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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발자국 (44)화 (4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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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 돌아 제자리로 가면서 서우가 손을 앞으로 모았다.

뒤에서 들리는 조롱이 생각보다 별거 아니었다. 다만, 그렇게 긴장한 것치고 떠난 뒤로 처음 잡아 보는 제 것이었던 하프 소리가 너무 좋았다.

조롱은 한순간이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제 것의 현을 만져 볼 수 있었다는 건 생각보다 기분이 더 좋은 일이었다. 긴장으로 굳어졌던 서우의 얼굴이 만족감으로 풀어졌다.

“…너무 좋다.”

제대로 몇 번 만져 보지도 못했는데 그대로 이걸 뒤로해야 했다. 그럼에도 자신이 대학에 합격해 받은 첫 하프라는 생각에 마냥 좋았다. 그건 그냥 좋은 기억이었다.

예전처럼 사람들 앞에서 손이 움직이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도 됐는데 제 생각보다 썩 괜찮았다. 당황한 지형에겐 미안하지만, 오히려 마지막에 가선 그와 옛날처럼 제법 잘 맞았다고 마음대로 서우가 생각했다.

뒤에 있는 사람들이 볼 수 없게 웃으면서 거실로 들어와 한쪽 벽 옆에 자리 잡은 그녀를 메이드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어쩐지 편안한 마음으로 남은 지형의 피아노를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1시간 남짓한 연주가 끝나고 자신의 옷으로 갈아입기 위해 서우가 2층으로 가는 계단을 밟았다.

땀으로 젖은 이 옷은 드라이해서 다음에 다시 주든지, 희주 편에 부탁하는 게 나을 것 같다. 본격적으로 식사나 간단한 술자리가 시작되기 전에 나가려고 위로 올라와 옷을 갈아입었다.

“진짜 윤서우 엿 먹이는 건 은하가 제일이라니까.”

“성격이 그러니 학교 다닐 때 왕따나 당했지. 난 강은하 독선적이라 좀 그래.”

“맞아. 우리나 되니까 어울려 주는 거 아냐?”

“유명한 건 주지형이지 걔가 아닌데 자기 돋보이기 위해서 이제 귀국해서 피곤한 애 데리고 가든 연주회라니.”

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왔는데 2층에 있는 작은 거실에서 신랄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민하와 윤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이 있다는 걸 모르는지 이야기는 끝이 없다.

“그래서 학교 다닐 때 윤서우도 트로피처럼 데리고 다녔잖아. 걔가 가난하고 고아니까.”

“아아, 그랬지. 윤서우는 그것도 모르고 은하 왕따시킨 애들 전부 고발해서 학폭위 열리고 난리도 아니었었지.”

“죽은 아줌마나 강은하나 똑같지, 뭐. 후원 명목으로 사람 좋은 척하는 거.”

매달 만날 때마다 겉보기엔 같이 웃고 떠들었다. 그들은 항상 은하의 편에 서서 자신의 처지를 깨우치게 했다.

그래도 은하의 편이 있어서 서우는 두 사람이 괜찮았다.

문득, 이런 사람들이었지. 하고 씁쓸하게 웃었다. 눈에 미라가 사 온 백합이 꽂혀 있는 화병이 보였다. 그대로 다가가 손으로 백합이 상하지 않게 대를 모아 뽑아서 들고 남은 물을 그대로 소파에 나란히 앉아 웃고 떠드는 두 사람의 머리 위에 부었다.

“꺅!”

“아악! 이게 뭐야!”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깜짝 놀랐는지 벌떡 일어나 물을 털어 내는 둘을 서우의 가라앉은 두 눈이 향했다.

화를 내려다가 상대가 서우라는 걸 알아차리자 찔리는 게 있는지 잠시 머뭇거린다.

“사람 없는 데서 이렇게 말하면 좋아? 강은하는 알아? 너희들 이러는 거.”

“네가 무슨 상관이야? 너 지금 사람한테 물이나 뒤집어씌우고. 미쳤어?”

민하가 윤지 앞으로 나오면서 이를 드러냈다. 들고 있는 꽃으로 인해 또다시 눈가와 코가 빨갛게 올라온다.

경황이 없어서 은하가 챙겨 준 약을 먹는 걸 깜박했다. 그게 꼭 울음을 터트리려는 걸로 보여 기세등등해진 민하가 팔짱을 끼고 젖은 채로 기막힌 소리를 내뱉는다.

“아니. 지금 누구보다 제정신인데.”

그렇게 말한 서우가 그들이 일어나느라 반쯤 남은 물을 완전히 화병을 옆으로 세워 둘에게 뿌렸다.

“이 미친년이 진짜!”

민하가 소리쳤다. 그렇게 소리쳐 봤자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몸싸움도 못 하는 게. 해 본 적도 없으리라. 귀한 손에 물 한 방울 묻힌 적이나 있을까 싶었다.

달려들면 자신도 싸우면 된다. 독종이라고 불렸을 때처럼 싸늘해진 서우의 얼굴에 사람에 대한 환멸과 경멸이 일었다.

“본인 앞에서 직접 말해 봐. 나한테 이러듯이. 직접 말할 용기도 없으면 같이 어울려 다니지 마. 지금 너희들이 은하 왕따시켰던 애들이랑 다를 게 뭐야. 다 커서도 유치하게.”

“너 지금 은하 감싸고 도나 본데, 너 제일 싫어하는 게 강은하야. 씨발, 강은하가 돈이라도 주나 봐? 너 지금 걔 다리 사이도 기겠다?”

서우가 픽 웃었다. 꽃대를 말아 쥐고 있는 손이 떨렸다. 긴장과 아픔으로 굳어서가 아니라 주먹이 나갈 것 같아서다.

꽃을 쥐고 있으니 그러지는 말아야지. 꽃으로도 때리지 말랬거늘. 그런 말을 머릿속으로 아무렇게나 생각하면서 가까스로 목소리를 낮췄다.

아래층에 있는 누군가들이 듣길 바라지 않아서다.

“나 한참 전부터 기고 있었는데 못 봤어?”

서우가 그걸 눈으로 보고도 몰랐냐고 비웃자 민하가 소리 질렀다.

“저거 진짜 또라이 아냐!”

오랜만에 들어 본다. 자신이 은하의 일에 발 벗고 나설 때마다 이런 애들이 그렇게 말했다.

어차피 집안끼리 얽혀 쉬쉬 덮고 겉으로 하는 화해가 아니라, 정말 학폭위가 열리도록 학교에 이야기하고 그게 안 되면 교육청으로 가겠다고 소리를 질렀다.

선생님마저 사과받고 조용하게 넘어가자고 하는 걸 안 된다고 그럴 거면 은하와 전학시켜 달라고 윤서우가 목소리를 높였었다.

재벌가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이런 일이 소문나 봤자 좋을 게 없다는 걸 모두가 아는데 윤서우만 강은하가 피해 보는 일은 참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계단을 올라온 건 은하였다. 왜 이렇게 큰 소리가 나냐며 올라온 그녀로 인해 모두가 입을 약속이나 한 것처럼 닫아 버렸다.

“무슨 일인데 아래서 소리가 들려?”

은하가 다시 한번 물었다.

“윤서우가 윤서우 짓 했지, 뭐!”

민하가 버럭 화내더니 어딘지 찔려 하는 윤지를 데리고 젖은 채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미안. 내가 곤란하게 했어?”

바로 은하에게 사과하자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던 은하의 표정이 허물어졌다.

알 수 없는 복잡한 양가 감정을 가진 채 서우의 손에 가지런히 들려 있는 꽃대와 화병을 본다.

“엣취.”

서우가 재채기를 했다. 빨개진 눈과 코를 하고선 꽃가루 알레르기로 꽃은 곁에도 가지 않으면서 그걸 손에 쥐고 놓지 않는다.

“왜 거기에서 언니가 나서.”

다가온 은하가 서우의 손에서 백합 다발을 가져갔다. 미라의 선물로 들어온 거라 윤서우 성격에 뽑아서 바닥에 던지지도 못하고 곱게 손에 쥐고 있었던 걸 안다. 제 것 어느 하나 윤서우가 허투루 다룬 적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미울까.

“은하야, 저런 애들이랑 어울리지 마.”

은하가 다 들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서우가 초조한 얼굴로 내려간 애들과 다신 어울리지 말라고 조언했다.

“언니가 뭔데? 나 다 컸어. 내가 알아서 해. 쟤들이 어떤 줄 알아? 원래 누구 하나 자리 비우면 그 사람 욕하는 애들이야. 익숙해.”

안 그런 애들이 이 바닥에 어디 있냐고 은하가 웃었다. 다 참고 사는 거지.

여전히 자신을 어린아이로만 보는 서우에게 신랄하게 대꾸했다. 알레르기로 빨개진 걸 아는데 꼭 제 말에 상처받아서 그러는 것 같아 짜증이 났다.

“화장실에서 얼굴 좀 씻어. 언니 우는 것 같아. 누가 보면 내가 울린 줄 알겠어.”

아무 말 하지 못하는 서우에게 한숨과 함께 말하며 은하가 거실에 딸린 욕실을 가리켰다. 자신이 너무 생각 없이 은하에게 관여한 것 같아서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녀가 말해 준 욕실 안으로 들어왔다.

빨간 눈과 코가 보였다. 그리고 어울리지 않는 입술 색도.

찬물을 틀어 얼굴을 씻었다. 입술을 가장 많이 문질렀다.

“그래도 듣기 싫었어.”

거울 속에서 물에 잔뜩 젖은 얼굴로 서우가 말했다. 자신의 참견이 주제넘어도 은하에 대한 험담은 듣기 싫었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일단 은하에게 다시 사과하자고 마음먹은 서우가 욕실 문을 열고 문틀에 손을 짚었을 때였다.

“선생님~ 까꿍!”

한솔이 벽 옆에서 고개를 내밀더니 그대로 서우가 반쯤 열었던 문을 닫아 버린다.

오른손의 집게손가락이 뭉근했다. 문에 그대로 끼인 채였다.

“한솔아!”

서우가 물을 뿌리느라 엉망이 된 테이블을 대충 닦고 있었던 은하가 그걸 전부 보고 깜짝 놀라 한솔이를 부르며 달려왔다.

“너 엄마가 이런 장난 하지 말라고 했지!”

“으아아앙!”

크게 소리 지르는 은하를 보고 놀라 한솔이가 그대로 울음을 터트렸다. 서우가 서둘러 문을 열고 말했다.

“은하야, 괜찮아. 나 안 다쳤어.”

집게손가락이라 다행이었다. 푸르스름하게 바로 멍이 올라오는데 어차피 감각이 별로 없어서 다쳤나? 싶은 정도였다.

한솔이를 달래자 아이가 은하가 아닌 서우에게 안겨 왔다. 그걸 보면서 은하의 얼굴이 이상해졌다.

“울지 마. 뚝. 한솔이 착하지? 울지 마. 예쁜 옷 입고 이렇게 울면 안 되지.”

애를 달래 본 적이 처음이라 당황한 서우가 계속해서 한솔이를 얼렀다. 은하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쩐지 경악스러운 얼굴로 서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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