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5_
서우의 옆에 모래에 반쯤 파묻혀 있는 책의 제목을 읽는 눈빛이 살갑다.
어쩐지 마음이 내려앉아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왜 이곳에 있느냐 다그치는 소리가 아니라 더 두렵다.
이상하게 영종도로 온 뒤로 제 집보다 훨씬 아늑하고 편안한 곳에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밤늦게까지 해변에서 노는 사람들을 따라 정처 없이 끝에서 끝까지 몇 번을 오갔다.
“아니. 안 가고 싶어.”
사실 아직도 왜 그곳에 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매번 도망만 치는 제 인생이 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한심했다.
잠시 그를 보고 놀라긴 했는데 서우가 그냥 앉아서 먼바다의 수평선만 바라봤다. 태윤은 슈트 차림으로 그대로 자리에 앉는다.
“그럼 가지 마.”
“어떻게 찾았어?”
서우가 태윤에게 묻는다. 그가 바람에 헝클어진 그녀의 머리를 가지런히 넘겨 주면서 부드러운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발자국을 남겼으니까. 그래서 찾을 수 있어.”
서우의 안에 그토록 깊숙하게 남겼다. 놓칠 리 없다.
“…이렇게 빨리 나 찾을 수 있으면서. 진작 찾아 주지.”
서우가 웃음 속에 진심을 담아 말했다. 너무너무 두렵고 아팠던 자신을 조금 더 일찍 찾아봐 주지. 괜히 태윤을 원망해 본다.
“서우야.”
“알아, 태윤아. 누군들 등 안 떠밀렸겠어. 그냥 알게 되더라. 내가 등 떠밀려 갔던 것처럼, 너도, 은하도 전부 그랬다는 거.”
시간이 지나니까 알게 되더라. 서우가 웃었다. 무릎을 세우고 거기에 얼굴을 기대 제 옆에 앉아 있는 강태윤을 바라봤다.
덤덤한 태윤의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처음부터, 자신이 집 안을 나섰을 때 그가 알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저 자신의 생각이 정리될 시간을 줬을 뿐이다.
“매번 네 생각을 했어.”
태윤이 말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강변에 서서 밤마다 한국에서 올 전화를 기다렸다. 윤서우를 찾았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런 소식들을 기다렸다.
그 넓은 집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어 태윤은 매번 강변에서 서우의 소식 한 자락을 간절하게 바랐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모호해지는 순간이 오더라.”
서우가 태윤의 말에 대답한다. 무거워지는 마음을 어떻게든 내려놓으려 노력했다.
그래도 우리의 관계가 잘못됐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항상 생각의 끝부분을 잘라 버렸다.
“그렇게 말하지 마.”
“주 회장님이 찾아와서 나한테 하프를 켜 달라고 했을 때, 거절 못 했어.”
너무 보고 싶었다. 어떻게 사는지, 시간이 지난 뒤의 두 사람이 궁금했다. 은하처럼 원망을 토한다면 듣고, 아무래도 상관없다. 제 인생은 이제 지루하고 굴곡이 없어졌으니 뭐가 됐든 괜찮았다.
눈으로 보고 나서야 포기가 될 것 같았다.
서우는 태윤이 돌아오기 전까지 내내 포기하는 중이었다. 손을 포기하는 데는 3년이 넘게 걸렸고, 음악을 포기하는 데는 그보다 좀 더 오래 걸렸다.
그리고, 강태윤.
너는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다. 자신이 없었다. 그와 언젠가 부딪치게 될 거란 걸 알았으면서 만나는 순간 머리가 하얗게 비어 버렸다.
“나는 이제 안 물러나.”
태윤이 강건하게 말했다. 그때 휴대 전화가 울렸다. 은하의 이름이 떠 있는 걸 서우에게 화면을 보여 준다.
“왜….”
“받아. 네가 받아야 할 전화야.”
“은하한테 말했어? 태윤아, 제발….”
“내가 말한 게 아니라, 강은하가 할 말이 있겠지. 너에게.”
그녀가 받을 때까지 가만히 기다린다. 받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다. 말없이 묵묵한 눈으로 강태윤이 종용했다. 이걸 받아야 한 발 앞으로 나갈 수 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 이미 너무 오래 길을 돌아왔다.
서로가 상처뿐인 길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서우가 그의 휴대 전화를 대신 받았다.
“여보세요.”
나 곧 수술실 들어가, 언니. 그 전에 보고 싶어.
아이는 이제 7개월이었다. 아니, 달이 지나 8개월이었던가. 나올 날이 아직 남았다. 서우가 제 일을 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고요하게 떨리는 그녀를 태윤이 붙잡는다. 잡아서 제 품에 앉히고 떨림이 가라앉을 때까지 안아 줬다.
“나 때문에 잘못됐나 봐.”
“그게 왜 네 잘못이야.”
“이러려던 건 아니었어. 네가 자꾸 파고드니까 내가 떠나고 싶었던 거잖아. 그냥 두지. 태윤아, 흔들지 말고 두지. 그냥… 그냥 좀 놔두지.”
서우의 손이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그런 관계가 정상이라고 생각해? 일방적으로 미움만 받는 관계가 세상에 어디 있어.”
너는, 그런 취급을 받아선 안 되는데.
“그래도 돼. 나만 아니었으면 되는데. 내가 왜 널 만났을까. 내가 왜….”
태윤이 더 꽉 서우를 안았다. 마음대로 원망하라고 저를 때리라 그렇게 몸으로 말한다.
처음부터 그녀의 말대로 빨리 찾아서, 무슨 짓을 해서라도 윤서우를 잡아서 이렇게 해야 했다.
꼭 화도 윤서우처럼 낸다.
세게 때리지도 못하고 밀쳐 내지도 못하고 속 시원하게 울지도 못 한다.
이도 저도 아닌 불쌍하고 가여운, 그가 사랑하는 윤서우.
“가자. 내가 옆에 있을게. 너 아프게 안 할게, 서우야.”
네가 견뎌야 했던 날들을 생각하면 끔찍하다.
모두가 말했듯이 독종이었다. 끝 간 데 없이 망가져도 망가진 줄 모르는 독하디독한 여자였다.
태윤은 처음으로 두려워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놔주는 것만큼은 못하는 그의 이런 면이 어머니를 닮은 건 아닌지.
그럼 아버지를 닮은 윤서우는 또 그렇게 버티고 버티다 잘못되는 건 아닌지.
덜컥 두려워서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바르작거린다. 은하에게 가 봐야 한다고 좌절한다.
이깟 연락 한 통으로 이렇게 달려가려 하면서 어떻게 떠나려고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
병실 앞에서 걸음이 멈칫했지만,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서우가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의사와 이야기 중이었던 은하가 그녀를 돌아본다. 수척해진 모습에서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어서 서우가 머뭇거렸다.
“걱정 마세요. 아이가 좀 더 안전하게 태어나기 위해서 하는 거니까. 지금 하는 게 나아요.”
의사가 은하에게 무어라 용기를 북돋는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은하의 시선이 문 앞에 있는 자신에게 닿아 있었다.
서우가 바짝 긴장했다. 또 원망이 쏟아질까 봐서다. 몸도 안 좋은데 은하가 그렇게 화를 내면 더 안 좋아지지 않을까 싶어 가까이 가지도 못했다.
서우를 뒤따라 들어온 태윤의 커다란 손바닥이 서우의 등을 짚었다.
앞으로 가 보라는 듯 민다.
“그럼, 수술 준비하겠습니다.”
“30분만요.”
갈라진 목소리의 은하가 의사에게 요구했다. 고개를 끄덕인 의사가 열어 놓은 문을 통해 나간다.
아무래도 아이는 달수를 채우지 못하고 빨리 제왕절개로 꺼내야 하는 단계까지 왔다.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어서 놀랍지 않았다.
그런데 수술대 위에 올라가기 전에 서우가 보고 싶었다.
은하는 그동안 받은 충격과 스트레스로 인해 수술을 받기 전 수치가 좋지 않았다.
그 순간 보고 싶었던 건, 죽은 엄마가 아니다. 어디에 있길래 제 연락을 받지 않는지, 서우가 많이 보고 싶었다. 염치없게도 그랬다.
첫 아이인 한솔을 낳을 때도 서우가 보고 싶어서 입술을 꽉 깨물고 참았다.
입술이 많이 찢어지도록 물어 제 남편은 그것도 모르고 얼마나 고통스러웠냐고 안아 줬다.
“…은하야.”
안절부절못하는 서우의 모습을 은하가 그제야 찬찬히 뜯어봤다.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고 마음을 삼켜 낸다. 그렇지 않으면 한마디도 못 한 채 오열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언니는.”
저렇게 자신이 말을 꺼내기 전에 겁을 먹는구나. 은하가 링거가 꽂혀 있는 손을 뻗었다.
“왜… 나한테 그래?”
부른다고 또 한달음에 와 준다. 이런 사람이었다. 마른 손이 링거를 맞아 퉁퉁 부은 자신의 손에 딱 잡혔다. 은하가 손바닥을 뒤집었다.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언니가 왜….”
눈을 가렸다. 윤서우가 불쌍하게 보이는 건 전부 보지 말아야지 했다. 거지같이 사는 꼴이 보이면 안타까울 것 같아서 얼굴만 일부러 똑바로 바라봤다.
자업자득이라고 남들과 함께 비웃으면서도 못내 변명 한마디 없는 언니에게 화가 났다.
“수술도 다 끝났고 괜찮아. 아무렇지 않아. 나 회사 생활도 하고, 다 해. 너도 봤잖아.”
“…음악을 못 하잖아.”
은하가 울음을 터트리자 서우가 안절부절못했다. 옆에 있는 티슈를 뽑아 얼굴에 부드럽게 대준다.
“곧 수술 들어간다면서. 은하야, 힘들어. 울지 마. 왜 이렇게 울까. 우리 은하가 왜 이렇게 울지.”
“언니 잘못 아니야. 나야. 언니, 내가 그랬어. 내가….”
서우의 손에서 티슈가 툭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