이유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공돈을 싫어할 사람은 없다.

“그래서 얼마를 바치겠다고 할 셈이냐?”

내 물음에 프레이저가 즉답했다.

“40만 달러!”

한숨이 나온다. 난 얼간이의 뺨을 툭툭 치며 목소리를 낮췄다.

“말이 되는 액수를 이야기해야지, 응?”

제이의 아이큐가 두 자리가 아닌 이상 의심부터 하고 볼 금액이다. 사무실 금고에 40만 달러가 들어있긴 했지만, 같이 있던 장부의 내용을 보건대 그 금액의 절반 이상은 마약 도매상에게 지불할 대금이었다.

게다가 이놈들이 욕심이 좀 많은 놈들이어야지.

나는 거북이처럼 움츠러든 얼간이에게 금액을 정해주었다.

“1만 달러.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할 거다. 「백인국가」 건설에 조금이라도 더 보탬이 되고 싶다고 둘러대.”

“너, 너무 작지 않겠습니까?”

“네놈들 수준엔 그것조차 과해.”

그래. 과하다. 그러나 믿을 것이다.

‘믿고 싶을 테니까.’

제이는 확신범이고, 확신범에게 중요한 건 신념이다. 제 신념이 졸개들을 깊게 감화시켰다는 사실은, 히틀러 주니어에게 있어선 제 행보의 트로피이자 ‘믿고 싶은 현실’일 수밖에. 얼마나 뿌듯할까. 얼마나 기특하게 느껴질까. 그가 금액 무관하게 좋다고 받을 두 번째 이유였다.

“이건 이 정도면 됐다고 치고…….”

제이의 대리인을 불러내자면 우선 날부터 밝아야 한다. 이른 새벽부터 연락을 넣었다간 수상한 낌새를 챌 게 뻔하잖나. 그때까지는 이 우두머리 쓰레기를 살려둘 필요가 있다. 적어도 통화는 멀쩡하게 가능한 상태로.

“이봐, 프레이저.”

“옙!”

프레이저의 박박 민 머리는 검은 문신들로 흉하게 뒤덮여있었다. 난 권총 끝으로 그 문신들 가운데 하나를 쿡쿡 찔러댔다.

“너는 네가 진정 아리아인의 혈통이라고 믿나?”

내가 찍은 문신은 위아래로 리본이 감긴 철십자 문양이었다. 리본 안엔 「백인국가와 아리아 인종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같잖은 글귀가 적혀있었고. 권총 총구가 제 머리통에 닿자 프레이저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대답 안 하지?”

팔을 든 내가 권총손잡이로 내리치려 들자, 프레이저는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쳤다.

“믿습니, 흐읍, 믿습니다!”

숨이 부족해 중간에 끊어지는 외침이었다.

“믿는다고?”

“예!”

“무슨 근거로?”

“저는 배, 백인이니까요!”

무식이 튀는 근거다. 백인 혈통이 아리아인 하나인 줄 아나?

“그래서, 유전자 검사는 받아봤고?”

“……안 받았습니다!”

“왜? 검사가 유행했던 걸로 아는데. 네놈의 인터넷 친구들 사이에서 말이야.”

“그건…….”

퍼억! 자꾸 뜸을 들이는 꼴이 마음에 안 들어서 내리찍었다. 철십자 문신이 찢어지고, 권총 손잡이 아래엔 기어코 피와 기름이 묻게 됐다. 손을 좀 덜 쓰려고 해도 이렇게 학습이 느려서야. 난 소음기 끝으로 이마를 밀어 프레이저가 고개를 들게 했다.

“말해. 그건 뭐?”

눈동자를 위로, 제 이마에 닿은 총구로 모은 백돼지가 또 흐느끼며 답한다.

“유전자 검사는, 그, 유대자본가들의 음모가 있는, 검사를 조작해서 백인의 정체성을, 흑, 정체성을 무너뜨리려는 비열한 음모를, 그거는 믿을 수가 없는, 더러운 유대인들…….”

주술호응이 엉망진창인 대답이었지만 내용은 이해가 간다.

X신.

한때 백인 우월주의자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유전자 검사는, 그들 중 3분의 2가 순수 백인이 아니라는 훌륭한 결과를 보여주었던 걸로 안다. 책으로 이 사실을 접했을 땐 머저리들이 과연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궁금했었는데, 사람은 역시 믿고 싶은 것을 믿는 동물이었다.

순수 아리아인은 미국이나 유럽보단 차라리 인도에서 찾는 편이 빠를 것이다. 인도는 혈족과 마을 단위로 카스트 구분이 엄격하니까.

‘그러고 보면 「마녀」가 인도 출신이었지.’

「마녀」 그레이스.

식민지 시절의 인도에서 태어났으며, 아리아계에 속하는 혈통과 탁월한 미모 때문에 영국의 늙은 마법사에게 납치당해 첩살이를 했던 여자. 그녀는 탐욕스러운 납치범을 계획적으로 유혹했고, 애첩의 아름다움이 영원하길 바랐던 마법사는 원탁의 계율을 어기면서까지 그녀에게 자신의 마법을 공유했다. 오죽 깊이 빠져있었으면 그녀를 제 인생의 은총(그레이스)이라고 불렀을까.

늙은 제국주의자를 다리 사이에 끼고 기회를 엿보던 그레이스는, 마침내 자신을 희롱하던 원탁의 마스터를 살해한 뒤 그의 가장 중요한 유산들을 가로채 잠적했다.

스승새끼를 포함해 원탁의 제국주의자 모두가 끔찍하게 증오하던 여자였다. 그녀는 「빛과 진리의 원탁」 최대의 치욕이자 최악의 손실이었으므로. 스승새끼의 배신이 그 최대와 최악을 동시에 경신해버렸지만.

‘내가 그 여자와도 손을 잡을 수 있을까?’

시간이 흘러 1999년에 다시 자취를 드러냈을 때, 그녀는 악마숭배집단 「O7A」의 그랜드 마스터가 되어있었다.

“선생님…… 선생님…….”

갈라진 목소리로 나를 애타게 부르는 프레이저.

“귀에서 피가 멈추지 않습니다. 이대로는 죽을 겁니다……. 제발, 선생님, 아직은 제가 필요하시잖습니까……. 제발 좀 살려주십시오. 제발요…….”

이 애송이, 피 흘려본 적 없는 티를 너무 많이 낸다. 어쩌다 이런 놈이 두목이 되었지? 나는 한심한 눈으로 프레이저를 바라보다가, 가까운 부하를 향해 손을 펼쳤다.

“칼.”

칼 소리를 듣고 또 코를 벌름거리는 프레이저. 확장된 두 눈이 내 손으로 들어오는 칼에 못 박힌다. 난 불빛에 날을 비춰보며 물었다.

“프레이저. 혹시 마법을 본 적이 있나?”

“예?”

나는 내 영의 회로에 술식 연산을 돌렸다. 회로가동이 불완전한 지금도 무리 없이 쓸 수 있는 단순하고 간결한 술식을. 이에 따라, 칼날의 차갑던 금속광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프레이저는 점차 뜨거워지는 그 광채를 숨도 못 쉬고 응시했다. 두목이 맞는 걸 보고만 있던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

치이이이-

“끄아아아아악!”

고기 익는 냄새가 난다. 난 칼을 뒤집어가며 프레이저의 잘린 귀를 지졌다. 꾸욱 눌렀다 떼니 기름 덜 먹은 프라이팬처럼 살점이 조금 뜯어져 나왔다.

“술.”

손가락을 까딱이자 부하가 얼른 위스키를 가져다준다. 난 뚜껑을 열고 반쯤 남아있던 내용물을 프레이저의 머리 측면에 부어주었다. 프레이저가 다시금 자지러졌다.

술의 도수가 낮아 소독효과는 없겠지만, 그래도 깨끗한 물 대용으로는 쓸 만하다. 상처가 건조해져 흉이 더 쉽게 지기야 하겠으나, 그게 지금 문제가 되나? 난 부하에게 빈 병과 칼을 함께 돌려주었다.

칼에 모였던 시선들이 내게로 옮겨온다. 이해를 넘어선 것에 대한 공포가 더해진 시선들.

바깥이 소란스럽다 싶더니, 시차를 두고 호출한 돼지 네 마리가 추가로 잡혀왔다. 이번엔 저항이 좀 있었던 모양이다. 하나는 총구멍이 많아 조만간 죽을 상태였다. 죽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내 부하들은 놈을 비닐로 단단히 말아 포장했다.

퍼덕퍼덕!

포장당한 녀석이 산소부족으로 몸부림친다. 비닐 안쪽의 얼굴엔 청색증이 올라왔다. 산소부족으로 말미암아 눈가와 입술이 파랗게 물드는 것이다. 죽어가는 자와 눈이 마주친 돼지들이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촬영을 담당한 부하가 말없이 이 광경을 녹화했다.

사람이 묶인 의자가 점점 늘어나니 이것도 꽤 신선한 풍경이다. 어지간해서는 이만한 수의 사람을 한꺼번에 묻어버릴 일이 없었으니까.

눈이 풀린 프레이저가 오한에 떨며 묻는다.

“선생님께선 설마 마법사(Wiccan master)이십니까?”

“내가 그런 엉터리로 보이나?”

“…….”

이놈이 말한 마법사는 진정한 의미의 마법사가 아니다. 요 몇 년간 북미에서 가장 빠르게 확산중인 종교, 마법숭배교단(Wicca)의 사제지.

빠르게 확산중이라고 해봐야 신도의 절대수는 고작 2백 몇십만 정도지만, 밑바닥 시궁창에서 기는 인생일수록 그런 미신과 거리가 가까운 법이었다. 신도가 아니더라도 주술과 저주는 신경 쓰는 놈들이 태반. 이건 교육 수준의 문제다.

특히 이런 동네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중남미나 카리브에서 넘어온 인구로 인해 산타 무에르테니 요루바 이파니 하는 주술 신앙들의 영향이 강하니까.

당장 이 머저리의 몸뚱이에도 관련된 유형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이는 내가 계산적으로 마법을 내비친 이유였다. 상대의 내면에 있는 두려움의 씨앗을 움틔우기.

아예 마력으로 뇌와 신경 자체를 건드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단순히 술식을 사용하는 것과 그 술식으로 영이 깃든 육을 침식하는 건 완전히 별개의 영역이었다.

“흑……으흑…….”

가뜩이나 염증으로 골통에 열이 차 머리가 둔해진 상태였을 프레이저는, 심리적으론 더 이상 부수고 흔들 여지가 없을 만큼 완전하게 굴복한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도 음경은 여전히 빳빳하게 서있어 꼴 보기 싫다.

‘아니, 더 보고 있을 필요도 없나.’

깡패 주제에 깡이 없어도 너무 없는 쓰레기여서 일을 하다 만 기분이 들긴 하지만, 이쯤 됐으면 나머지는 부하들에게 맡겨놓고 쉬어도 무방할 터였다. 이제 와서 뭘 꾸미거나 속일 엄두를 낼 수 있으려고.

“선생님…….”

“뭐.”

“맹세합니다. 시키는 건 뭐든 다 할 테니, 끅, 제발 살려주십시오. 살려만 주시면 상납금도 바치겠습니다…….”

“하는 거 봐서.”

“저, 정말입니까?”

“진정한 마법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럴 리가 있나. 그러나 프레이저는 어둠 속에서 한줄기 빛을 본 표정이 되었다. 거짓말을 하면 주술의 힘을 잃어버리느니 어쩌니 하는 소문을 들어봤을 테지.

갱들의 세계에 동화적인 구석이 있다는 건 얼마나 우스운 노릇인가.

“내 부하들에게 협조해라. 아침에 그 결과를 보겠다.”

“예! 예!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난 필사적인 얼간이와 그 외의 나머지를 부하들에게 맡기고 사무실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사무실엔 새벽의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 아직까지 열려있던 창문을 닫고, 캐런 윌리엄스와 대화를 나누던 의자에 앉는다. 난로의 열기와 기름 냄새가 새삼 피로를 자각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여기서 눈을 붙이는 건 무리였다.

‘의뢰를 완수하면 하루나 이틀은 쉬어야겠군.’

지금은 활자를 볼 생각도 들지 않는다. 간간이 들려오는 비명 속에서, 나는 따뜻한 빛을 쬐며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가끔은 이런 낭비가 불가피한 순간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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