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1화 (1/561)

#0.

마법이 돌아왔다.

가장 무가치한 지식을 지켜온 자들이 가장 영화로운 꿈을 꾸기 시작할 것이다.

#1. 삼각비행 (1)

싱가포르의 12월은 비가 많이 내리는 계절이었다. 소나기가 쓸고 간 열대의 도시엔 습한 공기가 가득했다. 숨 막히게 더운 거리에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진다. 이렇게 뜨거운 도시에서도, 커다란 산타 조형물은 두껍고 붉은 털옷을 입고 있었다. 그 앞에서 웃으며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보인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로 인해 앞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눈곱만큼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형님.”

부하 하나가 조용한 음색으로 부르는 소리.

“여기서도 그 「마소」라는 게 보이십니까?”

마소(魔素)란 내가 마법의 원천에 붙인 이름이다. 아주 오랜 세월 고갈된 상태였으나, 어찌된 일인지 사흘 전부터 온 하늘과 땅에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래. 구석구석 안 흐르는 곳이 없을 정도로 많다.”

답을 들은 부하는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평범한 눈에 평범하지 않은 것이 보일 리 없다. 나처럼 눈알을 뽑고 유물을 박지 않는 이상에야.

다른 부하가 호들갑을 떨었다.

“그럼 조금이라도 일찍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뭔가 대비를 하려면요. 서두르면 해가 지기 전에 인천 가는 표를 끊을 수 있을 겁니다.”

“아니. 그러면 행적이 의심스러워진다.”

“의심스럽다뇨?”

“외국까지 나와서 반나절도 체류하지 않는 여정이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지.”

“아!”

“이 거대한 변화를 알아차린 놈들은 백이면 백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을 거야……. ‘우선 이게 내가 있는 곳에서만 벌어지는 일인지, 아니면 전 세계적인 현상인지를 확인해야겠다.’라고. 나중에라도 놈들의 추적에 노출되지 않으려면 뻔한 행동은 피해야지.”

“오!”

“애초에 시간을 아끼려면 호주에서부터 서둘렀어야 한다. 브리즈번에서 보낸 사흘, 그리고 여기서 보내는 오늘 내일은 꽤 괜찮은 알리바이가 되어 줄 거다.”

이 정도의 여백을 넣은 일정은 돈이 많아서 시간도 많은 놈들의 일상적인 돈지랄에 묻힐 것이다.

“그러니 너희 둘은 평범하게 여행을 즐기면 된다. 이 현상……. 이 비정상적인 마소과잉이 이대로 계속된다고 쳐도, 당장 무슨 일이 터지는 건 아니니까. 가시적인 변화는 느리게 찾아올 거야.”

“크으! 형님께는 항상 계획이 있으시군요!”

“목소리는 줄이고.”

“옙!”

“줄여라.”

“옙…….”

두 부하 중 정신 사나운 쪽이 합죽이가 되었다.

말한 것처럼, 싱가포르는 이번 여행의 두 번째 기착지다. 인천, 브리즈번, 싱가포르를 꼭짓점 삼아 거대한 삼각형을 그리는 비행. 이 짧은 여행의 목표는 경도와 위도에 따른 마소의 밀도 변화를 확인하는 것이다.

마소의 분포가 국지적일 경우, 위치가 달라지면 밀도 역시 달라질 터. 또한 그 분포는 넓은 면의 형태일 수도, 좁은 띠의 형태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계획한 게 삼각비행이다. 삼각형은 면을 이루는 최소조건이니까.

확인 결과, 마소의 분포는 지나온 모든 장소에서 균일했다.

내가 그린 삼각형의 면적을 감안할 때, 이 바깥에서부터 마소의 밀도가 감소한다고 쳐도 이변의 영향권은 지구 전역일 가능성이 높았다. 삼각형을 더 크게 그리고픈 욕심은 향후의 역추적 위험성과 그로써 얻을 확신의 가치를 저울질한 끝에 자제했다.

남은 문제는 이 이변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될 것인가……인데.

이것만은 지구상의 누구도 답을 알 수 없을 것이다.

고민하면서 걷다보니 예약한 호텔이 가까웠다. 로비로 들어가는데, 합죽이가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눈치를 보는 게 느껴진다.

“경태야. 목소리를 줄이랬지, 입을 다물라곤 안 했다.”

“아하.”

“할 말 있으면 해라.”

허락을 하자마자 냉큼 입을 여는 녀석.

“여기가 인터컨티넨탈이잖습니까?”

“그런데?”

“제가 알아본 바로는 여기서 한 블록 옆에 이 세상 모든 술을 다 판다는 바(Bar)가 있답니다. 당연히 과장이겠지만, 그래도 주당들 사이에선 알아주는 곳이라는데 거기 한번 들르는 게 어떨까요?”

“해가 지기도 전에 술부터 찾는 거냐?”

“여행을 즐기라고 하셨으니까요. 자고로 여행의 절반은 먹고 마시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데서 꼭 술만 팔진 않을 겁니다. 거기 가셔서 간단하게 반주를 하시고, 해가 떨어진 다음엔 이곳 명물이라는 야시장을 돌아다니면서 딤섬도 먹고 락사도 먹고 온갖 꼬치구이를 곁들여서 잔에 이슬이 맺힐 만큼 차가운 맥주를 그냥-”

……긴 말을 주절주절 잘도 떠들어댄다. 잠깐 사이에 뭘 그렇게 많이 찾아봤는지.

그래도 ‘호텔에 틀어박혀 있기’보다는 나은 계획이다. 속이 복잡할 땐 일부러라도 찾아야 하는 게 여유 아닌가. 좋은 생각은 여유가 있을 때 떠오르는 법. 안내는 이놈에게 맡기고 애완견 산책시키듯이 돌아다니면 되겠지. 나는 녀석에게 보이도록 까딱 끄덕여주었다.

“알았으니까 일단 체크인부터 하자.”

“감사합니다, 형님!”

“목소리.”

“예.”

관광객이 많은 곳이다. 이목을 끌어서 좋을 게 없다.

방에 짐을 두고 나오니 오후 5시를 살짝 넘긴 시간이었다. 길 건너엔 현대적인 양식의 국립도서관 건물이 커다랗게 자리 잡고 있었다. 개인적인 취향으론 술보다 책을 선호하고, 영어든 화어(華語)든 읽는 데 지장이 없지만, 지금은 뭘 읽어도 눈에 들어올 것 같지가 않다.

“가시죠, 형님. 안내하겠습니다.”

신이 난 경태가 반보 뒤에서 방향을 안내한다. 반대편에선 나직한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도착한 바는 내장부터가 화려했다. 2층 높이의 천장과 탁 트인 공간만으로도 땅값 비싼 싱가포르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사치다. 커다란 내력 기둥의 선반을 가득 메운 술병들이 주광색 조명을 받아 다채롭게 반짝거렸다. 이 세상 모든 술을 다 판다는 말은 과장일지라도, 라인업이 수준급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인다.

실내엔 재즈 풍으로 편곡된 캐럴이 흐르는 중이었다. 볼륨은 대화가 묻힐 만큼 적당하다.

“천천히 고르시길.”

테이블을 안내한 여급이 미소와 함께 메뉴를 두고 갔다. 펼쳐서 대강 넘겨보니 일반적인 주류만 25페이지, 특별한 컬렉션은 108페이지나 된다. 말 많은 주당 녀석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나는 녀석 앞으로 컬렉션 북을 밀어주었다.

“네가 봐라.”

“이 중에서 시켜도 됩니까?!”

“내 것은 샴페인으로. 취하고 싶진 않다.”

좋아라 하던 경태가 제 옆자리를 돌아본다.

“수연 누님은요?”

“형님과 같은 거면 돼.”

“옙. 그럼 저도 개시는 샴페인으로. 같이 마실 거니까 병째 시키는 게 좋겠네요. 두 분은 씹을 거리를 봐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시선은 컬렉션 북에 꽂혀있다. 팔락팔락 페이지가 넘어가는 소리. 완전히 몰두한 품새를 보고 있노라면 저렇게 좋을까 싶다.

“우와!”

뭘 찾았는지 놀라는 녀석. 이번에도 내 눈치를 본다.

“뭐냐.”

“750밀리 한 병에 19만 700달러짜리가 있어서요.”

“샴페인이?”

“예. 미친 것 같은데요?”

싱가포르 달러로 19만이면 원화로는 대략 1억 6천이다. 고가 브랜드인 돔 페리뇽 외노떼끄(Oenotheque)를 도쿄 한복판에서 30만 엔에 마실 수 있건만. 나는 경태에게 손을 까딱였다.

“보자.”

“넵.”

펼쳐진 페이지엔 영어로 상품 설명이 쓰여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 10월 26일, 스웨덴 남부의 예블레(Gävle)항에서 한 척의 작은 밀수 스쿠너 옌셰핑(Jönköping)호가 출항했다. 이 배엔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주문한 3천 병의 샴페인이 적재되어 있었다…….」

이 뒤로 핀란드 해안에서 독일 잠수함 U-22에게 격침되었고 어쩌고 하는 구구절절한 사연들이 이어졌는데, 요약하면 바다 밑바닥에서 끌어올린 한 세기 전의 샴페인이라는 내용이었다. 샴페인이 상하지 않은 것은 해저의 압력과 온도 덕분이라고.

“1907년산이라 19만 7백 달러인가.”

“자그마치 100년을 묵은 샴페인입니다. 맛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꼴까닥 침 넘어가는 소리. 나는 경태를 바라보았다.

“먹고 싶냐?”

“당연합니다! 하지만 가격이-”

“주문해라.”

“오? 오오오오오오오오오?!”

경태가 두 주먹을 꾹 쥐고 소리 죽여 환호한다.

“이거 꿈은 아니죠?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형님! 하하하.”

흘러가는 꼴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수연이 점잖게 끼어들었다.

“형님. 그렇게 다 받아주시면 이놈 버릇 나빠집니다.”

“누님도 참. 제가 앱니까?”

“하는 짓은 그런데.”

“치사하게 팩트로 승부하시다니.”

“팩트로 뭐……?”

나는 손끝으로 탁자를 두드려 두 녀석의 주의를 환기했다. 바로 조용해지는 둘.

“100년 만에 빛을 본 샴페인이다. 오늘 같은 날 기념 삼아 마시기에 괜찮지 않나? 같이 한잔하지.”

처음 마소과잉을 느낀 날이야 어쨌든, 세계적인 현상임을 확인한 건 오늘이니까.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기념해둘 만은 하다. 오랜 세월을 두고 돌아왔다는 점에선 마법의 원천과 침몰선의 샴페인 사이에 공통분모가 있었다.

사치를 꺼리는 수연이 굼뜨게 납득한다.

“알겠습니다.”

그러나 경태는 커다란 덩치로 눈치를 보고 있다. 하기야 사업상의 필요 외의 이유로 이만한 사치를 부리는 게 흔한 일은 아니지. 그냥 내가 주문하는 게 낫겠다.

호출에 응한 여급은 주문을 듣고 당황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더니, 빠른 눈으로 날 탐색하고는 상냥한 미소를 머금었다.

“주문 확인했습니다. 다른 건 없으십니까?”

난 몇 가지 안주를 추가로 주문했다.

“음식이 준비되는 대로 함께 내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멀어지는 여급의 발걸음이 가볍다. 계산서에 ++로 붙을 서비스 차지를 생각하면 아마 날아가는 듯한 기분일 것이다. 세금을 더한 가격의 10%이니 술에 대한 팁으로만 경차 한 대 값이다. 다른 직원들과도 나눠야 하겠지만.

오래지 않아 술과 음식이 차려졌다. 미뇨네뜨 소스와 레몬을 곁들인 석화(石花)가 열두 개, 라 뻬랄(La Peral) 치즈와 샬럿 피클로 속을 채운 한 입 크기의 크로크 무슈들, 무설탕 크림이 들어간 마들렌이 한 접시, 안쵸비를 올려 구운 피살라디에르가 한 판이다. 조리가 필요 없거나, 준비만 되어있다면 비교적 빠르게 만들 수 있는 것들.

많아 보이지만, 이렇게 시키지 않으면 수연이 제 먹성을 감춰서 곤란하다. 이런 곳에선 주문을 맡겨도 일일이 내 의사를 확인할 만큼 삼가는 녀석이라.

샴페인은 라벨이 거의 벗겨졌고, 유리병과 코르크마개엔 꼼꼼한 손질로도 지우지 못한 바다와 세월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매니저가 직접 나와 펼쳐 보인 크리스티 경매 인증서가 진품임을 보증한다. 고객이 가져가 경매업체에 고유번호를 조회할 수 있도록 만든 인증서였다. 경태 놈이 기념품 삼아 가지도록 하면 되겠다.

“그럼 개봉하겠습니다.”

허락을 구한 매니저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병을 붙들고 코르크마개를 제거했다. 워낙 오래된 것이다 보니 세심하게 다루지 않으면 바스러질 위험이 있었다.

“잔을 채워드릴까요?”

이마가 조금 젖은 매니저의 질문에, 입맛을 다시던 경태가 투박한 영어로 손사래를 친다.

“아뇨아뇨. 괜찮습니다. 이만 가보셔도 됩니다.”

매니저는 필요하면 불러달라는 말을 남기고 정중히 뒤로 물러났다. 경태는 히죽히죽 웃으며 두 손으로 공손히 병을 들었다.

“자, 먼저 한 잔 올리겠습니다.”

난 잔을 기울여 녀석이 따라주는 술을 받았다. 좁은 잔 속 투명한 금빛의 소용돌이로부터 탄산 기포들이 올라왔다.

“너희도 받아라.”

병을 넘겨받은 내가 두 녀석의 잔을 순서대로 채워주었다.

서로의 잔을 쨍 부딪치고서 샴페인을 맛본다. 참나무와 과일의 향이 밴 첫 모금은 단맛이 적고 적당한 산미가 감도는 산뜻한 맛이었다. 숙성이 잘되어 부드럽긴 하지만, 순수하게 맛의 우열을 가리자면 시중에 도는 고급 라인업이 더 나은 수준이다.

비슷하게 느꼈는지 수연이 떫은 표정을 지었다.

“가격만큼 특별한 맛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감동을 음미하던 경태가 반박한다.

“에헤이. 누님. 이런 건 감성으로 마시는 거란 말입니다, 감성으로.”

“감성이 밥 먹여 주냐.”

“쩌어기 애플이란 회사는 그렇던데요.”

“…….”

뭐야, 이 만담은.

두툼한 석화 위로 레몬을 짜고 있으려니, 수연이 조금 마신 잔을 내려놓고 물어왔다.

“형님. 만약 이번 사태가 장기화된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글쎄다.”

레몬을 얼음 위에 놓고 잠시 생각에 잠긴다. 예상되는 변화가 너무도 거대하여 그 양상을 일일이 늘어놓기엔 끝이 없겠고, 짧게 줄이자니 표현을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으로선 이렇게 말하는 게 최선일 듯하다.

“이거 하나만은 확실하겠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거칠고 위험하고 예측 불가능한 곳으로 바뀌어 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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