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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웃음이 나와?”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열을 내? 그리고 내가 천하의 주지형과 그렇게 호흡을 맞췄는데 그 정도밖에 못 했으면 욕먹어도 싸지, 뭐.”
“꼭 그러더라. 누나는 빌어먹을 강태윤이랑 강은하한테만 예민하게 날 세우고 다른 사람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해.”
꼭 제 보호 아래 품어야 할 건 그 둘인 것처럼 군다. 지형의 날카로운 말에 서우가 괜히 시선을 피했다.
“야, 그만 싸워. 이게 어디서 누나들 앞에서 목소리를 우렁차게 높여?”
희주가 소중한 제 계약서상 ‘갑’인 피아니스트에 천재 뮤지션만 아니었어도 벌써 발로 한 대는 깠다.
어릴 때는 누나 누나 하면서 따라다니던 애가 바락바락 대들자 희주의 눈빛이 날카로워진다.
“난 싸운 거 아니야.”
쟤가 먼저 큰소리 낸 거지. 서우가 지형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말에 타격이라곤 전혀 받지 않는 얼굴이 무심하게도 보인다.
“그냥 옛날 성질대로만 해. 걔들을 왜 그냥 보고 있냐고.”
“나는 이제 별로 상관없으니까.”
함께 어울리던 사이도 아니고 완전히 동떨어진 사이였다.
한발 물러나 보니, 자신에 대해 떠드는 것도 그저 우스워졌다. 당장 다음 달에 나갈 돈이 걱정인데 그런 말들이 귀에 들어올 리 없다.
“휴…. 너 떠난다면서. 지형이랑 가.”
“응?”
“그래. 나 출국할 때 같이 가, 누나. 프랑스에 있는 내 저택에 먼저 가 있어도 되고.”
별안간 나온 말에 서우가 눈을 깜박였다. 무슨 소리냐는 듯 희주를 바라본다.
“지금 한국에 강태윤 있는 이상 어디로 도망가 봐야 똑같아. 차라리 지형이랑 가.”
한국을 떠나서 산다는 선택지는 서우에게 없었다.
“갑작스러워서 잘 모르겠어.”
“외국 나가서 살아, 서우야.”
“누나, 내가 도와줄게.”
연주 여행을 다니면서 좋은 곳도 가고 그렇게 여유롭게 살자고 지형이 이야기한다. 분명히 그렇게 살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자신이 음악을 계속했다면 그랬으리라. 완전히 낯선 곳으로, 이보다 더 낯설고 생경한 곳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
막막한 기분이 들어 서우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해. 그게 가장 나아.”
“내 처지에선 그게 최선일까.”
“그래.”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저 외면하면 쉬운데 자신을 돕겠다고 선뜻 서로 손을 내밀어 준다. 서우가 망설였다. 강태윤이 마음에 걸렸다. 그의 등에 얼굴을 묻고 올라가던 남산 길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자신이 입지도 못할 옷을 사면서 강태윤의 마음이 어땠을지 알 수 없다.
그가 서울에 돌아와 본 풍경을 저에게도 보여 주고 싶다고 했다. 그는 서울의 야경을 바다라고 표현했다.
“서우야! 왜 울어? 나가기 싫어? 다른 데 알아볼까?”
강태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눈물이 흘렀다. 슬픈 것도 아니었고, 그저 생리적인 현상처럼 그렇게 나왔다. 서우가 손을 들어 축축한 볼을 훔쳤다.
“아니야. 나 갈게. 거기 갈래.”
그가 만들어 놓은 집에는 피아노와 하프가 나란히 있다. 주인공은 하프라는 듯 거실의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떡하니 그랜드 하프의 위용을 내세운다. 그 옆에 낡고 오래된 피아노 하나가 고즈넉하게 서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 욕심이 나게 한다.
“그래. 잘 생각했어. 가는 게 나아.”
한국에 있으면 자꾸 은하 보고 싶어 하고, 강태윤 떠올릴 거 아니냐며 희주가 말을 붙였다.
아주 멀리 가 버리면 쉽게 올 마음이 들지 않을 테니까. 강태윤이 쉽게 한국에 올 수 없었던 것처럼.
“응.”
차라리 그게 낫겠다.
서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지형의 피아노 앞으로 걸어갔다. 악보가 여기저기 어지럽게 널려 있다. 가만히 그녀의 손가락이 건반에 닿았다.
“어휴, 강태윤 진짜. 나 밤새 손가락 부러질 뻔했어, 누나.”
그냥 잠든 자신이 뭐라고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에게 자장가나 치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그의 머릿속은 서우가 짐작할 수 없는 걸로 가득 차 있었다. 지형이 괜히 죽는소리를 하면서 서 있는 서우의 옆에 의자를 빼 앉았다.
“듣고 싶은 거 있어? 누나는 내가 특별히 쳐 줄게.”
“너 연습곡 아무거나.”
“아무거나가 어딨어.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라니까.”
“그럼 드뷔시….”
“아냐. 그냥 아무거나 쳐 줄게.”
태윤과 취향이 너무 똑같은 거 아니냐며 지형이 눈을 흘겼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그의 손이 건반을 누른다.
익숙한 음악이 귓가에 흘러, 흘러, 들어온다. 빈말로라도 웃을 수 없었다. 분명 지형이 치고 있지만, 태윤이 쳤던 음이 또렷하게 서우의 귀에 남아 있다.
“누나가 항상 그런 눈으로 태윤형을 보니까 내가 피아노 시작했잖아.”
서우가 피아노를 좋아한다고 착각했다. 하프는 도저히 안 되겠고, 사실 고모가 무서웠던 것도 있다. 태윤과 똑같이 피아노를 하면서 서우의 환심을 하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던 지형이었다.
“강태윤은 이상해.”
“형은 항상 이상했어.”
피아노의 음을 정확하게 치면서 지형이 웃는다.
“그래도 누나가 이해해야 해.”
희주가 바에서 술을 찾으러 저만치 가는 걸 보면서 그가 속삭였다.
피아노 소리에 둘의 대화가 타인에게 손쉽게 묻힌다. 달빛에서 다른 음악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면서 지형이 말을 이었다.
“고모는 조금 유별난 사람이었거든. 고모부가 그렇게 돌아가시고 형이 처음 발견했는데….”
“아….”
“형이 많이 아팠어, 누나. 너무 많이 아파서 아무도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래서 아직도 집안 식구들이 강태윤을 보면 그때가 떠올라 조심하는 것도 있다고 말한다.
서우의 흔들리는 눈을 보고야 자신이 그녀가 모르는 이야기를 했다는 걸 깨달은 지형이 혀를 내밀었다.
“나는… 몰랐어.”
“미안. 내가 괜한 소릴 했나 봐.”
강태윤은 어떤 표현도 하지 않았다. 그의 속내를 자신에게 뒤집어 보여 준 적이 없다. 그래서 그가 어려웠다.
서 있는 발치 아래로 애써 그쳤던 눈물이 다시 쏟아진다. 당연히 은하를 감싸 줘야 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묵인하고 외면했던 건, 태윤의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걸 깨닫자 어쩐지 움직일 수 없었다.
***
하혈을 한 뒤 일단 경과를 보기 위해 병실에 누워 있던 은하가 눈을 떴다.
마침 미국에 출장 가 있는 남편은 연락이 되지 않는다. 잠시 잠들었다가 내내 울고, 다시 깨는 걸 반복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도 당연히 혼자 있을 거라 생각했다.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줄줄 흐르는 와중에 언제 왔는지 어둠 속에서 가만히 저를 보고 있는 태윤을 마주하자 심장이 덜컥, 아래로 떨어져 내린다.
“오빠….”
태윤의 서늘한 손이 뜨거운 은하의 머리 위를 덮었다.
“엄마한테 언니 데리러 가자고 한 거 나야. 언니가… 오라고 한 게 아니라.”
“내가 아니라 그건 윤서우한테 직접 말해야지.”
서로의 방식이 달랐다. 은하는 서우의 부재에 미친 듯이 분노했고, 강태윤은 침묵했다. 그녀의 부재에 이유가 있을 거라 여겼다.
오지 않은 게 아니라, 올 수 없었던 거다.
그 망가진 손을 부여잡고 왔다면 은하는 완전히 죄책감으로 무너져서 돌이킬 수 없었을 테니까. 그 먹먹한 진실을 태윤이 버텨 냈다.
“…무서웠어. 언니가 오면 말하려고 했는데 언니가 안 오니까….”
그럼 서우에게 향한 화살이 전부 저를 향하고 시위를 당길까 봐 입을 다물었다. 윤서우가 욕먹어도 싸다는 그들의 생각에 동조했다.
“그 말이 정당화될 순 없지.”
은하의 입술이 꾹 깨물린다.
왕따를 당하고 난 뒤 사람들의 시선을 미친 듯이 신경 썼다. 시선만 스쳐도 모두가 제 욕을 하고 있을 거라 넘겨짚었다.
“손은…? 언니 손은….”
그러다 제 오빠도 손가락이 부러져 깁스를 한 게 떠올랐다.
더듬거리며 얼굴을 가리고 있는 손을 은하가 잡았다. 무슨 짓을 했는지 알 것 같다. 견딜 수 없었나 보다.
“돌이킬 수 없어. 은하야, 너무 멀리 왔는데 윤서우는 어떻게든 우리 관계를 돌이켜 보고 싶었나 봐.”
그래서 아픈 손을 부여잡고 주위를 맴돌았다. 그 말을 하는 태윤의 목소리는 고저 없이 낮고 음울했다. 윤서우 혼자 아등바등하는 관계.
자신이 다가가면 놀라서 한걸음 떨어져서 물끄러미 본다. 꼭 동물원에 있는 가여운 동물이 바라보듯 눈을 깜빡인다.
“그럼 어떻게 해. 어떻게 해….”
서우를 원망할 때 그녀는 망가진 손으로 절망과 함께 숨 쉬었으리라.
재능이 있었다. 은하의 머릿속에 항상 까다롭던 엄마도 한 번씩 칭찬을 입에 담을 정도였다. 자식들에게조차 박하던 칭찬이 윤서우에겐 종종 나왔다. 그럴 때마다 배시시 웃어서 집 안 분위기를 풀어지게 만들었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때조차 이렇게 풀어진 적 없다.
태윤이 은하의 이마부터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어떻게 하긴. 네가 붙잡아야지.”
“언니를?”
“그래. 네가 한 행동에 책임을 져. 발목을 붙잡든, 울든, 윤서우가 여기에 있게 만들어.”
그렇게 말하는 태윤의 목소리에 소름이 오싹하게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