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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윤이는 나 좋아하지?”
볼이 터질 것처럼 부푼 서우가 씩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래.”
“은하도 나 좋아해.”
“걔는….”
어제 이야기를 들었다. 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모두 앞에서 윤서우가 톡톡하게 망신을 당했다.
저들끼리 있는 모임에서 이미 소문이 짜하게 퍼져 저마다 윤서우가 공식적인 자리에 얼굴을 보인 것에 대한 뻔뻔함과 그러고 사라져서 꼴이 보아하니 우습게 됐다는 사실로 비아냥거렸다.
전부 듣기 싫어 지들 앞가림이나 잘하라고 쏘아붙이고 하나하나 연락처를 차단했다.
“야, 박희주. 그냥 우리 은하 착하다고 해 주라. 걔가 나 엄청 좋아했단 말이야.”
내 가족이란 말이야.
서우의 잊은 뒷말이 훤하게 들려 희주가 젓가락을 든 손으로 눈가를 재빨리 닦았다.
“그래. 싸가지는 없지만, 착해. 됐냐?”
“응. 됐어. 그리고 희주야.”
“왜, 또!”
“나 여기 정리하려고.”
“…뭐?”
저 입에 몇 개까지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서우가 계속해서 욱여넣었다.
삼키고, 넣고, 삼키고 넣는 걸 반복했다. 먹어 치우는 게 꼭 밥이 아니라 남은 미련 같았다.
“내가 주 회장님 제안이 달게 느껴져서. 가라고 했던 분이 다시 부르니까. 조금… 기대했나 봐.”
서우가 젓가락을 내려놨다. 내놓은 별거 없는 제 짐들을 바라봤다.
그러더니 건조대에 시선이 닿자 눈빛이 뜨뜻하게 변한다. 저기서 강태윤이 티셔츠를 확 벗어 던지고 다가왔다. 성격답게 바닥에 던지지 건조대에 예쁘게 던지면서.
이제는 별로 그를 생각해도 마음이 아프지 않았다.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 줄 저도 모른다.
“윤서우.”
“희주야, 고마운 내 친구. 진짜 미안하고 염치없는 거 아는데.”
어제 그 일이 있고 난 뒤, 자신의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희주가 왜 달려왔는지 알겠다.
희주도 잃은 게 있을 것이고, 고아에 가난뱅이, 엄마 잡아먹은 애가 들러붙어도 내치지 못하는 호구 소리 들을 우리 은하, 그리고 다 버리고 그냥 같이 떠나자는 강태윤.
복잡했다.
왜 이렇게 쉽게 쉽게 가는 길이 없는지 모르겠다.
“염치없으면 말하지 마.”
“한 번만 나 좀 도와줘.”
아무것도 모르는 막 성인이 된 20살의 자신은 욕심을 부려 강태윤을 잡았을지도 모르겠다. 그 나이대는 으레 로맨스를 믿기 마련이니까, 자신과 가자는 태윤의 손을 별 고민 없이 잡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는 머리가 커지니 무서워졌다.
계속 계산을 해 봤는데 답이 나오지 않았다.
자신이 잃을 건 아무리 생각해도 없다. 오로지 달콤한 강태윤만 얻을 뿐이니까.
그런데 강태윤이 잃을 건.
서우가 손가락을 하나씩 굽혀 봤다.
너무 많아서 셀 수가 없다. 치매에 걸려 자신을 딸이라 착각하는 노부인에게서, 무릎을 꿇고 부탁했던 주 회장에게서, 그리고 세상에 하나뿐인 혈육이라고 강태윤과 둘뿐인 은하에게서, 그를 빼앗아 올 수 없다.
“야, 윤서우! 너는, 너는 그게 나한테 할 소리야?”
“나 어제 손가락 굳은 거 보고도 은하가 놀라더라. 그… 많이는 아니고, 그냥 3년이나 4년쯤. 그쯤 되면 은하도 둘째 낳았을 텐데. 그때 내가 직접 다 말할게.”
“그럼 강태윤은. 너 지옥 끝까지 쫓아갈걸.”
“그래서 내가 너한테 부탁하잖아.”
“야, 나도 걔 무서워!”
“…나도. 나도 무서워.”
자꾸 피하려는 저를 그대로 잡은 채 손잡이가 떨어져 나가도록 단단한 문을 부숴 버렸다.
방어할 수도 없이 어느새 강태윤과 잠을 자고, 그와 밥을 먹고, 먹먹한 하늘을 봤다. 꽃가루가 기승을 부리는 봄에는 저를 가둬 두고 싶었다는 남자에게 어떤 방어도 소용없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서우가 말했다.
차라리 제 첫사랑이고 제 짝사랑인 채 남아 있었다면.
기억을 마음 한쪽에 두고 추억처럼 꺼내 볼 수 있어서 좋겠다는 마음과 그냥 이대로 눈을 감고 태윤을 잡고 싶다는 이기적인 마음이 지금 말을 꺼낸 순간조차 충돌한다.
“도망만 치면 괜찮아질 거 같아?”
“나한테 이제 아무것도 없잖아. 이제 정말 나 혼자 남았는데 나는 나만 책임지면 되니까. 누구한테 힘이 되어 줄 수가 없어. 은하가 그러더라. 은하 아버지 때문에라도 나는 절대 안 될 거라고.”
“강태윤을 좋아하면….”
“희주야, 우리는 알잖아. 좋아하는 걸 하면서 어떻게 살아. 내가 그렇게 좋아해도 나는 지금 이렇게 됐는데.”
서우가 제 양 손바닥을 펴서 희주에게 보여 준다.
희미하게 웃는 기색 아래로 매번 혼자 버텨야 했던 수술을 떠올리게 한다. 결국 희주는 아무 말도 해 주지 못했다.
“너,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으면 어떻게 할 거야.”
부질없는 질문을 한다.
희주가 그런 걸 묻는 건 속이 상해서다. 차라리 은하를 원망하고, 이를 갈았으면 이 정도로 마음이 아프진 않았으리라.
“나도 그런 생각 계속해 봤거든. 병실에 가만히 누워 있으면서 계절이 가고, 다시 겨울이 되고 할 때마다 손이 너무 아파서 원망스럽더라.”
사람인데 그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아픔보다 더 서러웠던 사실은 외로움이었다. 고즈넉한 희주가 얻어 준 1인실에서 지내다가 두 번째 수술을 할 때쯤 서우는 다인실로 옮겼다. 거기서 좋은 분들을 만나 웃고 떠들면서 우울한 시간을 애써 잊고 피했다.
“당연하지. 나는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응. 나는 그때로 다시 돌아가게 되면, 있잖아.”
덤덤하게 서우가 말을 꺼냈다. 그리고 그 말을 듣고 난 뒤 결심했다.
반드시 윤서우와 강태윤 남매를 떼어 놔야겠다고.
***
깨끗하게 집의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물건 정리를 한 번 더 했다.
그렇지 않아도 8평 원룸도 크게 느껴질 정돈데 옷 정리와 책장을 뒤집었더니 더 집 안이 황량해 보였다. 희주를 보내고 쉬엄쉬엄 정리하자 벌써 내일 출근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었다.
쓰레기를 버리러 나왔다가 방에 들어가기 전에 평상에 잠시 누웠다.
오랜만에 대청소를 했더니 개운하면서도 몸 곳곳이 쑤셔서 한번 누우니 꼼짝도 하기 싫었다.
휴대폰을 들고 나올걸.
달빛을 들으면 딱 좋은 분위기였는데.
뒤늦은 후회를 하면서 눈을 감았다. 소란스러운 소리, 집 앞을 지나가는 차 소리 등이 분주하게 들렸다.
“하아….”
깊게 심호흡을 했다.
살면서 이토록 개운했던 건 처음이었다. 눈치를 보며 버림받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제 지난날을 떠올렸다. 그러지 않았다면 제 인생이 조금 바뀌었을까. 차라리 아무도 없는 혼자가 더 낫다는 사실을 어릴 때 알아서 빨리 포기하는 법도 배웠으면 싶었다.
가만히 서우가 눈을 떴을 때 눈앞에 강태윤이 보였다.
“눈을 뜨면 왠지 네가 있을 것 같았어.”
별로 놀라지 않았다. 분주함 뒤에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를 듣고도 그냥 눈을 감고 있었을 뿐이다.
아까 헤어지고 지금 다시 보는데 그의 얼굴이 새로웠다. 옷을 갈아입었는지 가벼운 차림새의 태윤이 서우가 누워 있는 평상에 앉았다. 그리고 허벅지를 가볍게 두드린다.
어떤 말인지 알고 있어서 슬쩍 움직여 태윤의 허벅지에 머리를 누였다.
“…높아.”
고개가 떨어질 것 같다. 턱이 목 끝에 붙을 정도로 고개가 불편했다. 그래도 그게 웃겨서 서우가 푸스스 웃자 태윤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도 그냥 있어.”
꼭 저를 재워 주러 그가 온 것 같다. 서우가 딱딱하기 이를 데 없는 태윤의 허벅지 위에서 다시 눈을 감았다.
“태윤아, 오늘 편의점에서 알바하는 수정이 있잖아. 걔가 나 안다고 했다?”
“그래?”
“응. 어릴 때 나 본 적 있대.”
“엄청 예뻤겠네.”
당연히 예쁘다고 말하는 그로 인해 누워서도 제 귓불이 붉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때 좀 말해 주지.”
“예쁘다는 거?”
“응. 그럼 내가 너 더 좋아했을 텐데.”
서우가 솔직하게 말했다. 눈을 감고 웃는 그녀의 볼을 손으로 건들면서 태윤이 웬일로 이런 말을 하는 윤서우를 내려다봤다. 내내 숨기고, 불편해하는 감정만 느껴지다가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 건지 짐작했다.
“그럼 곤란하니까. 너는 숨기는 걸 못해서 얼굴에 전부 드러나거든. 그래서 내가 널 좋아하는 걸 알았다면, 아마.”
“아마?”
“밥도 못 먹고, 연습도 못 하고, 나를 좋아하느라 견딜 수 없었을 거야.”
서우가 실눈을 떴다. 그렇게 말하는 강태윤은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제야 농담이라는 걸 깨닫고 혀를 내보이며 눈을 흘겼다.
“그 정돈 아니었을걸?”
“아냐. 신경 썼잖아. 나 인기 많은 거.”
저걸 강태윤 본인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뭔가 새로웠다. 그러다 문득 미라가 생각났다. 그리고 은하가 말했던 발레 하는 여자 좋아한다는 말도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