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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서 말이 샜는지 모르겠다. 희주를 슬쩍 의심했는데 태윤의 서늘한 눈을 보고서 슬쩍 아래를 바라봤다.
자신은 어릴 때부터 이 미친놈이 눈 한번 돌면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 아니야….”
“비행기 표는 아직이야?”
“누나가 먼저 나가겠다고 해서 지금…. 합.”
다 말해 놓고 입을 다물어 봤자였다. 태윤이 짧게 웃었다. 버릇처럼 머리를 쓸어 올리는 손길이 무시무시했다.
희주가 지형에게 혀를 내두르며 서우에겐 절대 비밀인데 제 손가락을 스스로 부러트리는 미친놈이니 최대한 조심하자고 했던 게 떠올랐다. 그 부러진 손가락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재미있네. 윤서우가 어디서 이런 머저리들을 친구라고 사귀었을까.”
재빨리 주먹을 꽉 쥐고 허벅지에 내려놓았다. 제 손가락도 함부로 다루는 놈인데 남의 손가락은 그냥 지나가는 게 다리 정도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게….”
“바람 넣지 마. 그냥 가만히 둬. 데려가도 내가 데려가니까.”
“전부 누나 무시하잖아. 은하까지 누나를 무시하는데 누나가 왜 여기서 살아야 해.”
지형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너무 다른 분위기에 당황했다.
자신을 환대하던 사람들이 윤서우에 대해 비아냥거린다. 당혹스러웠다. 윤서우의 손이 망가졌든, 뭘 하든 여전히 저에겐 첫사랑에 소중한 상대였는데 모두가 손가락질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형이 충격받은 건, 그걸 서우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다는 사실이었다.
“뭐든지 저들보다 잘나고 똑똑해서. 얼마나 눈엣가시였겠어. 아무것도 없으면서 강은하 지키겠다고 짖는 게.”
사람들은 흔히 그런 걸 대가라고 불렀다. EA에서 윤서우가 받은 게 있으니 강은하의 종처럼 사는 거 아니냐고. 차라리 받은 거라도 있었으면 더 많은 걸 주고 묶어 둘 수 있었을 텐데.
그래서 태윤은 위로 올라가고 싶었다.
제 옆에 앉혀 놔야지. 누구도 윤서우를 앞에 두고 감히 그런 말을 함부로 할 수 없도록 만들어야 했다.
음악에도 별 관심이 없었고, 사촌인 지형은 오히려 음악에 관심 있었다. 지형이 저와 동등한 입장이었어도 사실 상관없다. 눌러 버리면 되니까.
삼촌이 더 뛰어나 외할아버지의 선택을 받았듯, 자신이 선택받을 자신이 있었다.
태윤은 제 틀에 윤서우를 박아 놓을 계획이다.
그게 싫으면, 그냥 서로만 볼 수 있는 곳으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서우에게 했던 모든 말은 그의 진심이었다.
“누나는 많이 포기한 거 같아. 그냥 쉬고 싶대. 염치없지만 그러고 싶대.”
누군가 옆에 없으면 위태로워 보여서 지형이 손들었다. 첫사랑을 떠나서 서우에게 항상 고마웠다.
어렸던 지형도 집안 분위기를 알고 있었다. 그들 식구는 전부 윤서우를 좋아했다. 내색하지 않아도, 까다로운 제 어머니조차 윤서우라면 못마땅해하면서도 어느 정도 인정한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해.”
“할아버지는… 은하는? 은하가 누나 많이 싫어하는데. 형 동생이잖아. 그게 싫은 거야, 누나는. 둘이 싸울 테니까.”
“네 걱정이나 해. 숙모님 즐거울 일은 안 만들어야지.”
태윤의 서늘한 눈이 주먹을 꽉 쥐고 손가락을 보호하고 있는 지형의 허벅지를 내려다본다. 오만하고 자비 없는 눈빛이었다. 어쩐지 오금이 저려서 이제는 손을 등 뒤로 숨겼다.
한 살 차이라는데 그와 차이가 많이 났다.
이렇게 멍청하고 해맑으니까 윤서우가 은하와 함께 지형을 가끔 끼고도는 걸 발견할 때마다 속이 뒤집혔다.
정말 다 치워 버려야겠다.
“응….”
사실 유럽까지 강태윤이 찾아올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이국적인 곳에서 둘이 다시 만난다면 뭔가 다르지 않을까 싶었다.
서우를, 제 첫사랑을 옥죄는 이곳이 아니라 아무도 둘을 모르는 곳에서 거리낄 것 없이 만나면 서로가 솔직해질 수 있지 않을지.
지형은 거기까지 생각했다.
마음에는 들지 않았다.
그래도 강태윤이 천하의 주지형을 자장가 셔틀시킬 정도로 잠든 서우를 아끼는 게 보였다.
“고모는 왜 그렇게 돼선.”
차라리 살아서 반대하는 게 덜 무섭겠다. 죽은 사람이 가장 무서웠다. 저도 모르게 한숨과 함께 지형이 투덜거렸다.
“그러게.”
태윤이 처음으로 지친 목소리로 지형의 말에 동의했다. 서로가 곪아 가는 마음을 그대로 뒀다.
결국 셋 다 도망가는 인생을 살 뿐, 한 번도 인생을 즐겨 보지 못했다. 도망가고, 도피하고, 숨었다.
끝까지, 죽어서까지 놓아주지 않는다.
탁한 숨을 내쉬면서 태윤이 손바닥으로 미간을 눌렀다.
그런 어머니의 성정을 가장 닮아서 그 역시 죽어서까지 윤서우를 놓지 못하리란 걸 아는 짜증스러운 탄식이었다.
“누나 영종도에 있어. 거기 희주 누나네가 곧 오픈하는 콘도가 있는데….”
“알아.”
한번 데였는데 모를까.
태윤의 커다란 손이 지형의 어깨를 두드렸다. 흠칫해서 맞을까 봐 피아노 의자 저 끝으로 물러난다.
“지형아,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넌 피아노나 쳐. 첫사랑 같은 건 안 이루어지니까.”
“그러는 형은! 형도….”
“내가 되는데 네가 되면 안 되지.”
서로의 처음은 한 명이었다. 그제야 그 뜻을 알아차린 지형의 얼굴이 재수 없다며 와락 구겨진다.
희주에게도 똑똑히 전하라고 했다. 서우의 모든 일은 그녀에게 고마운데 한 번만 더 이런 식으로 나서면, EA에서 가지고 있는 예술 재단에 전폭적인 지지를 하겠다고 협박한다.
돈으로 아티스트를 빼앗아 가는 데 버틸 재간이 없기 마련이다.
희주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알고 있어서 태윤의 협박은 손쉬웠다.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해 놓고선 고개만 끄덕이는 지형을 두고 태윤이 호텔을 나왔다.
여전히 얼굴이 굳은 채 풀어지지 않았다.
***
음…. 서우야, 어떻게 하지? 파리 저택이 갑자기 공사 들어간다고 해서 한 주쯤 미뤄질 것 같은데.
“그래? 어쩔 수 없지.”
하루에 한 번 희주와 객실 내에 있는 전화로 통화하는데 목소리가 정말 저에게 미안해서 곤란해하는 소리였다.
바로 떠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것마저 시간이 걸린다. 괜찮다고 말했는데 어쩐지 불안해졌다.
이틀 전에도 미뤄지고, 보러 온다던 희주는 일이 많아서 힘들다고 했다.
미안해. 나 지금 회의 들어가 봐야 해서. 불편한 거 있으면 거기 지배인한테 이야기하고. 알았지?
“내가 애도 아니고. 걱정하지 마.”
영종도에 있는 리조트는 가오픈 중이었다. 손님이 저와 유명 파워 블로거나 숙박 후 홍보를 책임져 줄 사람들로 북적였다. 오픈 전에 유명 축구 선수들까지 합숙을 왔는지 로비로 나가면 심심찮게 사람들이 보였다.
대부분의 짐 정리를 희주가 도와주기로 했다.
유럽행을 택한 서우는 미련 없이 제 남은 모든 짐을 정리하거나 기부하기로 가닥을 잡았다.
과연 가져갈 게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다. 이곳에 있는 건 어떤 것도 갖고 가고 싶지 않아서다. 그동안 모은 공연 기록이 담긴 팸플릿 하나라도 들고 간다면 분명히 망설이게 될 걸 알고 있다.
지형의 공연은 꽤 남아 있어 서우가 먼저 파리로 들어가기로 했다.
하루 종일 서점에 앉아서 파리에 관련된 책을 봤다.
그저 막연한 곳이라고 여겼는데 자신이 가려는 도시라고 생각하자 어쩐지 유심히 보게 됐다.
새까맣게 죽어 있는 휴대폰은 끝까지 버리지 못하다 결국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희주와 전화를 끊고 나서 밖으로 나와 무작정 걸었다.
서울과 가까운 곳에 이런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이 있었다니.
왜 리조트를 여기에 지었는지 알 정도로 바다 표면에 햇빛이 반사되는 광경은 예뻤다.
“벌써 한국이 아닌 것 같네.”
저쪽에서 선수들이 비치 발리볼을 하고 있었다. 한참 모래사장 위를 뛰다가 이내 공에 바람을 넣고 인원을 나눠 웃통을 벗은 채로 소리를 지르고 있다.
손에 책을 든 채 나왔다가 햇빛이 종이에 반사돼 선글라스도 없어서 서우가 결국 한 장도 보지 못하고 덮었다.
그때 공이 그녀의 옆 모래로 파고들었다.
팍, 하고 제 발치에 모래가 튄다.
“저기요! 공 좀 던져 주세요!”
서우가 공을 집어 들려고 했다. 그런데 뒤에서 긴 손이 튀어나와 공을 가볍게 집어 들고 멀리 던졌다.
“감사합니다!”
한 손을 번쩍 들어 보인 남자가 밝게 인사했다.
“파리 가고 싶어?”
냄새로 알았는지 모르겠다. 공을 든 순간 불어오는 바람에 서우의 본능이 먼저 알아차렸다. 해변에는 어울리지 않는 차림이었다. 짙은 색의 슈트 차림이 이질적으로 보인다.
우리가 사흘, 사흘 만이었던가.
“서우야, 내가 묻잖아.”
태윤이 다정하게 물었다. 파리에 가고 싶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