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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내리며 차에 있는 시계를 슬쩍 보니 새벽 3시가 넘은 시간이다.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일에 그에게 이끌렸다. 그가 손을 깍지 껴 꽉 잡는다. 어쩐지 각오가 필요한 일처럼 도망가지 못하게 묶어 주는 것 같다.
자신의 집게손가락을 슬쩍 피해서 나머지 손들이 단단하게 얽혔다.
주홍빛의 가로등이 둘밖에 없는 이 공간을 밝혔다. 어디가 목적지인 줄은 모르지만, 가고자 하는 길은 분명하게 보였다.
“예쁘다. 나 이렇게 사람 없는 서울은 처음이야.”
그가 반걸음쯤 앞섰고 무작정 따라가는 서우는 그보다 느렸다.
새벽이고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기다린 것처럼 가로등은 조명을 내리쬐고, 바람은 적당히 기분 좋게 불어왔다. 슬쩍 눈을 돌린 시선 끝에는 서울의 야경이 고층보다 더 가까이 선명하게 시선에 박힌다.
서우의 걸음이 느려지면, 태윤의 걸음도 느려졌다.
가끔 자신도 모르는 곳에 도착해 경치가 좋다고 느껴져서 슬쩍 보면 야경 포인트라 적혀 있다.
사람 눈은 다 똑같구나 싶어서 서우가 푸스스 웃었다.
올라가다가 내려오는 사람을 두어 명 마주쳤다. 그게 더 이상하게 느껴진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오가는 느른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어쩐지 마법에 걸린 것 같았다.
내려오는 사람을 보면 잠시 풀어졌다가, 또 이 길에 태윤과 자신만이 남겨지면 다시 걸리는 이상한 마법.
“힘들어?”
그런데 하는 거라곤 잠깐의 산책과 회사 다니는 게 전부인 서우가 쉽게 지쳤다. 어쩐지 땀도 조금 나서 원피스가 더 달라붙어 걸을 때마다 다리에 감겼다.
“조금.”
“업어 줄까.”
기다렸다는 듯 그가 말했다. 숨이 차서 답할 말을 망설이자 서슴없이 태윤이 제 넓은 등을 서우에게 내어 줬다.
여전히 그의 손이 아플까 봐 망설인다. 자신이 겪어 봐서 더 잘 아는 법이었다. 그런데 업히지 않으면 그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기세였다.
“괜찮은데.”
“너 업으려고 수작 부린 거야.”
그래서 애써 여기까지 끌고 올라왔다고 그가 등을 보인 채 말했다.
그 말이 어쩐지 간지러웠다. 자신은 땀이 나는데 그렇게 올라온 태윤의 등은 따뜻하기만 했지, 땀 한 방울 나지 않아 보인다.
서우가 업힌 김에 그냥 어깨에 얼굴을 묻고 올라가는 길에 보이는 야경을 바라봤다.
분주하지 않은 서울이었다.
새벽이 깨기 전의 시간이라 어쩐지 도시 전체가 비어 보이기도 했다. 엉덩이를 단단히 받쳐 안고 올라가는 그에게 가만히 물어봤다.
“내 옷을 사면서 무슨 생각을 했어?”
여전히 태윤이 앞을 보며 걷고 있었는데 왠지 멈칫, 그의 심장이 떨린 것 같다. 제 심장도 같이 뛰고 있어서 잘은 몰랐는데 그냥 기분이 그랬다.
“언젠가는.”
너는 어떤 마음으로 네 앞에 나타나지 않는 옷들을 샀을까.
태윤이 자신이 처음이라는 말에 용기를 내 물어본 것이다. 그 말이 아니었다면 당연히 자신이 그를 모르던 사이 만났던 사람의 것이라 생각했으리라. 어떤 걸 삼키는 것처럼 태윤이 잠시 뒤 말을 덧붙였다.
“만날 수 있겠지. 내가 이렇게 네 물건들을 갖고 있는데.”
무거운 말 뒤로 불편하지 않은 침묵이 서로를 감쌌다.
“그래서. 예쁘게 옷 입히니까 좋았어?”
“생각보다 더 좋았어.”
애써 가볍게 이야기했는데 태윤이 진솔하게 대답하자 그가 제 얼굴을 보지 못하는 걸 알면서 숨이 괜히 뜨거워졌다. 서로에게 없었던 시간이었다.
“그랬구나.”
“서우야, 옆에 봐 봐.”
남산 타워까지는 아직 한참이 남았다. 그런데 활짝 펼쳐진 태윤의 등에서 본 서울의 새벽은 이상하게 마음을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저만치 어딘가에서 동이 터 오기 시작했다. 점멸하는 가로등 위로 희미하게 새벽이 덧씌워진다.
세상이 깨어나는 시간은 오묘하기만 하다.
분명 태윤과 단둘이었던 마법 같은 순간인데 거기에 현실이 더해졌다. 둘만의 시간에서 함께 현실로 돌아오는 시간. 세상이 깨어나고 다시 하루가 시작되는 그 짧은 시간을 엿본 기분이 들었다.
“예쁘다.”
“처음 서울에 도착했을 때 잠이 안 와서 무작정 나왔어.”
그래서 이 길을 홀로 올랐다. 이제 여기까지 왔으니까, 여기 어딘가에 있을 너를 찾으면 된다고.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어서 발을 굴렸다. 화가 난 사람처럼 그렇게 발을 구르다 동이 터 오는 걸 봤다.
그리고 태윤은 언제가 서우와 이 마법 같은 시간을 함께하기로 했다.
불빛의 바다.
먹먹하고 새카만 밤의 바다가 아니라 이런 걸 윤서우와 보고 나누고 싶어졌다. 한집에 함께 살았어도 서로가 조심스러웠다. 손을 잡아 본 적도, 입을 맞춰 본 적도 없다. 오로지 태윤이 전할 수 있는 건 잠들지 못하는 서우를 위로하는 밤의 피아노뿐이었다.
이제는 그게 없어도 제법 위로 같은 이런 시간을 찾아서 서우에게 알려 주고자 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하나씩 찾아갔다. 그리고 이 순간마다 전부 언젠가 윤서우와 함께하길 바랐다.
“너무 예뻐.”
어떤 미사여구도 제대로 붙지 않은 순수한 감상이었다.
“그래도 너만큼 예쁘진 않더라.”
아, 강태윤은 정말 어쩔 수 없다. 머리를 콩, 그의 목덜미에 부딪치면서 서우가 곤란하게 웃었다.
계속 함께 있고 싶어 하는 태윤에게 희주와 약속이 있다고 말했다. 예전부터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라고 하자 미심쩍어하면서도 그가 서우를 동이 텄을 때 집에 데려다줬다.
“편의점에서 내려 줘.”
“물 떨어졌어?”
“아니. 사탕 하나 사 먹으려고.”
서우의 말에 더 묻지 않고 그가 이제는 제법 익숙한 편의점 앞에 차를 세웠다. 편의점 바깥을 잠시 비질하던 수정이 둘을 보고 손을 흔들며 알은 체를 했다.
시동을 끄고 따라 내리려는 그에게 서우가 그냥 가라고 말한다.
“진짜야. 뭐 살 게 있으면 사실 배달 시키면 돼서.”
어차피 편의점에서 서우의 집까지 가까웠다. 태윤이 잠시 못마땅하게 표정을 굳히다 이내 끝까지 배웅하는 그녀로 인해 차를 돌렸다.
“언니! 와, 원피스 너무 예뻐요. 이거 작년에 나온 V사 거 아닌가?”
신발까지 그렇게 보인다면서 패션디자인과에 재학 중인 수정이 바로 알아봤다. 작년 실크 제품이 유명하다면서 서우를 한 번 제자리에 두고 빙글 돌아보기도 했다.
옆에 사 줄 사람 없이 혼자 여자 옷을 사러 다닌 강태윤이 떠올라 픽 웃고 말았다.
“이거 이대로 모델이 입고 나왔었거든요. 원피스에 스니커즈. 와~ 코디된 그대로 샀나 봐요.”
코디된 옷이 제일 예쁜 줄 알고 그렇게 사고 다녔나 보다.
“그런가 봐.”
물을 하나 사 가지고 나와 계산하고 편의점 파라솔 아래 앉아서 서우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손님이 없어서 수정이 슬쩍 서우의 맞은편에 앉는다.
“아까 운전석 너머로 잠깐 보긴 했는데, 그 모델 같은 남자분은 얼굴이 깐 달걀처럼 뽀얗던데 언니는 왜 이렇게 피곤해 보여요?”
“그래? 잠을 못 자서 그런가.”
또 생각해 보면 아무 꿈도 꾸지 않고 잘 잤는데 이상하게 몸이 피곤했다.
서우가 차가운 물을 삼키면서 계속해서 나는 갈증에 결국 물을 반 통을 비우고 나서야 숨을 쉬었다.
“언니는 너무 생각이 많은 것 같아요.”
서우의 앞에서 가볍게 수정이 말했다.
“내가?”
“언니 처음에 저한테 음료수 줄 때도 한 다섯 번은 고민한 것 같은데. 여기 편의점 오고 다섯 번은 적어도 고민만 하다가 여섯 번째에 줬나?”
수정이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 그때를 기억해 낸다. 자신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나 기억이 잘 안 나.”
“나는 언니 기억해요. 진짜 나한테 고백하는 줄 알았다구요.”
수정의 투덜거림에 서우가 당돌해서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는 모습마저 기운이 없어 보여 탈이다.
“그걸 또 세고 있었어?”
“그럼요. 몇 번째에 나한테 줄까, 하고 심심하니까 세고 있었죠.”
수정은 항상 엉뚱한 면이 있었다. 그래도 다친 뒤로 이상하게 사람에게 다가가는 게 어려워진 서우에게 좋은 동생이자 친구였다. 아마, 수정이 기억하는 게 맞으리라. 뭘 하나 하기까지 오래 걸렸다.
수정을 보면 은하가 생각나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고백 같은 음료수를 내어 줬을 게 분명했다.
“그랬구나. 고백이 아니라서 미안해.”
“그리고요….”
어쩐지 오늘 제 앞에 앉은 건 할 말이 있어서일 것 같다.
서우가 가만히 듣고 있자 수정이 마구 제 머리를 긁적이면서 어딘가 쑥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 언니 알아요, 누군지.”
“나?”
그냥 일개 회사원인데 어디 회사 근처에서라도 전에 만난 적이 있을까.
서우가 고개를 갸웃하자 조심스럽게 수정이 어느 부분을 건드리지 않으려 슬쩍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