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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몇 번 말할 기회가 있었는데 어쩐지 서우가 매번 지쳐 보여 꺼내지 못한 말이었다.
오늘 역시 피곤해 보였지만, 저 잘생긴 남자가 나타나고 난 뒤엔 어쩐지 서우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동생이 예체능에 있었거든요. 그때 어려운 형편의 재능있는 애들 찾겠다고 EA에서 뽑아서 후원한 적 있는데 그때 동생도 장학생이었어요.”
아주 어릴 때라고, 동생이 초등학생이었으니까, 아마 서우는 고등학생쯤 됐었다고 말했다.
서우를 처음 보고 어디서 봤지, 어디서 봤지, 기억을 더듬다가 옛날 앨범을 보고 완전히 기억났다.
“언니가 그때 와서 애들한테 장학금 전달했었어요. 언니도 EA 후원받아서 음악을 하게 됐다고 엄청 밝게 웃으면서 말해서 동생도 희망을 가졌거든요.”
그런 일이 몇 번 있었다. 그런데 그 일을 기억하는 사람을 여기에서 만날 줄은 몰랐다. 같은 동네에서 자주 가는 편의점에서 말이다.
얼떨떨한 얼굴로 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잘 기억나지 않는데 또렷하게 기억하는 수정이 신기했다.
“그래서 언니 기억났을 때 사실 진짜 반가웠는데 말을 못 걸겠더라고요.”
“왜?”
“…언니 손에 흉터 봤거든요.”
편의점에 갈 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거스름돈을 받으면서 손바닥이 거의 찢겨 있는 흉터들을 보고 수정이 꽤 놀랐을 거라 생각하니 미안해졌다.
“이제 괜찮은데. 말하지 그랬어.”
“이 동네가 그렇게 좋은 동네는 아니니까요. 언니는 손을 쓰는 사람인데. 그냥 알겠더라고요.”
더 이상 음악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서우가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조심스럽게 누군가 자신을 알아볼 줄은 몰랐다. 그 사실이 상처가 되기보단, 그냥 그랬던 적도 있었지.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그랬구나.”
“제 동생도 음악 안 해요. 그래서 조심스러웠어요. 동생은 많이 힘들었거든요.”
“좋아하는 걸 하면서 평생 살 수는 없더라고. 예기치 못한 건 언제나 찾아오기 마련이라서.”
좋아하는 걸 하면서 사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쵸? 동생도 내년에 디자인과 오겠다고 공부 중이에요.”
배시시 웃으면서 수정이 조잘거린다.
“나도 사실 동생이 있었어.”
“진짜요?”
“응. 그래서 그냥 수정이 보니까 동생 생각이 많이 났어.”
“그래서 언니가 막 나한테 말 걸고 싶어 하고 그랬구나!”
수정이 꺄르르 웃었다. 맑고 티 없는 웃음소리가 서우를 웃게 만들었다.
어쩌면 앞으로도 자신이 살아갈 날에 수정과 같은 이들이 알아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두근거리기도 했다.
마음을 많이 내려놓았다.
더는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걸 꿈꾸지 않는다.
“좋아.”
서우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후련한 얼굴로 남은 물을 전부 마신다.
“갑자기 뭐가요?”
“오늘 너무 피곤했는데 집에 들어가서 청소하고 싶어졌어.”
“피곤하면 쉬는 게 좋지 않아요? 직장인은 오늘이 마지막 휴일이잖아요.”
내일부터 다시 출근할 텐데 오늘도 일을 하냐고 질린 얼굴로 수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수정아.”
“네?”
“나는 그렇게 유명한 사람도 아니었고, 사실 하프가 인기 있는 건 아니라서.”
이렇게 알아봐 주는 사람이 신기했다.
“아니에요. 우리는 그때 하프를 처음으로 봐서 언니가 그…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사람이라고 했어요.”
“다들 그렇게 생각하나 봐. 나도 그랬거든.”
서우의 말에 둘 다 함께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몽롱하고 몽환적인 음이 좋았다.
서우가 페트병을 분리수거함에 넣고 씩씩하게 일어났다. 수정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집에 가는 길에 희주에게 잠시 제 집에 들를 수 있으면 들르라고 문자도 보냈다.
아마 바빠서 약속이 있을 것 같은데, 오지 않아도 괜찮았다.
옥탑방에 도착해 안에 있는 걸 기어이 다 밖으로 꺼내 놨다. 얼마 되지 않는 짐이 안에서 봤을 땐 항상 단출하다고 여겼는데 막상 꺼내 놓자 제법 된다.
쉴 때마다 청소는 했는데 오래 묵은 먼지가 그래도 많았다.
먼지를 털고, 매트리스까지 낑낑거리며 가지고 나와 햇빛 아래 잠시 말려 뒀다. 주방은 어차피 손댈 곳이 없었다. 화장실 청소를 하고 솔로 여기저기를 문지르며 허리를 잠깐 폈을 땐 정오가 지난 시간이라 배가 고팠다.
나가서 다시 편의점에 다녀와야 하나, 잠깐 생각했을 때였다.
빨래 건조대가 눈에 들어왔다. 강태윤이 걸어 놓은 옷이 그대로다. 서우의 손이 건조대 위에 잠깐 머물렀다.
“야, 윤서우. 이게 다 뭐야?”
손에 같이 점심으로 먹을 초밥 도시락을 구매해 가지고 올라온 희주가 경악해서 외쳤다.
매트리스는 옥상 평상에 올려져 있었고, 옷들은 행거에 걸쳐져 밖으로 삐져나와 있다. 신발도 짝을 지어 오랜만에 햇빛 아래 일광욕을 시켰다.
“청소하고 있어.”
“갑자기?”
“나 원래 청소 열심히 하는데.”
희주는 이곳을 처음 와 봤다. 자신이 한 번도 제대로 초대하지 않아 옥탑방을 보고 제법 놀란 얼굴이 보였다.
“너, 여자가 위험하게….”
“반지하보다는 낫지 않아?”
“뭐 그렇긴 하지.”
서우의 말에 긍정하면서 손에 든 도시락을 흔들어 보인다.
방 안은 어쩐지 답답하게 느껴졌다. 커다란 태윤의 집에 잠시 있었다고 그새 눈이 높아졌나 보다.
“여기 앉자, 희주야.”
“여기?”
눈을 동그랗게 뜨고 희주가 당황해서 서우가 아마 박희주 인생에 이런 경험은 처음일 것이라 짐작했다.
평상 위에 놓은 매트리스 위에 올라가 양반다리를 하며 옆을 팡팡 쳤다. 어설프게 쳐진 그늘막 아래 둘이서 앉아 나란히 초밥 도시락을 뜯었다.
“배고팠는데 잘됐다.”
“야야, 간장 기울어진다. 제대로 들어.”
여차하면 옆에 기울여 놓은 간장이 그대로 매트리스에 쏟아질 판이라 서우가 희주의 말에 집중하며 똑바로 도시락을 들었다.
새우 초밥을 하나 입에 넣고 오물거리면서 서우가 툭, 지나가듯 말했다.
“나 돈 늦게 갚을 것 같아.”
“갚으려면 평생 갚아도 모자라.”
주 회장의 치료비를 끝끝내 받지 않고 온전히 희주에게 자신을 맡겼다. 아무것도 없는 그녀에게 유일한 친구였다.
아무리 돈이 있고 부자라도 저라면 그렇게 해 주기 힘들 텐데 자신만큼 희주도 어렸으면서 모든 걸 나서서 해 줬다.
돈은 어떻게 갚아도 정말 평생 그 마음은 갚지 못할 테다.
“희주야, 강태윤은 여전히 좋더라.”
만나니까 옛날보다 더 멋있고 좋더라고, 서우가 덤덤하게 말했다. 젓가락질을 하던 희주가 물끄러미 서우를 봤다.
첫 번째 초밥이 입안에 가득 있으면서 두 번째 초밥을 욱여넣는다.
“넌 눈이 어떻게 된 거야. 나 같으면 그런 놈 절대 안 만나.”
회사에서 있었던 일은 차마 말하지 못하고 희주가 투덜거렸다. 그래도 윤서우가 좋아하는 놈이라 더 심한 욕은 삼간 채다.
“오늘 태윤이랑 남산에 올라갔는데.”
세상에 그와 저, 둘뿐인 것 같은 느낌이 참 좋았더라고. 그 조용하고 온전한 기분은 마치 자신이 세상 그 무엇으로부터 보호받는다고 자만할 정도로 좋았다.
“나중에 너도 좋아하는 사람 생기면 올라가 봐.”
“미친놈 아냐? 야, 너한테 그 원피스를 입혀서 올라갔다고? 어휴, 변태 새끼.”
“내가 얼마나 좋으면 그랬겠어?”
서우가 뚱한 얼굴로 받아쳤다. 희주가 키들거리면서 웃었다. 이런 농담을 하는 윤서우는 오랜만이라 함께 웃는다.
얼굴에 여전히 씹지 못한 밥알의 조각을 묻히고 서우가 세 번째 초밥을 입에 크게 넣었다.
“그만해. 그러다 너 체하겠다.”
“괜찮아. 어차피 음…. 계속 체한 거 같았거든.”
강태윤을 담은 마음이 무거워서 속 어딘가를 꽉 채워 체증이 일어난 지 오래다. 그럼에도 배는 고프고 그렇다.
“서우야.”
“태윤이가 너 찾아갔었지? 다 아는 거 같더라.”
“내가 아는 것만 이야기했어.”
오늘 많이 바빴는데 윤서우의 문자를 보자 스케줄을 전부 취소했다. 이렇게 오라고 할 애가 아닌데, 저 사는 모습 꽁꽁 감추는 게 이상해서 부리나케 점심 핑계로 초밥을 싸서 달려왔다. 그리고 좁디좁은 동네를 돌아서 서우가 말해 준 곳의 옥탑에 오르니 사실 할 말을 잃었다.
제 오피스텔에 들어와 살라고 해도 한사코 거절하더니 이런 곳에 있었다는 사실이 희주를 서운하게 했다.
“응.”
그 짧은 대답이 어쩐지 많은 걸 담고 있다.
“내가 말 정정할게. 너 미워한다고 했던 거. 그거 사과하고 싶어.”
당연히 윤서우는 미움받을 입장이라고 여겼다. 핏줄도 아닌데, 거기에 죄까지 뒤집어쓴 윤서우처럼 원망할 쉬운 대상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누가 보면 윤서우가 그 트럭을 운전해 선생님을 죽이고, 은하를 그렇게 만든 줄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