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3화 (3/561)

#1. 삼각비행 (3)

과거를 되새김질하는 꿈은 언제나 동일한 악몽이다.

「나와라!」

포효하는 스승은 인간의 형상이 아니었다.

「어디에 숨은 거냐!」

꺼멓게 번들거리는 촉수가 좁은 골목을 꽉 채우고 밀려온다. 헐떡이며 정신없이 달아나는 내 눈에, 스승이 뻗는 손길은 마치 검은 타르의 급류처럼 보였다. 콘크리트 벽돌에 시멘트를 바른 벽이 좌우로 와르르 무너지고, 박살난 건물로부터 슬레이트 지붕 파편이 치솟는다.

내 어린 시절이 깃든 셋집은 그렇게 부서졌다.

「나-와-라-!」

천둥처럼 울려 퍼지는 스승의 분노. 난 이게 꿈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달리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이 꿈에서 내 의식은 과거의 내 안에 갇힌 채다. 두개골 안쪽이 심장 뛰는 소리로 가득 찼다. 이만큼이나 미칠 듯이 달리는 데도 바람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거운 공기가 축축한 점막처럼 달라붙는다. 마치 괴물의 위장 속을 헤매는 듯한 느낌이었다.

비슷한 갈림길이 반복되던 미로 같은 풍경은 별안간 여러 번 바뀌는 계절을 건너뛰었다. 이곳은 과거의 내 정신세계. 당시의 내가 지니고 있던 온갖 기억들이 무한히, 무작위로, 누더기처럼 이어지는 추상적인 공간이다.

서로 다른 기억들의 경계면은 서로 다른 시간들을 비추는 깨진 거울조각들의 장막처럼 보였다. 나는 흐릿하게나마 그 너머를 볼 수 있었지만, 기억의 주인이 아닌 스승은 그렇지 못한 듯 보였다. 그 차이야말로 아슬아슬한 도주를 가능케 하는 힘이었다.

콰르르르-

돌아보면 가까스로 벗어난 유년기가 지진을 맞은 듯 무너지는 중이었다. 뭉글뭉글 치솟는 먼지구름 너머에 분노한 스승의 형상이 어른거린다. 실체보다 훨씬 더 거대한 그림자. 그러나 이곳은 애초에 실체와 그림자의 구분이 불분명한 영역이다.

새로운 기억의 경계를 넘다가 헛발을 디딘 나는 한바탕 구르며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거기 있었구나.」

스승은 어둠을 펼쳐 날개를 만들었다. 세찬 날갯짓 몇 번으로 구름을 넘은 그는 경계를 넘어 사냥감을 노리는 맹금처럼 떨어졌다. 벼락같은 발톱이 주변 풍경을 통째로 찢어발긴다. 갈라진 균열 사이에 무의식의 혼돈이 일렁거렸다.

나는 무너진 길 아래의 시궁창으로 굴러들었다. 허우적대는 와중에 하수구 바닥의 오수를 몇 번이나 삼키고, 네 발로 기다시피 일어나 콜록거리며 또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헉, 헉, 헉.

내가 굴러든 구멍으로 액화된 스승이 흘러들어온다. 그는 팽창과 수축을 반복한 끝에 검은 비늘을 두른 뱀으로 의태했다. 어둠 속에서 한 쌍의 노란 눈이 태양을 투과하는 호박처럼 타올랐다. 뱀은 수평으로 흐르는 폭포가 되어 철창을 부수고 벽에 충돌했다. 천장에 금이 가며 콘크리트 가루가 쏟아진다.

이 시절의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였음에도, 잡히면 모든 게 끝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것은 영혼을 삼키는 뱀이라고.

불행 중 다행으로 내 기억은 나에게 친숙하고 스승에겐 낯선 장소들로 가득했다. 드물게 스승도 아는 공간이 나타날 때가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공간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끝없이 범람하는 기억들, 서로 다른 시간과 서로 다른 공간이 제멋대로 뒤섞이는 이 미궁에서, 얄팍한 앎은 완전한 무지와 큰 차이가 없었다.

한 가지 더.

이때의 나는 미처 몰랐으나, 정신세계에 만들어지는 미궁의 무작위성은 사실 내 필사적인 바람에 영향을 받는 것이었다.

내가 품었던 바람은 오직 하나. 스승을 피해 살아남는 것.

하수구의 샛길은 빗물을 빼는 관형 터널로 이어졌다. 실제 이상으로 꺾이고 구부러지는, 그러나 내게는 왠지 낯설지 않았던 터널의 끝엔 또다시 경계의 장막이 반짝이고 있었다. 검은 뱀의 그림자가 창백한 전등불에 어른거리고 돌풍 같은 숨결이 내 머리카락을 흔들 때, 추적자의 속도가 미로의 복잡성을 상쇄하는 그 순간 나는 찰나의 한 걸음으로 터널을 탈출했다.

기억의 경계면을 넘은 즉시 중력의 방향이 뒤집혔다.

으아아아악!

역시나 현재의 나로선 통제할 수 없는 비명. 나는 발아래의 하늘로부터 머리 위의 개천으로 낙하했다. 뒤이어 경계를 넘어온 뱀이 허공에서 몸을 뒤트는 모습. 그 모습을 본 직후, 흐르는 물이 내 전신을 강타했다. 비정상적으로 거센 물살이 나를 하류로 쓸어간다. 입을 쩍 벌린 뱀 대가리가 굉음과 함께 수면을 뚫고 들어와 내가 있던 공간을 물어뜯었다.

헛된 입질에 분노한 스승은 새로운 환경에 맞게 자신을 변화시키려했다. 그러는 수밖에 없었다. 이 세계에선 물리현실에 작용하는 주문들 태반이 작용하지 않았으므로.

과거의 난 스승이 의태를 마치기 전에 허겁지겁 헤엄쳐 뭍으로 올랐다. 그러자 보이는 건 스승이 나를 거둔 보육원 단지의 전경이었다. 이때 핏빛으로 물든 하늘로부터 돌발적으로 쏟아지는 초현실적 폭우. 스승은 불어난 물살에 휘말려 낯선 경계를 향해 떠내려갔다. 깨진 거울조각들의 장막이 급류를 집어삼킨다. 형태가 뒤틀린 뱀이 흐릿한 기억 저편으로 멀어졌다.

전체 14동인 보육원의 건물들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배치되어 있었다. 각각을 이어보면 일곱 개의 선으로 이루어진 칠망성이 그려진다. 선과 선이 교차하는 점과 모서리의 꼭짓점마다 수용시설이 서있는 것이다. 과거의 나는 홀린 듯 그 선을 따라 달렸다. 건물의 숫자에 비해 부지의 면적은 좁은 편이었다.

첫 번째 건물엔 1명의 아이가 죽어 있었다.

두 번째 건물엔 8명의 아이가 죽어 있었다.

세 번째 건물엔 12명의 아이가 죽어 있었다.

네 번째 건물엔 9명의 아이가 죽어 있었다.

그리하여 네 개의 작은 숙소, 칠망성의 한 변에서 죽은 소년소녀의 합계는 30이었다.

또 네 번째 건물에서 방향을 꺾어 일곱 번째 건물에 이르기까지 널려있는 시체의 합계가 30이었고, 일곱 번째 건물에서 방향을 꺾어 열 번째 건물에 이르기까지 죽어있는 아이의 합계가 다시 30이었으며, 이후로도 하나의 선에서 발견되는 시체의 수는 모두 동일하게 30이었다.

이는 즉 각 변의 합계가 30이 되는 마방진이었다.

무지했던 이때의 나와 달리, 지금의 나는 그 숫자의 의미를 안다.

모든 변이 30인 칠망성은 의식을 행하는 술자가 일곱 개의 선을 걸어 별의 중심에 더해짐으로써 31로 완성된다. 31은 수비학에서 신의 이름인 엘(El)을 상징하는 수. 이는 또한 항해라는 뜻도 지녔다. 요컨대 신성을 향한 항해가 되는 것이다.

한편 칠망성의 7은 영원과 생명을, 마방진은 내적 균형과 폐쇄적인 완결성을 나타냈다.

그러므로 105명의 소년소녀들을 죽여 제물로 쓴 이 끔찍한 주술제례의 정체는, 영원한 생명을 갈구하는 자가 신성에 닿고자 나아가는 항해의 의식이었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무엇인가?

기독교적인 신성은 부활을 포함한다. 영혼으로 영혼을 삼키고 육체를 강탈하여 새로운 젊음을 누리는 것이다. 술자는 삶이 끝나갈 때마다 이 의식을 반복하여 영원으로 나아갈 수 있다. 늙은 제국주의자가 오랜 시간을 들여 설계한 영생. 이것이 그 첫 실천이었다.

칠망성의 중심에 도달한 나는 묶여있는 나와 그 앞에 선 스승의 환영을 발견했다. 악몽이 시작되기 직전의 상황이다.

쿠르르르-

지축이 흔들린다. 스승의 정신체가 기억의 경계를 거슬러 돌아온 것이다. 거친 땅울림은 더욱 더 거대해진 분노를 간접적으로 느끼도록 해주었다.

과거의 나는 더러운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본디 회를 칠한 벽이 있어야 할 자리에 새로운 기억의 경계가 물결치고 있었다. 기약 없는 도주를 재개해야 할 때였다. 경계로 몸을 던지자 시야가 온통 까맣게 물들었다.

…….

………….

지이이잉. 지이이잉.

“……망할.”

색이 다른 소음에 눈을 뜨니 호텔 객실의 천장이 보인다.

날 악몽에서 깨운 것은 머리맡에서 울리는 스마트폰의 진동 알람이었다. 잠만 들었다 하면 높은 확률로 악몽을 꾸는 탓에 매시 정각마다 알람을 맞춰두고 자는 습관이 생겼고, 이번에도 그 덕을 본 것.

이걸로 오늘 밤에만 벌써 세 번째 악몽이다. 나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긴 날숨을 토했다. 이젠 깊게 드는 잠이 어떤 느낌이었는지조차 가물거릴 지경이었다. 눈꺼풀 안쪽이 뜨거웠다.

잠시 눈을 감고 있으려니, 혼자 울다 지쳐 잠잠해졌던 알람이 다시 한 번 울기 시작했다. 불이 들어온 스마트폰 액정이 보여주는 시각은 새벽 4시 5분. 버튼을 밀어 알람을 끄고, 다른 알람들까지 비활성화하려고 보니 잠든 사이에 한 통의 문자가 도착해있었다.

「[Singapore Airlines] 귀하께서 예매하신 항공편(SQ602)의 출발예정시각이 항공사 사정에 따라 12/23 14:30(SGT)으로부터 12/23 15:23(SGT)으로 변경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이용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문의 사항이 있으시면 다음 번호로 연락 주십시오. (+65) 0800-124-8888. 통화 가능 시간은…….」

가끔 있는 일이다. 차라리 문자가 왔을 때 깼으면 좋았을 것을.

눈꺼풀 안쪽이 뜨겁지만 오늘은 더 자기 그른 것 같다.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두어 시간 눈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찬물로 샤워를 마친 나는 내선 전화로 카페라떼를 주문했다. 룸서비스 메뉴에 없는 것이라도 고급 객실에서 오는 주문이면 컨시어지가 어떻게든 받아낸다.

커피는 15분 만에 올라왔다. 직원에겐 팁으로 100달러를 쥐여 보냈다.

시나몬 스틱으로 잔을 저어놓고, 향이 밸 동안 가방에서 태블릿을 꺼냈다. 날이 밝을 때까지 책이나 읽을 요량이었다.

손 가는 대로 불러온 책은 세계 근대사를 다루는 교양서적이었다. 페이지는 거북이처럼 느리게 넘어갔다. 악몽의 여운으로 정신이 산만하기도 하거니와, 서구 중심적인 역사관의 얄팍한 깊이와 몰이해가 한심하게 느껴진 탓도 있다.

그러다 마침내 책을 라이브러리에서 지워버리기까지 한 시간을 넘게 낭비했다. 특별할 게 전혀 없는 양산형 교양서였다.

뉴스 채널을 켜봤으나 별다른 사건사고는 눈에 띄지 않았다. 책은 그만두고 학술지나 읽을까 싶은 와중에 핸드폰이 진동했다. 메신저 수신 알림이었다.

「혹시 일어나셨습니까?」

수연이 보낸 메시지. 시간을 보니 오전 6시 1분이다.

「그런데?」

「오래 주무시지 못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찾아뵙겠습니다.」

새벽부터 어떤 용건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다른 사람이 없는 자리에서 일러둘 말이 있던 참이다. 어쩌면 수연 또한 그걸 예상하여 선수를 치는 것일 수도 있겠고. 나는 답신을 보냈다.

「천천히 와라.」

10분쯤 지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 똑, 똑. 체인을 걸고 열어보니 벌써부터 정장 차림인 수연이 서있었다. 나는 녀석이 들어올 수 있도록 걸쇠를 풀었다. 실례하겠습니다, 라며 방에 들어선 수연은 바닥이 마른 커피 잔을 보더니 옅은 유감을 표했다.

“피곤하시겠습니다.”

“평소보다 조금 빨리 깼을 뿐이야. 앉아라.”

나는 녀석이 자리에 앉기를 기다려 질문했다.

“무슨 일이냐?”

손을 모으고 뜸을 들이던 수연이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말.

“형님. 제가 앞으로도 형님께 쓸모가 있겠습니까?”

“앞으로도?”

“결국 그 ‘런던’과 싸워야 한다면 말입니다.”

“…….”

나는 비스듬히 턱을 괴며 답했다.

“쓸모야 있겠지. 각성의 기회는 너에게도 열려있고, 뭣하면 내가 손수 회로를 열거나 교정해줄 수도 있으니.”

“그렇습니까?”

“어제도 말했지만 내 것처럼 정교하게는 안 돼. 그러나 원시능력자 기준으로는 보기 드문 수준이 될 거고, 그 정도면 충분하지. 제아무리 날고 기는 마법사라도 대가리에 총 맞으면 죽는 건 똑같거든. 좀 강한 화력이 필요하겠지만.”

원시마법은 생명의 기본 기능에 관련된 부분부터 개화할 가능성이 높다. 요컨대 방향성은 다양할지언정 대개는 신체능력부터 강화될 거라는 뜻. 이는 곧 휴대 가능한 화력의 증가로 이어진다. 철저하게 준비된 싸움에선 진정한 마법사에게도 위협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문제는 쓸모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야.”

“…….”

“수연아. 너는 나에게 빚이 없다.”

이렇게 말한 순간, 듣고 있던 수연의 눈빛에 동요가 일었다. 그 정체는 서운함, 불안감, 상실감 등이 뒤섞인 감정의 소용돌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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