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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 때문에 선생님이 그렇게 됐다는 제 죄책감이 남매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없게 만들었다. 왜 그곳까지 오셨는지 알 수 없었다.
“엄마한테 화냈어. 언니 데리러 가자고. 내가 계속 화내서 엄마가 화를 내다가 트럭이… 트럭이….”
서우가 그대로 와락 은하의 얼굴을 감싸 끌어안았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아도 되게,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완벽하게 보호한다.
“나 때문이야. 너 때문이 아니야.”
아무리 애를 써도 자신은 타인이다. 그런데 은하는 아니었다. 강은하는 선생님 자식이다. 왜 그렇게 자신을 미워하고 화를 냈는지 깨달아 버렸다.
어떻게 견딘단 말인가. 함께 탄 차에서 엄마가 죽었는데 그걸 온전히 은하는 끌어안고 있었다.
서우가 눈도 깜박이지 못하고 그대로 태윤을 돌아봤다. 그가 천천히 닫지 못한 병실 문을 닫는다.
“나야. 나라고. 내가 엄마를 죽였어.”
“강은하. 잘 들어. 나 때문이야. 그렇게 믿었잖아. 계속 그렇게 믿어. 은하야, 너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
자신으로 인해 혈육이 죽었다는 걸 마음에 깊이 품고 더 화를 내고 소리 질렀던 강은하의 방어 기제를 이해할 수 있었다.
떠나지 말걸.
손가락이 다 부러졌으면 어떻담.
그냥 기어서라도 뻔뻔한 얼굴로 장례식장에 들어가 은하를 안아 줄걸.
“다 말하려고 했어. 언니, 진짜야. 언니가 오면 다 말하려고 했어. 그런데 너무 무서웠어.”
“흐읍….”
살아갈 수 없다.
이건, 살아갈 수 없다. 선생님이 사고 난 자리로 가서 죽으려 했던 은하가 머릿속에 스쳤다. 왜 그토록 모질게 주 회장이 무릎을 꿇고서라도 저를 떼어 놓으려 했는지 알 것 같다. 서우가 숨을 헐떡였다.
“무서워서 죽을 거 같았는데 언니가 안 왔어.”
애정이 증오로 돌변한다. 그렇게 강은하가 자신을 원망했던 이유를 찾았다.
감당이 안 됐던 거다. 수용치를 한계까지 넘어 버린 감정의 무게가 넘쳐서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로.
“만나서 내가 못되게 굴었을 때 한 번만 말해 주지. 나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어허어어엉….”
가만히 그때를 생각하면 어김없이 드는 생각이 있었다.
또다시 눈앞에서 사고가 일어나도 자신은 모든 걸 버릴 준비가 됐다.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은하를 구할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 좀 더 빨리 제 손을 포기할 수 있을 테다.
안 되는 걸 붙잡고 몇 번의 수술을 할 게 아니라, 조금 더 빨리 인정하고 음악이 없는 일상으로 돌아가리라 여겼다.
옥탑방 옥상에서 앉아 이 말을 했을 때 희주는 엉엉 울었다.
“엄마도 나를… 나를 원망할 텐데 언니는 어떻게 이래.”
“아니야, 은하야. 선생님은 너 원망 안 해. 끝까지 네 걱정만 하셨어. 너 괜찮은지 봐 달라고 나한테 그러셨어.”
자신을 붙잡고 은하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쉼 없이, 소리조차 내지 못해 꺽꺽대며 운다.
우리는 어떤 짐들을 진 채 버티고 있었을까. 서우가 필사적으로 은하를 끌어안았다. 네 잘못이 아니라고, 그저, 사고였다고 속삭인다.
“언니… 내가 언니를 어떻게 보지. 엄마를 내가 어떻게….”
“은하야, 너도 이제 엄마잖아. 이렇게 울면 어떻게 해.”
선생님이 그랬듯이 은하의 배 속에도 지켜야 할 아이가 있었다. 서우가 입술을 깨물면서 달랬다.
은하는 차라리 그녀가 욕을 하고 소리를 질렀으면 했다.
그런데 꼭 위로까지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따랐던 언니와 다름없어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응. 응, 그럴게.”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 은하야, 사고는 누구 탓도 아니었어.”
“그런데 언니를 탓한 건 내 탓이었어.”
“괜찮아. 우리가 아직 떨어져 살았던 시간보다 함께 살았던 시간이 더 길어. 그래서 네 마음 아직 잊지 않고 다 알고 있어.”
괜히 모질게 화를 내 놓고 더 제 마음이 불편했을 강은하를 서우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안타까웠다.
저렇게 혼자 마음 상할 걸 왜 이러나 싶어서 가만히 지켜봤다. 잘못을 받아들인다. 상냥한 데다 여전히 저보다 상대의 마음을 더 생각하는 윤서우가 너그럽게 용서한다.
“가지 마. 나 수술 끝날 때까지. 응?”
시댁 식구들도 오고 있고, 남편도 방금 공항에 도착했다고 연락이 왔다. 그럼에도 서우에게 가지 말라고 부탁한다.
제 남은 가족은 서우와 태윤뿐이기 때문이다. 첫 아이 한솔이의 출산일을 알리지 않았다. 그래서 친정에선 아무도 오지 못했다.
그게 그렇게 후회가 됐다.
누구보다 축하받고 위로받고 고생했다고 다독임을 받고 싶었다. 서우를 붙들면서 은하가 어린아이처럼 애원했다.
“그럼. 내가 어딜 가. 은하야, 여기에 있을게. 둘째 태어나는 거 사실 보고 싶었어.”
우리의 관계가 조금 더 괜찮았다면 아마 둘째가 태어나는 날 함께 있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덧없는 상상을 했었다. 그런데 상상이 곧 현실이 됐다. 은하가 제 손을 잡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의사와 간호사들이 와 수술 준비를 위해 은하를 데려갔다.
병실 밖을 나서는 순간까지 불안한 시선이 자신을 좇는 게 느껴졌다. 다녀오라고 애써 손을 흔들어 줬다.
“가끔, 너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이해되지 않을 때가 지금처럼 있었어.”
태윤이 끼어들 수 없었다. 서우가 온몸으로 은하를 끌어안고 세상의 어떤 것에도 맞설 준비가 됐다는 걸 본 순간 그가 물러났다.
천천히 문가에서 강태윤이 다가왔다. 침대 앞에 서 있는 서우를 향해 온 그가 까맣게 물든 눈으로 묻는다. 그녀를 생소하게 응시했다.
다정한 윤서우.
매번 그 다정함이 그리워졌다.
어느샌가 자신에게도 익숙하게 느껴지고 당연하게 여겨졌다.
윤서우가 저러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상냥함과 다정함이 영원히 제 것일 거라 자만하고 오만하게 굴었다. 그런데 윤서우가 사라지고 그 빈자리가 견딜 수 없어졌다.
그걸 느낀 건 저만이 아니다. 은하 역시 세상이 사라진 것처럼 굴었다.
은하는 그걸 어머니가 죽어 고아가 돼서 그렇다며 애써 믿는 것 같았지만 어머니는 그렇게 다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이 느꼈던 이건, 윤서우의 빈자리다. 그런데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지.
“미안해.”
마음이 후련해지지 않았다. 은하의 사과를 듣고도, 태윤의 저 끓는점의 온도와 비슷한 사과를 듣고도 여전히 가슴 한편이 무거웠다.
“왜 네가 미안해. 나를 아프게 한 건 네가 아닌데.”
그저 제 몫이었을 뿐이다. 누구를 원망한다고 그 순간으로 되돌아갈 수 없었다.
서우는 모든 걸 포기했다. 아픈 감정은 스스로를 갉아먹는다. 원망할 대상을 찾는다.
절대 그렇게 돼선 안 되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태윤이 손을 뻗었다. 서우의 얼굴을, 목덜미를, 그리고 어깨를 스친다.
그녀의 얼굴이 일순 당황으로 젖었다.
“태윤아!”
무릎을 꿇은 채 강태윤이 서우를 매달리듯 끌어안았다. 당황했다. 서우가 주변을 둘러봤으나 은하와 의료진이 떠난 병실은 비어 있었다. 그를 밀어냈는데 강태윤이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미안해, 서우야. 미안해.”
우리가 너를 놓지 못해서, 그것에 관한 사과였다. 빌어서라도 잡아 놓고 싶었다.
“아….”
“다시 돌아가고 싶어.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내 귀를 멀게 할 거야.”
절대 이것과 엮이지 말아야지. 윤서우의 인생이 박살 나리란 걸 알았으니 되도록 멀리 돌아갈 테다.
네 노랫소리를 들을 수 없게. 그럼 네가 누군지, 다정하고 상냥한 것조차 알 수 없이 지금 이 순간, 어머니의 바람대로 참아 내고 있었으리라.
혹은, 이미 포기해서 제 죽은 아버지와 같은 길을 갔든지.
“왜 그렇게 무서운 소리를 해.”
태윤의 마음이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쪽 눈을 감아 버렸는지 모른다. 사실 가장 무겁다는 걸 알고 있어서.
“여기에 있어, 제발.”
파리행 책을 사서 읽으면서, 계속해서 미뤄지는 일정에 어쩐지 안도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강태윤이 자신을 찾으러 올 거라고 믿고 있었을까. 자신도 모를 제 마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만나고 나서야 알았다.
서우의 손이 태윤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손가락 끝에 물기가 묻어 나온다.
“울고 싶은 건 난데. 왜 네가 울어.”
힘없는 목소리로 서우가 물었다. 어쩐지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자신의 몸에 정말 강태윤이 찍어 놓은 발자국이 어딘가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러지 않고야 이렇게 그가 우는 얼굴에 목이 멜 수 없다.
우는 것도 꼭 강태윤답게 울었다.
투명한 눈물이 순식간에 차올라 깜빡이지도 않았는데 두 볼을 타고 흘렀다. 꼭 우는 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그렇게 소리조차 없다.
“서우야.”
“내가 또 관계를 망칠까 봐 그래.”
“너는 망친 적 없어.”
어떻게든 희생해서 유지됐던 윤서우의 관계였다. 태윤의 갈라진 저음에 많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서우가 깊게 눈을 감았다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