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7_
결국 선생님의 유언을 지키지 못했다.
강태윤과 자신이, 그의 부모님과 같은 전철에 올라탄다. 이 종착지의 끝이 어딘지 두려움이 왈칵 밀려왔다.
그럼에도 내리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처음으로 온전히 가져 본 강태윤을 털어 내고 싶지 않았다. 못 이기는 척, 주저앉아서 그 끝이 어디라도 함께 가 보고 싶었다. 그의 마음을 당연하게 신경 쓰지 않은 게 미안했다.
세상에 당연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그의 사랑의 정도를 간과해서 오히려 서우는 사과하고 싶었다.
“태윤아, 나는… 두렵고 무서워. 내가 홀로 있어야 했던 시간들이 나를 겁쟁이로 만들었어.”
그리고 뻔뻔하게 이들의 곁을 맴도는 그런 철면피로 만들기도 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보고 싶어서 질척였다.
“나보다 더할까. 처음부터 네가 두려웠는데. 마음을 숨기고 너를 잃어 봐서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아.”
가장 후회되는 순간.
어두운 강변에 서서 혹 한국에서 오는 연락이 제 아비처럼 윤서우의 비보悲報라면 태윤은 그 검은 물에 뛰어들 준비가 언제라도 됐다.
네가 버티지 못한 생이라면 그에게도 의미가 없었다. 최대한 빨리 따라가서 붙잡아야지.
서우를 위한 가장 예쁜 것들을 모으면서 태윤의 마음은 그렇게 곪아 있었다.
“있잖아…. 나는 네가 피아노 치는 거 보고 하프 시작했어.”
서우가 말했다. 하프를 처음 보고 제 마음을 온전히 빼앗겨도 그걸 연주하는 건 다른 이의 몫이라 여겼다. 그런데 강태윤의 피아노를 보고 선생님의 말이 스쳤다.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너무 오래 잊고 있던 말을 태윤에게 전하느라 가슴이 술렁인다.
“응.”
“선생님이 그랬거든. 하프의 가장 잘 어울리는 짝은 피아노라고.”
자신의 아래 있는 태윤의 얼굴이 잠시 멍해졌다. 눈꼬리에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는 눈물 자국을 서우가 천천히 어루만진다.
태윤이 느리게 제 귀에 박히는 그 말을 완전히 이해하는 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너, 지금.”
강태윤의 목소리가 떨리는 걸 보면서 서우가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네가 예쁘게 기다렸다는 말이 이거였어.”
그녀의 고백을 예쁘게 기다리고 있었다는 강태윤에게 이제야 전한다. 제 마음을. 몇 번이나 강태윤의 짝이 되고 싶었다고. 가장 잘 어울리는 짝.
태윤이 만개한 꽃처럼 웃었다.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과 겨울, 사계절의 모든 비를 전부 맞고 난 얼굴로 그렇게 눈가를 찡그리며 웃는다.
어설프게 그를 따라 웃었다. 자신이 웃어야 태윤이 계속 웃어 줄 것 같아서 그렇게 했다.
***
한 달여에 걸친 지형의 연주회가 끝났다.
한국에서 한 가장 긴 기간의 공연이었다. 그가 특별히 맞이한 초대석에 앉아서 마지막 음이 끝났을 때 박수를 쳤다. 너도나도 일어나서 피아니스트에게 최대의 찬사를 보낸다. 지형이 객석 곳곳을 보며 허리를 숙였다.
온갖 세상의 이야기가 그의 연주에 전부 씻겨 내려간다. 깨끗하게 무의 상태로 돌아간 그 안에 제 피아노를 통째로 부드럽게 밀어 넣는 감미로운 공연이었다.
오랜만에 귀가 호강했다며 꽉 찬 객석이 점점 빠지면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혼자 공연에 왔던 서우가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 탓에 챙겨 온 숄과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형이 인사를 하며 힐끗 눈이 마주친 것 같은데 확실하진 않았다.
한 달간 공연이 있을 때마다 매번 희주를 통해 귀해서 인터넷으론 더 이상 구하지 못하는 초대권을 직접 보내왔다. 그럼에도 올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공연은 참지 못했다. 벗은 트렌치코트를 한 손에 걸고 그녀가 가장 마지막 행렬을 따라 공연장을 빠져나왔다.
마지막 공연이라 그런지 공연장 바깥으로 나온 지형이 멀리서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이미 사람들이 선물한 수많은 꽃을 두 손으로 다 안지도 못할 만큼 들고 있다.
기자들 몇이 그에게 질문하는 게 보여서 저만치 떨어져 서우가 귀를 세웠다.
“누나!”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고 멀리 있는 서우를 매의 눈으로 발견한 지형이 한 손을 높게 들어 알은 척을 했다.
순식간에 지형을 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뒤에 있는 저를 향한다. 당황한 서우가 흠칫 놀랐을 때였다.
어깨가 부드럽게 감싸인다.
“지지야, 지지.”
이쪽으로 지형이 걸어올 것 같자 자신을 끌어당기며 말하는 목소리에 웃음이 터졌다.
한솔이를 봐 줄 때, 요즘 부쩍 정원의 지렁이와 풍뎅이, 거미 등에 관심을 갖는 아이에게 자신이 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꽃을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으리라.
“언제 왔어?”
“지금. 나가자. 달리는 폭탄 온다.”
꽃다발을 한 아름 들고 이쪽을 향해 사람들 사이로 걸어오는 지형을 보면서 태윤이 심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달리는 폭탄이라는 말이 저에게는 맞았다. 그래서 서우가 소리 없이 흐느끼듯 웃었다. 태윤이 잡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일부러 강태윤의 스케줄을 확인하고 마지막 공연에 온 건데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공연을 보러 다니다 보면 꼭 놓치기 싫은 게 첫 공연이나 마지막 공연이었다. 서우는 그중 마지막 공연을 좋아했다. 어쩐지 여운에 젖어서 눈을 반짝이며 객석을 보는 아티스트의 호흡이 느껴져서다.
그 떨리는 숨에서 전의 공연들을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 감정을 갈무리해 마지막을 장식하는, 끝나는 여운이 좋다.
“지형이 서운하겠다.”
“글쎄. 별로 그렇게 깊게 생각하는 애가 아니라 괜찮을걸.”
태윤은 어쩐지 지형을 싫어했다. 이렇게 종종 적대적인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서우가 그의 손을 꼭 잡고 가을의 길을 걸었다.
“내가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내가 널 몰라?”
되려 묻는 태윤에게 할 말이 없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김진호가 차를 주차해 놔서 그곳에 서우를 먼저 태운다. 차에 타자마자 연주회로 인해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휴대폰을 보다가 메시지가 들어온 게 있어서 저도 모르게 활짝 웃었다.
그리고 곧장 화면을 돌려 태윤에게 보여 준다.
“예쁘지?”
“갓 태어난 애야 거기서 거기지.”
“그게 조카한테 할 소리야?”
요즘은 거의 이런 걸로 그와 투닥였다. 태윤의 말처럼 아직 예쁘다 아니다 할 나이는 아니었으나 그냥 마냥 예뻤다. 아주 작고 빨간 아이가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볼 때면 어쩐지 가슴이 뛰었다.
이제 막 조리원에서 퇴소했다며 놀러 오라는 메시지는 덤이다.
답장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적고 있는 그녀의 휴대 전화를 태윤이 가져갔다. 전송을 누르지 못해 손을 버둥거렸으나 강태윤은 한번 마음 먹은 건 양보 없는 성격이라 결국 돌려받지 못했다.
“또 심술이야.”
“서우야, 나 봤으면 나랑 이야기해야지. 이런 거 보고 있을 게 아니라.”
회사는 결국 사표를 수리했다. 졸지에 백수가 된 서우는 처음으로 쉬고 있었다.
뭐든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쉬라고 등을 떠민 건 그였다. 강태윤도 다음 달부터 이쪽 일을 정리하고 그가 원하던 EA 계열의 건설 회사로 다시 출근한다.
“진짜 피곤하다, 강태윤.”
세 살 애도 이렇게 치대지는 않을 거라고 서우가 눈을 흘겼다. 어디를 가든 강태윤이 어떻게든 나타났다. 그게 귀찮다고 말했는데 사실 그 속내를 알았다.
그가 모르는 사이 자신이 어떤 소리에 상처라도 받을까 봐 졸졸 쫓아다니는 거다.
“그러니까 나 데리고 살아.”
옥탑의 짐은 전부 정리돼서 살 곳이 없었다. 희주는 곤란한 얼굴로 강태윤이 전부 실어 갔다고 했다. 제 짐을 찾으러 다시 가 보니 떡하니 그의 것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해서 강도라도 된 줄 알았다.
그녀가 버린 걸 주웠으니 제 것이라고 말한다.
짐을 거기 고스란히 둔 채 서우가 머무는 곳은 근처의 오피스텔이었다. 옥탑에 다시 들어가려 했는데 그걸 안 은하가 조리원에서 기겁을 하면서 제 명의의 그곳을 빌려줬다. 그날 이후로 태윤은 내내 이 상태였다.
“그래도 하루에 한 번은 꼭 보잖아.”
“그거 말고.”
이 관계가 서우는 이상하게 재미있었다. 태윤의 은근한 안달보다, 하루에 한 번 옷을 갈아입기 위해 어차피 그의 집에 가야 했다. 제 모든 짐과 옷은 거기에 있었으니까.
요즘 코디에도 제법 재미를 들였는지 드레스룸에 가면 그가 그날 입을 옷과 가방, 액세서리 등을 마네킹에 걸어 놨다.
그걸 입지 않을 수도 없었던 게 강태윤이 제 물건을 사면서 어울리던 걸 하나씩 연관해 고른 것이라 정말 꽤 괜찮은 코디였다.
오늘 연주회 복장도 그의 마네킹에서 벗겨 입었다. 서우가 한숨처럼 뱉는 태윤의 볼에 손등을 가져다 댔다.
당연하게 강태윤이 거기에 얼굴을 부빈다.
백미러를 확인하다가 우연히 그걸 보게 된 김진호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못 볼 걸 본 사람처럼 시선을 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