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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계속 허기가 져서 서우가 결국 졸린 눈을 떴다. 그러다 이내 참기 어려울 정도로 맛있는 냄새가 코를 계속 자극해서 결국 일어나게 됐다는 걸 깨달았다.
태윤의 침실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침구를 창가 앞으로 가지고 와 서우를 돌돌 말아 놔서 그대로 밤의 전경이 보였다. 달이 하나 산의 끝자락에 밝게 걸려 있었다.
시간은 알 수 없는데 어쩐지 새벽녘일 것만 같다.
“일어났어?”
주방에 있던 태윤이 허리를 세우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밖의 달을 가만히 보고 있는 서우에게 말을 걸었다.
몽롱하게 창밖을 보던 서우의 시선이 그대로 달을 담은 채 태윤을 돌아본다. 순간 그릇을 옮기다가 멈춰서서 그런 무방비한 그녀를 눈에 담았다.
눈을 뗄 수가 없다. 금방이라도 어디론가 사라질 듯, 꼭 자신이 미국에서 오래도록 봐 온 환영처럼 느껴져서다.
아일랜드 식탁에 미끄러지듯 그릇을 놓고 태윤이 서우의 앞으로 걸어갔다.
실내용 슬리퍼가 소리 없이 부드럽게 제게 오는 것을 덜 깬 눈으로 그녀가 본다.
“배고파….”
“미안. 내가 먹이지도 않고 힘들게 했지?”
달이 밝을 때 밤의 정원과 먼 산의 전경이 썩 괜찮아서 서우가 눈을 뜨면 보여 주고 싶었다.
푹신한 침구를 가지고 와 그녀를 이곳에 누여 놓고 저는 요리를 하면서 틈틈이 지켜봤다. 사실 다 핑계고 눈에서 뗄 수 없어서다.
한 팔로 서우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등 전체를 감싸 손쉽게 일으켰다. 덜 깨서 저도 모르게 그에게 매달려 아이처럼 달랑 일어난다.
자신이 그녀의 몸을 자는 동안 수건을 물에 적셔 닦아 주고 제 티셔츠를 입혀 놨더니 무릎 바로 위까지 꼭 원피스를 입은 것 같다.
서우가 눈을 비볐다.
“손.”
저를 일으키느라 제 상처가 벌어졌을까 봐 작게 묻는 소리에 태윤이 나직하게 웃었다.
몇 번을 찢어지고 꿰매도 윤서우가 버텼을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게 못내 태윤은 부끄러웠다.
서우와 식탁으로 걸어가 그가 간단하게 만들어 놓은 요리를 마주했다.
그때야 정신이 제대로 들었는지 놀라서 음식과 그를 번갈아 바라본다.
“너 이런 거 못했잖아.”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거지.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으니까.”
“미국에서는 없었어?”
몸을 바짝 붙여 서는 게 나을까, 얼굴을 마주 보는 게 나을까. 서우를 앉혀 두고 그녀의 옆자리가 나은지, 마주 보고 앉는 게 나을지 그것마저 고민된 태윤이 이내 얼굴을 택했다. 자고 일어나서 살짝 부어 눈을 자꾸 비비는 윤서우가 귀여웠기 때문이다.
맞은편에 앉아 그가 턱을 괴었다.
한식을 좋아하는 윤서우로 인해 야채 볶음밥과 미역국, 그리고 간단히 해 먹을 수 있는 반찬 몇 가지였다.
처음으로 제 미국 생활을 물어보는 서우에게 태윤이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응. 없었어. 사람 들이는 거 싫어해서.”
“아….”
서우가 말끝을 흐리며 뜨거운 국물부터 숟가락으로 떠 입으로 넘긴다. 인공적인, 사 먹는 음식 특유의 조미료 맛이 없이 담백하고 깊은 국물이 계속 손이 가게 만든다.
해장을 하듯 여러 번 연속으로 떠먹는 서우를 보면서 태윤이 같이 먹으라며 땅콩을 간장에 졸여 볶은 걸 그녀 쪽으로 밀어 준다.
“너랑 은하랑 어머니 몰래 이렇게 해 먹을 때면 항상 재밌었어.”
그는 함께 어울리지 않았지만 윤서우가 재미있었다.
연습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이 문만 밖에서 똑똑, 두드려 나가 보면 항상 윤서우는 없고 그들이 해 먹은 야식이 트레이에 담긴 채 그를 기다렸다.
“…선생님한테 맨날 혼났지.”
그때가 기억났다. 다이어트를 숨 쉬듯 해야 하는 은하가 배가 고파서 몰래 울면 칼로리가 낮은 과일로 달래고 그래도 안 되면 몰래 손을 걷어붙이고 자신이 만들 수 있는 걸 만들어 둘이 나눠 먹었다.
태윤은 좋아하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 매번 슬쩍 앞에 두고 그가 비운 걸 보면 뿌듯해했다.
그렇게 가깝고 먼 사이였다, 둘은.
“네가 해 준 걸 떠올려서 하다 보니 꽤 괜찮지?”
이런 걸 미국에서 직접 해 먹었을 강태윤을 서우가 신기하게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그를 무의식중에 평생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힐 도련님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어쩐지 그 오해가 미안해졌다.
“응. 맛있다. 너무 괜찮은데?”
“시집가도 되겠어?”
“넌 남잔데 무슨 시집을 가.”
멋쩍어서 계속 미역국만 떠먹으며 서우가 말했다.
태윤의 웃는 소리가 어쩐지 깨끗한 바람 소리와 비슷하게 들린다.
“네가 안 오니까 내가 가야지.”
“풉.”
먹을 때 건드리는 건 아닌데 그대로 국물을 삼키다 사레가 들린 서우가 켁켁거리자 태윤이 물 잔을 건넸다. 한참을 쿨럭이다 물을 마시고 그를 발개진 눈으로 흘긴다.
“미국에서 공부하면 다 이렇게 돼?”
“왜?”
“그냥. 나는 네가 항상 쌀쌀맞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좀 아닌 것 같아서. 의외야.”
“여자 많이 만나 봤냐고 묻는 거야?”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서우가 침묵했다. 태윤의 손가락이 건반을 치듯 버릇처럼 식탁 위를 두드리다 이내 깁스한 손가락이 아픈지 멈칫하며 멈췄다.
“아파?”
“그런 오해가 싫어서.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면, 나는 다 네가 처음이야.”
“어…?”
“학교를 졸업하고 네가 고백하길 기다렸어. 네가 교복을 입고 있을 땐 참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
은하가 자신에게 눈치 좀 채라고 떠들고 다녀서 그 당시 윤서우의 고백을 모르는 이는 없었으리라. 궁금했다. 우리의 거리를 좁힌 채 자신에게 고백하는 모습의 윤서우가.
그럼 그 역시 같은 마음이었노라고 전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너, 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너보다 내가 먼저라고.”
창고에서 스스로에게 했던 말을 태윤이 서우에게 다시금 말해 줬다. 그래서 윤서우의 고백을 듣고 싶었다. 까만 눈동자가 떨리는 걸 본다.
“그게….”
“서우야, 섹스는 해 놓고, 이런 고백은 또 부끄러워?”
미역국 먹다가 이런 고백을 받는 사람은 저가 처음이리라. 당황해서 숟가락을 들었다 놨다, 물을 먹었다 말았다, 서우가 뚝딱뚝딱 로봇처럼 움직였다. 그런 모습들이 다 재미있어 태윤은 굳이 저지하지 않았다.
“하.”
“어쩌지. 나는 이제 별로 숨기고 싶지 않은데.”
태윤의 눈에 장난기가 돌았다. 우리가 장난할 사이는 아니지 않냐고, 같은 집에 살 때도 데면데면 굴었던 그가 이러니 적응이 힘들었다.
한숨만 푹푹 내쉬는 서우에게 태윤이 웃으면서 좀 더 먹으라고 이야기한다.
“미치겠다.”
서우의 솔직한 심정이 입 밖으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지 못한 채 튀어나왔다.
날것 같은 그녀의 감정을 그대로 들으면서 태윤이 소리 내 웃는다.
“나도 너 때문에 미치겠어. 계속 미친놈처럼 굴었잖아. 그러니까 너도 미쳐 봐야지.”
강태윤이 원래 이렇게 말을 잘했을까.
그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한다. 절대 물러나지 않는 사람이었다. 특유의 분위기가 그에게 있다. 어떻게든 상대에게 그가 종용하는 걸 선택하게 하는, 그런 남자였다.
“하아….”
단전 깊숙이 고여 있던 한숨을 내뱉었다.
너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속엣말을 삼켰다. 그 말을 뱉으면 강태윤이 정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를 품을 것 같아서다.
“천천히 먹어. 아직 밤은 기니까.”
태윤이 숟가락을 들었다 놨다 하는 서우에게 말했다. 빨리 먹으라는 말보다 무서워서 그를 보고만 있자 태윤도 뒤늦게 숟가락을 들었다.
***
서우가 차창에 이마를 기댔다.
어쩐지 강태윤에게 농락당한 기분이 들어서다. 분명히 마지막 말이 곧 시작될 다른 밤을 말하는 거라고 그를 단단히 오해했다.
그런데 밥을 먹자마자 씻고 나오라고 하더니 손을 대기만 해도 감기는 부드러운 원피스 하나가 침대 위에 놓여 있었다. 거기에 새 신발은 스니커즈라 묘하게도 언밸런스하게 어울렸다.
첫날에도 자신에게 준비된 듯한 옷을 입히더니 이쯤 되면 조금 알 것도 같다.
눈치가 둔해도 그냥 저절로 아는 사실들이 있었다. 서우가 옷을 갈아입고 나가자 태윤이 이미 베이지색 슬렉스에 흰 티셔츠 차림으로 기다린다. 그 역시 다시 씻고 나왔는지 머리끝이 조금 젖어 있었다.
둘 다 제대로 말리지 않아서 그걸 깨닫자 마주 보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픽 웃는다.
뭐가 그렇게 급해서.
태윤의 말대로 밤은 아직 한참 남았는데.
자신을 차에 태우고 그가 운전대를 잡았다. 어디로 가는지 궁금했는데 그냥 묻지 않고 기다렸다. 그러다 괜히 태윤이 밤을 이야기해서 혼자만 이상한 생각을 했다는 자괴감에 운전석을 보지 못하고 차창에 이마를 기댔다.
아주 늦은 시간인지 몇 개의 상점을 빼곤 문이 전부 닫혀 있다.
문을 여는 곳도 없을 텐데 어디를 가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차가 얼마 지나지 않아 남산 아래 주차장에 들어섰다.
“태윤아?”
제법 서늘해진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가른다.
태윤이 자신을 영문 모를 얼굴로 보는 서우를 차에서 내리게 했다. 산책을 이렇게 멀리라도 온 걸까. 여전히 어리둥절하게 내린 서우가 태윤과 함께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