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모색 (5)
“한 가지 더.”
나는 손가락으로 내 눈가를 툭툭 건드려보였다.
“이 눈. 놈들에겐 마소와 마력을 시각적으로 관측할 수단이 없다. 관찰에 기초한 연구가 어렵지. 그러니 생각이 비슷한들 우선순위는 다를 수밖에.”
또한 인간이야말로 자연계에서 가장 우월한 존재이며 자신들은 그중에서도 특별히 더 우월하다고 믿는 놈들인 관계로, 인간의 가장 위대한 지혜인 마법을 하찮은 짐승과 식물들의 원시마법으로 더럽히려 들 것 같지도 않다.
대신 놈들은 풍부한 유물과 전승을 통해 까마득한 고대의 「황금기」를 더듬을 것이다. 런던의 원탁은 마법에 관한 모든 기준을 바로 그 시대에 두고 있으니까.
그들과 나, 누구의 방식이 더 옳은지는 결과가 알려주겠지.
“위험도가 의외로 낮다는 사실은 이해했습니다.”
경태가 끄덕인다.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거 없겠죠. 마침 4/4분기 종합 전술훈련 받던 애들이 복귀할 때니까, 허락만 하신다면 걔들을 돌려서 쓰겠습니다.”
“숫자가 얼마나 되는데?”
“잠시만요, 형님.”
경태가 핸드폰을 보며 대답했다.
“191명입니다.”
“너무 많다. 한적한 동네에선 지나치게 눈에 띄는 규모야.”
“넵. 그럼 성적순으로 스무 명만 추려서 대기시킬까요?”
“그렇게 해라.”
난 수정된 건의를 받아들였다. 191명이면 멕시코 카르텔의 거점을 공략해도 좋을 숫자다. 전면전까진 무리더라도.
내 조직의 행동타격대원들은 정기적으로 미국에서 전술훈련을 받는다. 단순히 훈련이 가능한 국가라면 얼마든지 많으나, 전문적인 레벨의 전술 아카데미가 민간인에게까지 열려있는 국가는 미국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이 바보는 아닌지라 이런 훈련기관들을 국무부에서 감시하기는 한다. 그러나 조직의 행동대 전원은 명목상 보안업체나 경호업체, 사설군사기업(PMC) 등의 직원 신분으로서, 다수의 트레이닝 센터에 나누어 입소시키므로 의심을 받을 일이 없다. 게다가 찾아보면 고객의 신원을 묻지 않는 센터들도 많았다. 가격이 다소 비싼 게 흠.
일단 눈앞의 경태 녀석부터가 그런 훈련에서 두각을 드러냈던 인재다. 경력 쟁쟁한 교관들이 보내오는 평가서엔 항상 최고라는 수식어가 들어가 있었고.
가정일 뿐이지만, 일본 최대의 지정폭력단인 「로쿠다이메 야마구치구미(六代目山口組)」와 전면전을 벌여도 행동대만으로 압도할 자신이 있다. 그들이 자랑하는 1만 1천 임협(任侠) 집단은 내 부하들의 질적 우위 앞에서 무의미한 허수나 마찬가지였다.
‘반수가 늙다리들이기도 하고.’
범죄조직으로서의 야쿠자라면 모를까, 폭력조직으로서의 야쿠자는 이미 한물 가버린 지 오래다. 나라가 늙으면서 폭력조직도 늙어버린 경우였다. 필요하다면 정규군과도 한판 붙는 멕시코 놈들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
경태가 물었다.
“그래서 가시려는 데의 구체적인 위치가 어떻게 됩니까?”
“버섯은 오리건에 있지만, 먼저 캘리포니아의 세쿼이아 숲부터 보고 가려고 한다.”
“어, 여기에다가 찍어주시면 안 될까요?”
“줘봐라.”
경태는 내게 지도 어플리케이션을 띄운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난 그 지도 위에 시에라네바다 산맥 남쪽의 국립공원에서부터 오리건 주 동쪽의 국유림으로, 그리고 다시 유타 주의 소도시로 이어질 여정을 표시했다. 미리 계획을 세웠음에도 정확한 위치까지는 기억이 나질 않아, 나도 내 폰으로 정보를 다시 찾아봐야만 했다.
폰을 돌려받은 경태가 갸우뚱 한다.
“거 참 공교롭네요. 형님께서 말씀하신 ‘거대한 것들’은 어째 다 미국에만 몰려 있답니까?”
그건 나도 공교롭다고 느낀다.
“모르지. 아마존 같은 곳에 미처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더 있을지도.”
어쨌든 미국에게 있어서 좋은 일만은 아닐 것이다. 거대한 것들은 앞으로 그 거대함만큼의 미지이자 잠재적인 위협으로 거듭날 테니. 미국뿐만 아니라 국토가 넓고 식생이 풍부한 나라들은 예외 없이 고난을 겪겠지만.
늦은 식사 후의 이야기가 다소 길어졌다.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늦었구나. 오늘은 이쯤에서 정리하자.”
“앗, 알겠습니다.”
두 녀석이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아직 자정이 되지 않았으나, 수면의 질이 떨어지는 난 불가피한 상황이 아닌 이상 하루를 일찍 마무리하는 편이었다.
조직의 ‘본사’로 돌아가는 건 내일이다. 내가 묵을 특실은 일본식 정원을 갖춘 독립적인 공간이었다. 씻고 옷을 갈아입은 나는, 마루의 유리문을 통해 처마 너머로 떨어지는 눈발을 보았다. 밀가루를 뿌리는 것처럼 입자가 고운 가랑눈이었지만, 그래도 왕대나무의 마디와 푸른 잎 위에 조금씩 쌓이는 모습이 보인다. 대구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이 풍경을 좀 더 평범하게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황금기의 눈」이 제공하는 시야는 쓸 데 없이 고성능이어서, 눈을 감아도 눈꺼풀을 투과하여 보여주는 수준이다. 어느 정도 조절은 가능해도 시각을 아예 차단해 버리지는 못한다. 그래서 요령이 생기기 전까진 하루하루 잠드는 것이 너무나도 힘겨운 일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어렵게 잠들어 봐야 얼마 못 가 악몽에 짓눌려 깨어버리니, 한때는 정말 잠이 부족해서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지금도 눈에 비치는 모든 것들의 겉과 속이 한꺼번에 보이는 건 기본이다. 집중하면 대나무의 뿌리에서 줄기로, 줄기에서 잎으로 이어지는 양분과 화학적 신호의 흐름들까지도 눈에 들어온다. 시각적 인지의 과포화 상태다. 고대의 유물은 나에게 이처럼 초월적인 인지능력을 부여했다. 아름답지 않은 건 아니나, 평범함이 그리울 때가 많다. 피로와 과도한 정보량으로 인해 겪는 두통은 일상이나 마찬가지.
그래도 사람이 있는 장소보다는 이렇게 조용한 풍경을 보는 게 나았다. 내게 있어서 사람이 많은 장소란 내장과 근육의 꿈틀거림으로 가득한 인체의 신비전이나 다름없으니까. 오래도록 겪어 익숙해진 지금조차, 이따금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은 순간들이 찾아온다.
……자야지.
눕기가 꺼려져 꾸물대는 자신을 다그치는 나날도 지긋지긋하다. 망연히 보던 풍경으로부터 눈을 떼고 방으로 들어온 나는, 이불을 덮고 누워 다가올 악몽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 생각을 떨치지 못하면 오늘 밤 잠은 물 건너간다고 봐야 한다.
달리 무슨 잡념으로 머리를 채우는 게 좋을까.
눈을 감은 시야에 눈꺼풀의 핏줄들이 겹쳐진 천장이 보였다.
#3. 대통령 (1)
해가 바뀌었다. 대구에서의 협상 이후 스물 닷새가 경과한 오늘, 1월 7일에, 나는 경태의 부하가 모는 차에 몸을 싣고 중부 캘리포니아의 내륙 주도(州道)를 달리는 중이었다. 마소의 농도는 변화가 없다.
로스앤젤레스로부터 북상하는 내내 보이는 거라곤 포도밭과 오렌지 과수원뿐인 단조로운 길. 내 옆에 앉아 핸드폰을 지분거리며 시간을 죽이던 경태는, 야트막한 절벽 사이를 지나 갑작스럽게 트이는 절경을 보고 표정을 달리했다.
“와. 경치가 아주 그냥 확 달라져버리네요.”
나는 태블릿에서 눈을 떼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연이은 가뭄으로 수위가 내려가고도 여전히 푸른빛이 넘실대는 호수가 자리 잡고 있었다. 물을 가둔 능선들이 노랗게 죽어있는 건 지금이 추운 계절이기 때문일 것이었다.
“수연 누님이 없어서 아쉽습니다, 형님.”
“어차피 며칠 후에 합류할 거 아니냐.”
“그래도요.”
수연은 아직 한국에 있다. 조직 본사 비서실장 겸 기조실장으로서 산하조직들 및 사업장들의 신년 운영계획을 조율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다. 캠프 헨리의 양키들은 거래 확대에 동의한다는 뜻을 전해왔고, 1월 2일부터 나흘간 진행한 조직 신년회에선 중역들을 모아 앞으로의 경영 방침을 하달했다. 그 방침을 구체화하는 건 수연을 비롯한 참모들과 핵심간부들의 역할. 내가 선택한 사람들의 결정이 곧 나의 결정이다.
경태가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뭔가를 기대하는 눈치다.
“그나저나 어떻습니까? 제가 추천해드린 소설들은. 마음에 드십니까?”
“글쎄.”
나는 잠시 태블릿을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썩 도움이 되지는 않는구나.”
“그렇습니까…….”
“처음부터 큰 기대는 없었으니 실망하지 마라.”
나는 평소 소설을 가까이 하지 않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낭비가 많은 독서이기 때문. 소설은 대개 지식의 전달보다 감동과 흥미의 전달을 더 중시한다. 그건 내가 책에 바라는 바와는 정반대인 지향성이었다.
그러나 대구에서 경태가 했던 말을 곱씹어본 끝에, 앞날을 대비하는 데 소설적인 상상력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사례도 있었으니까.’
2001년, 9/11 테러로 인한 쌍둥이 빌딩의 붕괴는 전 세계 범죄시장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 나는 시장예측을 위해 몇몇 싱크탱크의 학술지들을 꾸준히 받아보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미국연구재단(ASA)의 정기 저널인 「미국연구(American studies)」였다.
기억하기론 아마 거기서 보았던 내용일 것이다.
테러리즘에 관한 문화적 상상력 어쩌고 하는 제목의 짧은 논문은, 테러로부터 한 달 후, 미 국방부가 할리우드 관계자들을 초청하여 어떤 의뢰를 했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이에 따르면 펜타곤은 영화 관계자들에게 집단적인 브레인스토밍을 요구했다. 테러리스트들이 앞으로 어느 목표를 노릴 것인가. 그들의 음모는 어떤 방법으로 실행될 것인가. 그리고 그 음모들을 어떻게 하면 저지할 수 있을 것인가.
논문의 저자는 이 계획이 하나의 소설로 인하여 촉발된 것이라고 적었다. 소설의 내용이 테러의 양상과 매우 흡사했던 탓에, 테러 당일 CNN 뉴스에서도 언급할 정도였다면서. 그 소설을 쓴 작가의 이름이 톰 클랜시다.
경태가 머리를 긁적인다.
“제가 드린 목록은 제 회심의 추천작들이었지 말입니다.”
“내가 바랐던 건 소설적 완성도와는 별개다.”
“알죠, 그야.”
앞쪽에서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진다. 조수석에 앉아있는 건 수연이 제 역할을 대신하라고 보낸 비서실 소속 중간간부였다. 직급은 차장. 조직에서 주는 밥은 상급자인 수연보다 훨씬 더 길게 먹은 친구다. 운전석에 앉은 놈도 경태보다 길기는 마찬가지지만.
나는 백미러로 녀석과 눈을 마주쳤다.
“홍영식이. 뭔가 할 말이라도 있나?”
“아, 아닙니다.”
“말해봐. 얼버무리지 말고.”
“진짜로 별거 아닙니다. 경호실장이 회장님을 편하게 대하는 걸 가까이에서 보니 신기했을 뿐입니다.”
“중요한 건 마음이지 형식이 아니니까. 너희는 내가 그렇게 말을 해도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모자라서 들어먹질 못하는 거고.”
“하하. 그 말씀이 맞습니다.”
홍 차장이 멋쩍게 수긍했다.
“모두를 위해 변명을 해보자면, 회장님께서야 저희들의 속을 본다고 하시지만 정작 저희들은 스스로의 속이 어떻게 보일지를 모르니까 말입니다. 오히려 겉으로만 예의를 지키면 그만인 경우보다 훨씬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되고, 그런 조심성이 자연히 행동에도 묻어날 수밖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나무라겠다고 한 소리가 아니야. 신중한 태도는 좋은 거지……. 내 말은, 속까지 풀어지지 않을 자신이 있으면 너희 역시 경태처럼 굴어도 괜찮다는 뜻이었다.”
“분발하겠습니다.”
“그래.”
형식에 집착한다고 꼭 조직의 능률이 증가하진 않는다. 옛 일본제국 황군이 어디 군기가 빠져서 2류 군대였던가?
어차피 나는 조직에서 대체 불가능한 존재이며, 내가 보유한 능력은 나에게 불가침의 위상을 부여한다. 고로 부하들에게 꼰대처럼 굴 이유가 없다.
난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른 질문을 던졌다.
“수연 녀석 밑에서 일하는 건 익숙해졌나? 나이가 한참 아래라 껄끄러웠을 텐데.”
질문을 받은 홍 차장이 당치도 않다는 반응을 내비친다.
“껄끄럽긴요. 전대 실장만 해도 내가 얘를 안 밀어주면 직무유기라고 했을 정도였고, 회장님께서 사람을 잘못 보셨을 리도 없잖습니까. 단지 강 실장은 감정 표현이 워낙 메마른 사람이라……. 이건 아시지요? 아무튼 그래서 대하기가 좀 어렵기는 했습니다. 그것도 처음 1년 정도였습니다만……. 껄끄러웠다기보단 어려웠다는 표현이 더 정확합니다.”
“다행이구나.”
이때 앞서가던 호위 차량으로부터 운전석에 앉은 녀석의 인이어 리시버로 무전이 들어왔다. 공원 입구를 통과했다는 전언이었다. 의심을 피하고자 선행 및 후속 차량 간 간격을 넓게 잡았으나, 유사시 지원을 받는 데 1분도 걸리지 않을 거리였다.
내가 탄 차도 곧 공원 입구에 도달했다. 차량요금으로 35달러를 징수한 관리직원이 창구를 통해 통행증을 내밀었다.
“7일간 유효한 통행증입니다. 전면 유리창 안쪽에 붙이십시오. 밖에서도 딱 보이게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좋은 여행되시길.”
운전석에 앉은 녀석은 직원과 자연스러운 인사를 주고받았다. 차는 산간 저편에 있을 세쿼이아 숲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