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발자국 (39)화 (3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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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머리가 하얗게 될 때가 있어.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때가.”

진호가 얼굴을 굳혔다.

그럴 때가 언제인지 기억났기 때문이다. 가만히 캠퍼스 한 곳에 서서 길을 잃은 아이처럼 서 있을 때가 종종 있었다.

불러도 대답하지 않고, 혼란스러운 눈으로 주변을 훑어서 꼭 뭔가를 찾는 사람처럼 헤맸다.

“내가 잘못 생각했어.”

입가를 틀어막은 채 태윤이 읊조렸다. 진호에게 하는 말이 아닌,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는 제 마음을 감추는 데 익숙했다. 어머니 때문에 그렇게 됐다. 윤서우에 대한 감정을 어떻게든 내보이면 그녀를 더 무기처럼 잡고 휘두를 걸 알았으니까.

그런데도 감추지 못해 결국 어머니가 알게 됐을 때 태윤은 음악을 그만두기로 했다.

어차피 자신은 윤서우만 있으면 됐다.

그가 어머니께 휘둘리면 그만인 상황에서 차라리 다행이라 여겼다.

어머니의 죽음 뒤에도 그 약속은 유효했다. 주 회장이 그걸 상기시켰다. 생각해 봤어야 했는데. 왜, 그토록 빨리 자신을 한국에서 내보냈는지.

소식이라도 알고 싶어서 수소문하는 그에게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다.

죽은 어머니와 주 회장이 모든 걸 그 어린아이에게 짐을 지운 채, 흔적을 지워 버렸다.

“물론, 윤서우도 잘못 생각했고.”

태윤이 옷걸이에서 제 재킷을 집어 들었다.

“강태윤!”

잠시 걸음을 멈춰서 절 부르는 진호를 바라봤다. 일단 막고 보려던 진호가 멈칫할 정도로 흔들림 없는 눈이었다.

“내일 아침에 최 박사님께 잠깐 들른다고 해.”

“…그래.”

얼떨결에 진호가 대답했다. 그리고 이내 병실을 뒤로하고 강태윤이 밖으로 나갔다.

어두운 조명 아래 흐르는 음악이 좋아서 서우가 턱을 괸 채 귀를 기울였다.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를 들으면서 저절로 기분이 괜찮아져 설핏 웃었을 때 지형과 눈이 마주쳤다.

“누나, 내 이야기 하나도 안 들었지?”

“듣고 있었어.”

“정말 보고 싶었다니까. 나도 누나 찾으려고 알아봤거든.”

매번 먹는 술을 바꿔서 술잔 몇 개가 테이블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와인을 마시고 곧바로 도수가 높은 위스키를 마시긴 힘들어서 서우는 차가운 얼음물만 앞에 둔 채였다. 혼자서 몇 잔을 마시더니 이내 서우를 뚫어지게 본다.

“뭐 하러 그랬어. 바빴을 텐데.”

“그 말 하나로 끝낼 사이야, 우리가?”

서운하다는 빛이 그의 얼굴에 스쳤다. 가끔 궁금했다. 강태윤과 비슷하게 생겨선 저렇게 풍부한 감정이 서린 얼굴이 신기해 자신을 따르는 지형과 많이 친했었다.

“다시 봤으니까 됐지.”

“왜 하프는 다시 안 해?”

“…사고가 있었어. 그래서 안 해.”

못하는 거지만. 서우가 뒷말을 쓰게 삼키면서 웃었다.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내내 지형이 캐물을 것 같아서다.

“고모가 돌아가시고 나서 말하는 거야?”

“응.”

“그때 누나가 장례식장 안 온다고 욕하는 사람들 강태윤이 멱살 잡고 끌어다 밖으로 내던졌는데.”

그렇게 화난 강태윤은 처음이었다고 지형이 회상했다.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자 형이라는 호칭도 집어치우고 강태윤이라고 불렀다.

어릴 때 엎치락뒤치락 비슷한 실력이었어도 뭔가 묘하게 사촌 형에겐 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게 있었다.

씩씩거리면서 자신도 고모부 같은 피아니스트 아빠 밑에서 태어나게 해 주지 그랬냐고 어머니에게 말했다가 그대로 반지 낀 손으로 한 대 얻어맞았다.

그러지 않아도 피아노 치는 게 마음에 안 들어 죽겠는데 기어이 매를 번다는 소리를 들었다.

“태윤이가… 그랬어?”

“응. 할아버지도 그때 그냥 아무 말 안 했어. 덕분에 형이 욕 다 먹었지.”

주하영의 죽음을 둘러싸고 윤서우 때문이라고 수군거리던 사람들이 그들을 쫓아낸 강태윤을 어머니인 그녀가 죽고 미쳐 버린 모양이라고 손가락질했다.

처음 안 사실에 서우의 눈이 흔들렸다.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여전히 그때의 이야기에 가슴이 떨려서다.

“그래도… 나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누나 좋아했던 사람들은 다 그럴 사람 아니라고 했거든.”

심지어 음악 하는 건 다 꼴 보기 싫다고 소리쳤던 제 어머니, 채희옥까지 서우는 그럴 애가 아니라고 한 소리를 했다.

그러나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윤서우가 끝까지 나타나지 않자 설마 진짜 뭔가 있나, 하고 수군거렸다.

“별로, 그때 일 기억하고 싶지 않아.”

“강태윤이 나 사는 데까지 왔던 적이 있거든.”

별로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피아노를 하면서는 오히려 더욱 멀어졌던 사이다. 강태윤이 티를 내진 않아도 자신이 서우의 옆에 붙어 있는 걸 못마땅해해서 더 먼 사이가 됐다.

그런데 유럽에 있던 주지형을 찾아와서 다짜고짜 서우가 보냈던 마지막 영상을 제 채널을 만들어 업로드하라고 했다.

“응.”

“누나가 나한테 마지막으로 보낸 동영상 있잖아. 그거… 누나한테 그걸 마지막으로 연락 끊겼다고 하니까 인터넷에 올리라고 직접 왔어.”

미친놈이었다. 미국에서 유럽까지 학기 중에 넘어온 게.

거기에 더해 눈도 살짝 돌아 있어서 얌전히 시키는 대로 지형이 파일을 업로드했다. 그걸 보고 난 뒤에야 강태윤이 그대로 아무렇게나 앉아 숨을 골랐다. 전화로 말하면 될 걸, 이게 뭐라고 여기까지 왔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하면 사라진 윤서우가 정말 나오지 않을까 싶어서 내심 기대도 됐다.

“그냥 아까워서 보낸 거야.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었는데….”

“내 첫사랑이 누나인 거 알지?”

갑자기 태윤의 이야기를 하다가 첫사랑 이야기로 넘어갔다. 장난기가 사라진 지형의 눈이 연거푸 술을 마신 사람답지 않게 또렷했다.

첫사랑.

자신도 모르게 서우가 쓴웃음을 지었다. 가볍게 치부하기엔 그 단어가 주는 울림이 아파서다.

“너 거기서 애인 여러 번 바뀐 거 알고 있어.”

“내 이야기까지 다 찾아봤어?”

지형이 씩, 웃으면서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서우를 다정하게 바라봤다.

“일부러 찾아본 건 아니고, 너 영상 올리는 거 보면 거기 댓글에 나와 있더라.”

“냉정해. 일부러 찾아봤다고 해야지. 나 솔로란 말이야, 누나.”

눈을 접어 웃으면서 지형이 서우에게 은근하게 말했다. 그게 자신과 무슨 상관이냐는 표정으로 그녀가 흔들리지 않고 그의 눈을 똑바로 봤다.

과거와 다름없이 신경도 쓰지 않는 서우를 보면서 이내 입을 삐죽이곤, 지형이 테이블에 놓인 술을 마시려 온더록스 잔을 들었다.

“그만 마셔.”

서우가 그걸 빼앗아 갔다.

“나 주량 세. 이건 식전주 정도밖에 안 되는데.”

“컨디션 조절해야지.”

이 정도로는 취하지도 않는다고 이야기했는데도 서우가 잔을 돌려주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 취기가 돈 건 그녀로 보였다.

“알았어. 그럼 누나 번호 줘.”

숨길 것도 없어서 서우가 제 번호를 지형에게 불러 줬다.

어쩐지 이 자리에 없는 태윤의 이야기를 들었더니 목이 타서 물잔을 집어 들고 단숨에 마셨다.

“누나, 그거….”

지형이 말리려고 했는데 이미 술이 끝까지 들어간 상태였다. 조명 탓에 구분되지 않았다. 얼음이 들어 있는 건 똑같았으니까. 서우가 벌떡 일어났다가 눈앞이 핑 돌아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다.

“내 술인데.”

소파라 다치진 않았는데 당황해서 자신을 흔드는 지형을 희미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냥 다 피곤했다. 점점 몸에 화하게 술기운이 돌았다.

“…흔들지 마. 그냥 잠깐만 누워 있을게.”

단숨에 마셔서 그런지 목 끝이 아리기도 했다. 흔들 때마다 속이 울렁거려서 서우가 힘없이 말했다.

잠깐 몇 분만 눈을 감았다가 뜨면 일어나서 갈 수 있을 것 같아서 자신을 두고 지형에게 가 보라며 손만 까딱였다.

옆에서 뭐라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서우가 한숨과 함께 잠이 들었다.

“휴, 누나 나 절대 술 취한 사람 뒤처리 안 하는데 누나니까 내가….”

무거운 걸 들거나 손 쓰는 일은 최대한 피했다. 그러다 한번 손가락 인대가 늘어나 고생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지형이 서우를 부축해 일으키려 했다.

“손대지 마.”

소파 등 뒤에서 어두운 조명을 등지고 불쑥 나온 이는 태윤이었다.

지배인이 호텔 바로 올라갔다고 알려 줘서 막 도착했는데, 지형이 정신을 잃은 윤서우 앞에 쪼그리고 앉은 채였다.

“힉!”

태윤을 확인하자마자 깜짝 놀라서 그대로 엉덩이로 주저앉은 지형이었다. 눈이 돈 채 유럽에 찾아왔을 때부터 자신은 강태윤을 멀리하기로 했다. 가까이 상종하고 싶지 않았다. 회사를 물려받겠다면서 손은 어디서 다쳤길래 붕대에 부목까지 대고 있어 더 위험해 보였다.

물려받는다는 회사가 제 아버지가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곳이 아닌, 다른 쪽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흉흉한 기세라 두 손을 번쩍 올렸다. 지금 무슨 오해를 사서 한 대 맞는다 쳐도 손은 지켜야겠단 생각에서였다.

“왜, 왜 거기서 튀어나와, 형이.”

거기에 어둠 속에서 튀어나오니까 귀신이라도 본 표정으로 지형이 혀를 내둘렀다.

태윤이 얼굴이 붉어진 채 잠들어 있는 서우를 내려다봤다.

“윤서우, 다 커서 이제 술도 마실 줄 아네.”

함께 해 보지 못한 게 너무 많았다. 태윤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아 들었다. 다친 손을 보고 지형이 도와주려 했는데 너무 쉽게 들어 조용히 물러났다.

언젠가 만나야 할 사람들은 만난다. 왠지 둘을 한발 물러나서 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앞장서.”

“어딜.”

“재워야지. 네 방 있을 거 아니야.”

“그냥 따로 방 잡아.”

서우라면 환영이지만, 태윤이 아무리 호텔 방이라도 제 방에 들어오는 게 싫어서 인상을 찌푸렸다.

아랑곳하지 않고 무심한 얼굴로 지형을 바라보고 있자 결국 그가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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