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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열지 않아도 서로가 죽은 선생님과 엄마를 생각했다는 걸 안다.
자신을 보기만 하면 자꾸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는 걸까. 그냥 이렇게 서로 얼굴만 보고 있으면 안 되는 건지.
알고 있었는데도, 좋아하는 사람에게 자신이 고통밖에 되지 못하는 존재라는 건 서글펐다.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 줄 아냐며 날카롭게 말하는 그녀에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우리 은하가 많이 잘 참았네.”
“뭐?”
“사람 미워하는 게 생각보다 힘든 일이지?”
서우의 말에 은하가 이를 깨물었다. 이런 감정이 드는 게 싫어서다. 정곡을 찔려서 놀란 마음이 컸다.
“언니는 미워할 수밖에 없….”
“네가 걱정했잖아. 내가 강태윤 아직 좋아할까 봐.”
서우가 강태윤의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태윤의 이름이 나오자 은하가 바로 벼락같이 물어 온다.
“아니지? 왜 그런 말을 해? 아니라면서.”
“어떻게 내가 너희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어.”
사람 미워하는 게 많이 힘든 건데, 하물며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려 애쓰는 건 얼마나 힘이 들까.
여전히 강은하가 사랑스러웠다. 오래도록 붙어서 자매처럼 지냈던 사이라 은하의 감정이 고스란히 읽혔다.
이 아이를 괴롭게 하는 건 자신이라는 걸 알면서도 곁에서 자꾸 보고 싶은 욕심이 결국 너무 커졌다.
“언니!”
“나 선생님 말 한 번도 어긴 적 없어. 은하야, 떠올려 봐. 나 많이 노력했잖아.”
버석한 서우의 얼굴이 어쩐지 우는 것처럼 느껴져서 은하가 숨을 참았다.
자신은 딸이라는 이유로 엄마에게 투정을 부리고 떼를 쓰곤 했다. 그런데 한 번도 윤서우는 그런 적 없었다. 엄마가 무슨 말을 하든 ‘네.’라고 대답하고 따랐다.
“알아. 아는데 그래도 오빠는….”
“좋은 사람을 만나서 결혼해야지. 나 같은 사람 말고.”
푸스스, 서우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게 빈정대는 말이 아니라 정말 자조하는 말 같아서 어쩐지 은하가 한 발자국 뒷걸음질 쳤다.
“무슨 일 있어?”
오늘의 윤서우는 이상했다. 매번 제 기분을 맞춰 주면서 그래, 그래. 하고 웃던 윤서우가 아니었다. 알레르기로 붉어진 눈가가 꼭 한바탕 운 사람처럼 보였다. 발간 코끝이 더 그렇게 느껴졌다.
“오늘 정원을 보니까 옛날 생각이 나더라.”
재능을 내보이는 걸 좋아했던 선생님이 가든 연주회를 가장 많이 열었다.
은은한 조명 아래 예쁘게 입은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저마다 연주에 귀를 기울인다. 처음 이런 파티를 봤을 때에는 동화 속에 들어왔다고, 꼭 자신이 공주님이 된 기분이었다.
예쁜 드레스, 귀를 간지럽히는 아름다운 선율들, 맛있는 음식들.
“언니, 서우 언니….”
“내가 너무 갑자기 나타났지? 주 회장님 부탁이었더래도 그래선 안 됐는데.”
마음에 버리지 못한 욕심이 검은 독버섯처럼 자라나 있었다.
어쩌면 바랐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다시 이들이 자신을 어릴 때처럼 받아 줄 거란 희망이 미처 짓밟히지 않고 있어서다.
아무 준비도 하지 못하고 자신을 우연히라도 마주쳐야 했을 은하가 얼마나 놀랐을까.
강태윤은.
서우가 태윤을 생각하면서 잠깐 눈을 감았다. 어쩐지 앞이 아른거려서다.
강태윤은, 그의 마음이 자신에게 있다는 건 너무 늦게 알았다. 짝사랑이 아니었다니. 좋아하는 것도 마음 놓고 못 한다고 스스로를 비웃었다. 어차피 그가 지금까지 잘 갈무리했던 마음이다.
우리는 괜찮아질 거다.
“왜 그래. 꼭 어디 가는 사람처럼.”
진짜 윤서우가 어디 가면 어떻게 하지? 별안간 든 의심이 거의 확신으로 변했다. 서우가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은하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드레스룸 밖으로 내보내고 문을 닫는다. 돌아올 답이 두려운지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은하가 말했던 옷들 앞에 서서 깨끗하게 씻은 손으로 천천히 드레스를 골랐다.
빌려 입은 옷.
자신의 옷이 아니었다. 애초에 빌린 옷을 제 것이라고 아등바등 몸에 맞춰 어떻게든 입으려 했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무섭도록 고요해졌다.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고 가슴을 슬쩍 두드려 볼 정도로 감정이 한순간에 썰물처럼 쓸려 갔다.
연보라색에 은사가 들어간 소매가 짧은 칵테일 드레스를 골랐다.
화장은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거울을 본 자신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붉은색 립스틱을 입술에 덧발랐다. 그런데 꼭 광대 같아 보이기도 해서, 옛날에 공연을 할 때 어떻게 화장을 했는지 떠올리려고 보니 까마득해 기억나지 않았다.
은하와 자신의 사이즈가 같아 높은 샌들을 신고 밖으로 나왔다.
오랜만에 입는 드레스는 예전과 똑같이 아름다웠으나, 제 옷이 아니란 생각이 들어서 그런지 불편했다.
“윤서우!”
한 손에 샴페인 잔을 든 민하가 서우를 불렀다. 그 옆에 윤지가 함께 왔는지 서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은하 거 옷 입었네? 은하가 무슨 일이지?”
윤서우라고 하면 짜증을 부리고 화만 내던 애가 제 옷을 내주고. 민하가 알 수 없는 애라고 혀를 찼다.
벌써 사람들이 꽤 모여 있었다. 그러다 윤서우를 발견한다. 미묘한 기류가 살갗으로 느껴졌다.
같이 학교를 다니고, 같은 모임에서 만나고, 어른들을 동반한 이런 파티를 어릴 때부터 주로 했다.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눠 보지 않은 얼굴이 없다. 서우가 움츠러들지 않고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윤서우가 왜 여기 있어?”
누군가 속삭이듯 묻는 말이 어쩐지 조용한 상태라 꽤 크게 들렸다.
갑자기 그들의 세계로 끼어든 자신이 어릴 땐 어떻게 버텼는지 모르겠다. 뻔뻔하게 웃으면서 눙쳤었나, 선생님 치맛자락 뒤로 숨었었나. 어느 쪽을 고를지 알 수 없어서 서우가 그냥 밝게 웃었다.
“다들 안녕. 잘 지냈지?”
“내가 불렀어. 우리 어릴 때 다 같이 봤었잖아. 언니가 못 올 곳 온 것도 아니고.”
뒤에서 나타난 은하가 서우의 등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러자 하나둘씩 웃으면서 오랜만이라고 지나가듯 인사를 건넸다.
잠적한 서우를 두고 여러 말들이 오갔었다.
자신을 훑어보는 십수 개의 시선을 보면서 숨이 막혀 왔다. 멀쩡하게 숨을 쉬고 있으면서 어쩐지 목 안쪽이 조여 온다.
과거에 알던 인연들이 찾아와서 잘 지냈냐며 어색하게 웃는 걸 어떤 얼굴로 마주했는지 알 수 없었다. 내내 웃고 있던 입꼬리가 아파 왔다. 그러다 은하도 손님맞이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다.
제 주변으로 넓게 분포돼 있던 사람들의 소리가 먹먹해져 들리지 않을 때쯤, 누군가 제 손을 가만히 잡았다.
“선생님, 이뻐요.”
자신의 손보다 훨씬 작은 아이의 손이 제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내려다보자 저를 올려다보는 검은 눈망울이 또렷했다.
“그래요?”
“으응…. 네.”
이렇게 예쁘다고 해 줄 줄 알았으면 저번 만남에도 예쁜 옷을 입고 나갈 걸 그랬다고 서우가 미소지었다.
한솔이의 눈을 이렇게 보고 있자, 둘러싼 웅성거림도 점점 멀어져 갔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되는지, 자신이 피했던 현실이 한꺼번에 다가와 두려웠나 보다.
“주지형이다.”
지형의 이름이 불리자 서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한솔이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갸웃했다.
저 멀리서 작은 연주회라고 해도 제대로 턱시도를 차려입고 걸어오는 지형의 훤칠한 체형이 보였다.
어릴 때부터 함께했던 이들이라 지형이 자연스럽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인사를 했다. 그 주변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을 보니 지형이 꼭 연예인이나 다름없어 서우가 작게 그의 인기를 실감하며 물러나 있었다.
“누나!”
지형이 나타나며 자신에게서 시선이 돌려져 내심 다행이다 싶었는데 눈치 없는 그가 한 손을 번쩍 들면서 주변을 다 쳐 내고 걸어왔다.
시선들이 다시 지형과 자신에게 박혔다. 다들 웃으면서 악수를 하거나 어깨를 툭 치는 등의 인사만 하던 그가 서우에게 다가와 어제 만났을 때처럼 바로 끌어안았다.
단단하고 커다란 덩치에 그대로 안겼다.
“오늘 일어나니까 없더라?”
어쩐지 주변 사람들이 바이러스를 피하듯 슬쩍 피해 있던 덕분에 지형의 이 말을 들을 수 있는 건 한솔이뿐이라 다행이었다. 지형은 솔직했다.
“누가 들으면 큰일 나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말아 줄래.”
“큰일? 무슨 큰일? 누나랑 나랑? 난 좋은데.”
둘의 스캔들을 이야기하는 거냐며 지형이 활짝 웃었다. 진짜 크게 말할 것 같아 서우가 그의 어깨를 밀어내고 한솔을 앞세웠다.
“여기, 네 조카.”
“한솔이 안녕. 우리 영상 통화로 몇 번 봤었지?”
“네! 안녕하세요오.”
지형이 턱시도가 구겨지는 건 상관 하지 않고 아이를 가볍게 안아 들어 올렸다.
꼭 작은 요정 같은 한솔이 그의 품에 안겨서 까르르 웃음을 터트린다. 은하가 뒤늦게 주지형을 발견하고 저만치서 오고 있었다.
“와, 하프도 꺼내 놨네? 누나, 나랑 협연 어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어제 나 밤새 피아노 쳤는데. 오직 잠든 누나를 위해서. 나 제법 로맨틱했어.”
내심 마음 한구석이 철렁하고 있었는데 밤새 피아노를 쳤다는 지형의 말을 듣고 어쩐지 안심이 됐다. 진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우리 아무 일도 없었지?”
은하가 오기 전에 서우가 재빨리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