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발자국 (68)화 (6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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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은하네 집에 내려다 주고 가.”

퇴근 시간도 아니라 분명히 외근 중에 나온 것일 테다. 강태윤은 요새 일할 마음이 사라진 사람처럼 굴었다.

“서우야.”

“응?”

저를 불러 놓고 물끄러미 보는 시선에 볼이 간지러웠다. 그가 아직 잡고 있는 손을 천천히 문질렀다.

손바닥 아래를 노골적으로 손톱으로 긁는다. 서우가 애써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처음에는 무슨 뜻인 줄 몰랐는데 하고 싶다는 행동 중 하나라는 걸 알게 된 뒤로 이런 일이 잦았다.

이제 갓 태어난 아이를 보러 가는데 부정 탈 것만 같은 음탕한 행위라는 인식이 서우의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손을 털어 내듯 빼냈다.

“보수적이긴.”

“너는 진짜 삼촌 자격 없어.”

“남의 애 말고, 내 애면 달라질지도 모르지.”

하필이면 차가 잠시 지하 차도로 진입해 주위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창문에 반사된 강태윤과 눈이 마주쳤다.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른다. 김진호도 있는데 그가 이런 소리를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게 어색했다.

같이 살자더니, 아이 이야기까지 아주 자연스럽게 기다린 사람처럼 강태윤이 입에 올린다.

“…밖에서 그런 소리 좀 하지 마.”

“밖이고 안이고 한결같은 게 좋지 않아?”

“아냐, 나는 싫어.”

밖이고 안이고 강태윤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말을 내뱉는 그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한 점 없는 얼굴이고 언제나 제 얼굴만 빨개지는 게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서우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는데 운전석에 앉아 있는 김진호도 비슷한 숨을 마침 쉬던 차였다. 둘이 짧게 백미러로 눈이 마주쳤다.

다시 한번 한숨이 나왔다.


 

***


 

은하의 집에 내리자마자 인사라도 하고 들어가라는 제 말에 바쁘다고 답한 태윤이 서우가 들어가는 걸 보고 그대로 차를 출발시켰다.

원래 옛날에도 은하와는 데면데면했다. 오히려 자신이 은하와 자매처럼 지냈다. 제 오빠라면 좀 어려워하고 무서워해서 더욱 둘이서 함께 붙어 다녔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빈손이었다. 태윤으로 인해 정신이 없어서 어딘가 들러 뭘 사 온다는 것도 깜박 잊었다.

메이드가 문을 열어 줘서 안으로 들어가자 은하가 품이 넉넉한 편한 옷을 입고 소파 위에 피곤한 얼굴로 앉아 있다.

“왔어?”

아직은 서로가 어색했다. 예전처럼 살가운 강은하를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스스로가 받아들이기 쉽지 않아 보여 가만히 기다렸다. 왔냐고 하고선 이내 제 옆자리를 노골적으로 슥슥 쓸어 서우가 앉을 자리가 어딘지 알려 준다.

속에서 따스한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응. 오다가 사진 봤어.”

“오늘 그거 한 장 건진 거야. 애가 보통이 아니야.”

맞은편 소파가 아니라 은하의 옆에 앉자 다른 말을 하면서 슬쩍 손을 잡아 온다.

둘째는 아들이었다. 한솔이 때와는 다르게 기운이 장난 아니라면서 은하가 혀를 내밀었다. 그러다 2층에서 내려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서우가 위를 바라보자 그제야 은하가 깜빡 잊고 있었다는 듯이 화들짝 놀란다.

내려온 건 미라였다.

“너무너무 귀엽다. 애기가 엄청 작아.”

아기를 보고 내려온 건지 활짝 웃던 그녀가 거실에 앉아 있는 서우를 발견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쩐지 미라를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살짝 떨렸다. 정식으로 태윤과 만난 사이는 아니라지만, 은하가 주선하려 했던 소개였다.

셋 다 허공에서 시선이 흔들리다가 이내 그게 웃겼는지 거의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안녕하세요!”

씩씩하게 미라가 먼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미라 씨.”

“저 오늘은 꽃 안 들고 왔어요. 어쩐지, 강은하가 이제 꽃 가지고 오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두 손을 활짝 펴서 꽃 같은 게 없다고 무해한 얼굴로 웃는 미라는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계단을 완전히 내려와서 맞은편 소파에 앉는다.

곧 있을 공연들, 발레 이야기, 전의 공연에서 서우가 받았던 감상 등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오갔다. 어느새 불편함이 저 뒤로 갈 만큼 셋이서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눴다.

“아, 은하 오빠랑 만나시죠? 비서님이라고 하기엔 그렇고 저도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네가 왜 언니라고 불러.”

“오~ 강은하. 질투해?”

언니라는 소리에 은하가 저도 모르게 툭 쏘아붙이자 미라가 깔깔 웃으면서 질투하냐고 손을 쭉 뻗어 은하의 팔을 찔렀다. 그 정도로 둘이 친한 사이 같아서 서우가 웃었다.

“그게… 그렇게 됐어요.”

“어우, 왜 저한테 미안한 얼굴이세요. 그냥 얼굴만 보고 인사만 했어요. 그 강태윤 씨? 태윤 오빠? 호칭도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를 사이면 아무 사이 아니죠?”

두 손을 완전히 저으면서 미라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걸 강조한다. 서우 역시 강태윤의 냉랭한 모습을 봐서 그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어쩐지 미라에게 민망한 감정이 있었다.

“그리고 호감을 갖기도 전에 그때 저 내려 주고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그냥 슝 가시던데요. 그거 보고 눈치 안 챌 여자가 어디 있어요.”

경비실 아래서 태윤을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강태윤이 돌아와서 엄청나게 놀라, 은하에게 뭐라 변명할지 머리가 터지려 했다.

그게 다 이제 웃으면서 이야기할 거리가 돼 있는 게 묘하게 재미있었다.

“은하한테는 밥 한번 사라고 하면 될 일이니까 그런 얼굴 하지 마세요.”

곁에 두는 것도 싫은 사람이 있는 반면, 미라 같은 사람도 있어서 은하에게 다행이었다.

“밥은 제가 살게요.”

“엇, 그 밥은 혹시 결혼식장 밥…?”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국수나 갈비탕 먹는 거냐는 농담에 서우가 완전히 풀어져서 함께 웃었다.

그러다가 웃지 않고 잠시 표정을 굳힌 은하를 보고 서둘러 말했다.

“아뇨. 그럴 예정 없어요.”

“결혼하시면 꼭 불러 주세요. 제가 가서 노래는 음치라 안 되고, 춤이라도….”

서우가 저도 모르게 은하의 눈치를 봤다.

하지만 이내 미라로 인해 계속해서 분위기가 업돼서 언제 그랬냐는 듯 은하 또한 한참 웃고 떠들었다. 목이 마를 정도라 몇 번이나 메이드가 차를 새로 내와야 했다.

“사모님.”

수유 시간인지 은하를 부르는 시터로 인해 자리가 파해졌다.

“가시는 데까지 모셔다드릴까요?”

갈 준비를 하고 가방을 들고 일어난 미라가 물었다.

“아니. 언니는 여기서 저녁 먹고 갈 거야.”

“나는?”

“넌 약속 있다며.”

“그렇지. 나중에 진짜 밥 사라, 강은하.”

미라가 그렇게 말하고 서우에게도 번호를 알려 달라고 친근하게 말했다.

얼떨결에 번호까지 교환하고 나자 그녀가 마중은 필요 없다고 손을 흔들며 집을 나섰다.

“너 피곤하면 나 그냥 가도 되는데.”

“애기 보러 왔잖아. 보고 가.”

한솔이의 동생 이름은 정솔이었다. 솔이라는 그 동그랗고 단단해 보이는 이름의 돌림자가 좋아서 서우가 입속으로 몇 번이나 솔이를 불렀다.

은하를 뒤따라서 2층으로 올라가자 아이 방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한솔이는 유치원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시각이다.

문을 열자 아이 특유의 체취에 자신도 모르게 풀어졌다. 포근하고 달달한 우유 냄새에 가까웠다. 시터가 아이를 안고 있다가 이내 은하에게 건넨다. 그리고 조용히 방을 나서자 수유 쿠션을 대고 그녀가 자리에 앉았다.

익숙하게 젖을 물린다.

“언니.”

“응?”

“아까… 결혼 이야기 나왔을 때 그래서 그런 거 아니야.”

“그래서 그런 거라니?”

그녀가 모르는 척했다. 은하가 이런 일에 일일이 제 눈치를 보며 신경 쓰지 않기를 바라서다.

“…언니가 싫어서 그런 거 아니라고.”

“싫은 사람을 어떻게 집 안에 들여. 그런 거 아닌 거 알아. 오해 안 해.”

웃으면서 대꾸한 뒤 서우가 작은 아이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만져 봤다.

땀이 났는지 머리끝이 조금 젖어 있었다. 그것마저 사랑스러웠다. 달수를 채우지 못해 인큐베이터에 들어갔다가 퇴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쑥쑥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달수를 채울 정도로 먹고 크고 있다고 은하가 말해줬다.

그러다가 이내 툭 던진다.

“이런 말 하면 내가 우스운 거 아는데. 언니가 아까워서 그래.”

“하하하.”

서우가 조용히 웃었다. 농담이 아니라는 얼굴로 은하가 눈을 흘긴다.

“알아, 나도 웃긴 거. 오빠 행복, 안정 어쩌고 하면서 언니한테 그랬던 거 나도 다 기억나.”

“아니야. 그것 때문에 웃은 게 아니라 내가 아까울 만큼 근사한 사람으로 봐 준 게 고마워서 웃었어.”

“거짓말.”

“진짜야.”

거듭 진짜라고 말하자 그제야 은하의 표정이 풀어졌다.

“우리가 행복과 안정을 빌 만한 사이가 아니란 걸 떠올렸어.”

그 정도로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다만 그때는 태윤에게 매달렸다.

제 유일한 가족이란 생각에 별로 친하지도 않은 오빠까지 애틋해졌다. 그러다 뒤늦게 서우로 인해 정신을 차리자 제 오빠가 결혼 상대로 썩 별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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