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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발자국 (43)화 (4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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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왜 묻냐는 얼굴로 이상하게 지형이 그녀를 보면서 입을 막 열려 했다.

“없긴. 있긴 있….”

“주지형. 너 진짜 이렇게 자꾸 늦을래?”

은하가 다가와 지형의 팔짱을 끼면서 그를 다그쳤다. 서로의 대화가 부자연스럽게 끊겼다.

“어? 미안미안.”

“둘이 벌써 인사했네? 언니 오랜만이지?”

서로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는데 둘이 오랜만이냐고 묻는 은하의 말에 다시 마주쳤다. 필사적인 제 눈빛을 알아봐서일까. 지형이 말했다.

“그렇지. 학교 다닐 때 이후로 못 봤으니까.”

그래, 어제 만난 건 만났던 걸로도 안 쳐 줬으면 좋겠다. 지형을 만나서 그의 호텔 방에서 잤다니.

이래저래 다시 만난 재회로는 서우에게 잊고 싶은 기억이나 다름없다. 거기까지 말했을 때, 사람들이 계속 기다린다고 은하가 지형을 정원의 피아노로 이끌었다.

지형이 한솔이를 안은 채 피아노로 가자 다시금 시선들이 요새 가장 이슈가 된 그에게 따라붙는다.

제 손을 잡아 주던 작은 손이 아쉬워서 서우가 팔짱을 꼈다.

지형이 피아노로 가자 저마다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원형 테이블에 착석하는 게 보였다.

“넌 안 가?”

“난 여기 있을게.”

민하가 테이블로 가면서 서우에게 물었다. 그런데 저 안에 섞이고 싶지 않아 부드럽게 거절했다. 괜히 자신이 저 사이에 껴서 아마도 한국에서의 작은 첫 공연일 주지형에게 가야 할 시선을 뺏고 싶지 않아서라는 이유도 있었다.

두 번 권하지 않고 자리로 가는 민하와 윤지의 뒷모습이 보였다. 거실의 열린 창가에서도 지형의 피아노 치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연주회를 할 때와 똑같이 인사를 하고 피아노에 앉아서 그가 첫 음을 시작했다.

미처 의식하지 못한 사이, 드뷔시의 달빛을 듣자마자 서우는 어젯밤 들었던 피아노 소리가 기억났다.

“아….”

부드럽고 다정한 음에 눈을 감았다.

그래서 깨지 않고 푹 잤나 보다. 매번 자신이 듣던 음인데 치는 사람이 달라서인지 다르게 느껴졌다. 다정하고 섬세한 감정을 담았지만, 서우는 태윤이 쳐 줬던 달빛이 더 익숙했다.

“잠 오는 분들 먼저 재우고 시작하려고 했는데.”

잠깐의 연주를 끝낸 지형이 우스갯소리로 말하자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졌다.

다음 연주는 하프 연주자와 함께하는지, 은하가 따로 부른 하피스트가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한다.

서우의 시선이 하피스트에게 박혔다.

신들의 악기라는 이름답게 아름다운 현의 음률에 시선이 정신없이 따라갔다. 하프를 연주하던 선생님이 방금 책 속에서 빠져나온 그리스 여신이라고 여겼다.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확신했었다. 멀고도 가까운 곳에서 타인의 연주를 듣자 기억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팔짱을 끼고 벽에 살짝 기대 있던 서우의 손이 어느샌가 귀를 만지작거렸다.

귓불이 빨갛게 되도록 손톱으로 긁는다. 자신이 결국 놓아야만 했던 악기로 누군가 연주를 하자 고통과 감동이 귀를 아프게 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것이었던 걸 이제 타인의 것으로 바라봐야 했다. 제 이름이 새겨져 있는 제 것이었다.

눈도 깜박이지 못한 채 그걸 서우가 멍하게 바라봤다.

연주가 끝난 줄도 몰라서, 박수 소리가 들렸을 때에야 정신을 차렸다. 스스로 부끄러워져 귓불을 만지던 손을 내려 드러난 목덜미를 괜히 쓸었다.

분명 괜찮았는데, 자신의 것이었던 하프를 타인이 연주하는 걸 듣자 마음이 동요했다.

애써 하프에서 시선을 뗐다. 피아노로 눈을 돌렸을 때 연주를 끝내고 자신을 보는 지형과 눈이 마주쳤다.

“윤서우도 하프 했었잖아.”

“그래, 오랜만에 그럼 서우 연주도 들어 보자.”

“어릴 때 서우가 항상 선생님이랑 같이 연주했었는데.”

지형과 가장 많이 합을 맞췄던 건 서우였다. 선생님이 별로 내켜 하지 않아 태윤과는 협연을 해 보지 못했다.

“지형이 공연 보니까 둘이 연주했던 거 생각난다.”

음악으로 인해 분위기가 고조됐는지 저마다 편하게 말했다. 그리고 이내 가까운 곳에 서 있는 서우에게 옛날처럼 연주해 달라고 분위기를 탔다.

가장 앞좌석에서 한솔과 그걸 보고 있는 은하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응시했다.

“아니야. 난 됐어. 악기 놓은 지 오래야.”

서우가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그래, 누나. 놓은 지 오래라도 막상 잡으면 몸은 기억할걸?”

지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서우를 향해 왔다. 오지 말라고 놀라서 고개를 저었는데 끝까지 그 긴 다리로 와서 그녀의 손을 잡아끈다.

“언니 해 봐. 연주비 줄게. 나도 오랜만에 언니가 켜는 하프 소리 듣고 싶네.”

여기서 연주한 하피스트처럼 연주비를 줄 테니 켜 보라는 은하의 말이 싸늘하게 박힌다.

“윤서우 해 봐. 윤서우 네 연주비는 내가 준다.”

여기저기서 어떤 남자의 큰 목소리에 단체로 웃음을 터트렸다.

은하의 눈이 서우의 손을 보면서 흔들린다. 그들에게 돈을 받고 연주하는, 가난한 윤서우라는 걸 단번에 알아차린 이들이 비웃는 소리가 들리자 지형도 표정을 찌푸린다.

“무슨 말을….”

“됐어.”

그를 위한 자리였다. 여기서 지형이 화를 내면 꼴이 우습게 된다.

자기가 연주비를 주겠다고 말한 남자가 분위기가 제 편이라 좋은지 웃으면서 지갑에서 바로 수표 몇 장을 꺼내 하프와 가장 가까운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저 씨발 새끼가-”

지형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불같은 성질이 나왔다. 단번에 가서 멱살을 잡으려는 걸 서우가 가까스로 팔을 붙잡았다.

“웃어. 은하 곤란하게 하지 말고.”

“누나!”

“그럼 오랜만에 손 좀 풀어 볼까? 나 그때만큼 못한다고 뭐라고 하면 안 돼.”

서우가 활짝 웃으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지형의 손을 잡고 자신이 먼저 피아노로 이끌었다. 그가 제 손을 잡고 있는 서우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걸 느껴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에 멈추려 했다.

“누나, 하지 마. 이렇게 떨면서….”

“괜찮아. 우리 자주 하던 거 있잖아. 그걸로 해. 나 다른 건 잘 기억이 안 나.”

서우가 웃으면서 말했다. 기어이 지형을 먼저 앉혀 두고 자리를 비켜 준 하피스트에게 눈인사를 해 보인 뒤 자리에 앉았다. 하프를 기울여 제 어깨에 맞추면서 여전히 머릿속이 멍했다.

자신이 이걸 다시 잡을 자격이 있을까.

오른손을 한 번 말아 쥐었다.

감각이 거의 없는 집게손가락이 손바닥에서 미세하게 떨린다.

지형이 서우 쪽을 보고 있다. 지금이라도 도망가야 하는데 어쩐지 오기가 생겼다. 어차피 한 번은 넘어야 할 산이다. 모두가 하프를 켜는, 선생님의 뒤를 이을 만큼 재능있고 노력하는 윤서우로 알고 있었다.

언제까지 피하는 것만으론 안 된다.

노부인께 연주한 하프가 서우에게 전부였다. 뒷덜미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그럼에도 지형과 눈을 마주 보며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지형의 손이 건반 위에 놓인다.

서우가 첫 현을 손으로 퉁기며 시작을 알렸다.

슈베르트 세레나데 백조의 노래 중 제4곡.

지형과 질리도록 합을 맞췄었다. 몸과 손은 이미 현의 위치를 기억하고 했다. 악보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손가락이 번번이 벗어나 피아노의 음을 따라가지 못하거나 음역을 이탈했다.

지형도 당황했는지 속도를 더 줄여 서우에게 맞춘다.

등이 온통 식은땀으로 뒤덮였다.

“이건 좀….”

“윤서우 왜 저래?”

“옛날에는 잘하지 않았나? 괜찮았던 기억이 있는데.”

예민해진 귀에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하필 이 바로 전 무대가 하피스트와 지형의 호흡이 맞아떨어진 무대라 더 비교가 되리라.

아랑곳하지 않고 어떻게든 처음 시작한 곡을 끝냈다. 틀린 음은 틀린 대로 연주했다.

무대에 한번 오른 이상 무슨 일이 있어도 그 곡은 끝내고 내려와야 한다는 선생님의 가르침이 자신을 도망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숨을 참았었는지 뒤늦게야 숨이 찼다. 식은땀으로 드레스 뒷부분이 젖은 느낌이 들었다.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서 일어나 서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오랜만에 켜니까 엉망이지?”

오른손을 꽉 쥐었다. 떨리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다. 그리고 누군가 수표를 놔뒀던 테이블 앞으로 가 수표가 아니라, 그 옆에 있는 주인 없는 샴페인 잔을 집어 들고 단숨에 마셨다.

“연주비 대신, 은하가 주는 술 한 잔으로 할게.”

서우가 밝게 말했다. 자신을 보면서 얼떨떨해 표정이 굳어져서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향해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 원래의 제자리로 돌아간다.

“여전히 뻔뻔하네. 어릴 때도 저 혼자 잘난 맛에 살더니.”

“맞아. 유일하게 하는 게 하프였는데 그것도 그만두고 뭐 해 먹고 사나 몰라.”

“그걸 왜 걱정해? 쟤 장례식에도 안 왔잖아. 은하 어머니, 쟤 땜에 돌아가셨어.”

“아, 그래서 잠수 탄 거야? 근데 돈이 떨어졌나 봐. 다시 와서 은하한테 붙어 있는 거 보니까.”

“은하가 착하니까 어쩔 수 없이 데리고 다니는 거지. 지금 우리 앞에서 술 한 잔 운운해도 아마 저 돈 아까워서 돌아서자마자 후회할걸?”

마지막 말에는 주변의 몇이 작게 동조하며 키들거렸다. 뒤에서 들려오는 속삭임을 은하는 전부 듣고 있었다. 그럼에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 못 들은 척 지형의 다음 곡이 시작하기를 우아하게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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