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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발자국 (38)화 (3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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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수록 태윤과 닮았다. 사촌이니 당연했는데 이렇게 닮은 얼굴로 기세는 정반대라 가끔 그게 신기했다.

“그럼.”

“누나도 내 공연 와. 나 곧 공연하거든. 오케스트라랑 협연도 할 거야. 희주 누나가 유럽까지 와서 계약서에 사인 결국 받아 갔잖아.”

희주가 더럽게 비싸게 군다면서 주지형을 가만 안 두겠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지형이 한국에서 공연한다는 걸 얼핏 들었는데 아주 먼 날의 일이 아니었나 보다.

“응. 시간 되면 갈게.”

“누나 하프는? 계속하는 거지? 나 한 번씩 누나 이름 쳐 보는데 안 보여서….”

“나 그냥 회사원이야. 하프는 가끔 생각날 때 해.”

그것도 너희 부모님 집에서.

서우가 그 말을 삼켰다. 한 달에 한 번, 노부인을 위한 연주 외에는 하프를 켜지 못했다.

이제는 한솔이에게도 알려 줘야 해서 만져 볼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가르치기엔 좀 그러니 기초만 잡아 주고, 다른 선생님을 알아보라고 할 생각이었다.

“아….”

지형이 당황했는지 머리를 긁적였다. 실례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괜찮다고 서우가 고개를 흔들었다.

“다 자기 몫이 있는 거지. 그런데 우리 중에 음악 하는 건 너뿐이네.”

태윤도, 저도 그만뒀다. 유일하게 주지형만 음악과 함께 사는 삶을 택했다. 좋아하는 걸 하면서 산다는 건 이렇게 빛나는 일일까. 지형의 에너지를 느끼면서 서우가 자신의 기분마저 조금 들뜨는 걸 느꼈다.

“태윤 형이야 뭐, 하나도 안 아쉬운데 누나는 같이했으면 했어.”

서우가 말없이 웃었다. 이내 지형이 저쪽에서 기다리는 제 일행들에게 다가가 뭐라 이야기하더니 그들이 레스토랑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너도 일행 있잖아. 나도 일행들이랑 왔어. 다음에 시간 되면 보자.”

굳이 왜 다시 오냐며 서우가 그를 들여보내려 했다.

“누나네 일행들이랑 같이 식사하면 안 돼?”

아예 따로 먹겠다고 일행들을 들여보냈는지 천진하게 지형이 물었다.

“그게… 회사 사람들이라서.”

친구들이라고 해도 문제였다. 주지형은 이미 한국에서도 유명해서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피아노는 둘째고 잘생기고 잘 웃는 저 얼굴이 사실 가장 유명했다. 잘생기고 집안 좋은 주지형이 피아노까지 천재 소리를 들으니 유명세는 꼬리처럼 따라붙었다.

“왜? 나 분위기 잘 맞출 자신 있는데.”

해맑게 지형이 말했다. 주지형을 싫어할 사람이 없는 걸 안다.

“다음에.”

지형이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아무렇지 않게 서우의 손을 잡는다.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잡힌 손이 움찔거렸다.

“다음에 언제. 우리 지금 몇 년 만에 얼굴 보는 줄 알아?”

어린아이 같던 웃음이 없어지고 지형이 초조하게 서우를 바라봤다.

이대로 놓치면 다시 보지 못할 것처럼 굴어서 자신이 그렇게 오래 연락을 끊었나 다시금 깨달았다.

“번호 알려 줄게.”

“바꾸면 그만이잖아.”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워서 들어가야 하는데 지형이 놓아주질 않아 곤란한 얼굴을 했을 때였다. 밖으로 잠시 나온 주희가 서우를 불렀다.

“윤 주임님!”

서우와 지형이 동시에 돌아봤다. 그리고 주희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본부장님…?”

못 오신다는 분이 어째서? 하는 얼굴로 보다가 두 손으로 갑자기 입을 막았다.

강태윤과 주지형이 사촌이란 사실은 이미 언론에서도 알고, EA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었다. 회사 사람인 주희도 마찬가지였다.

“피아니스트 주지형 님! 맞죠!”

레스토랑 앞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순간 쏠렸다. 그리고 이내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알은 척을 하려는 사람들이 보여 서우가 그대로 지형을 달고 주희와 함께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갔다.

커다란 화분 등을 놓아 옆 테이블과 분리되는 공간감을 주는 자리고 화장실을 가는 것 이외엔 좌석을 옮기기 힘든 레스토랑이라 누군가 다행히 다가오진 않았다.

“어? 못 오신다더니…. 어머!”

어두운 조명에 비슷해 보였는지 윤경 또한 착각하다가 이내 주지형을 알아봤다.

“안녕하세요, 서우 누나 아는 동생인데 저도 오늘 여기 합석하면 안 될까요? 누나를 너무 오랜만에 봐서요.”

아는 동생이란 말에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서우를 향했다.

주지형과 아는 사이라면 강태윤과도 아는 사이 아니냐는 소리 없는 물음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평탄하지 못한 제 회사 생활에 먹구름이 꼈다.

“저희야 너무 좋죠. 그런데 그럼 서우 씨 본부장님이랑도 아는 사인 거야?”

“아, 어쩐지….”

윤경의 말에 주희가 말하다 아차 싶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다들 대놓고 묻진 못했는데 서우가 갑자기 비서실로 온 이유를 이렇게 짐작하게 됐다.

“태윤 형이랑 같이 일해?”

사람들의 눈만 없다면 지형의 입을 막고 싶었다.

서우가 은은하게 웃으면서 자포자기한 얼굴로 있자 그나마 눈치 있어서인지 화제를 금세 돌렸다. 디너 코스를 추가로 시키고, 비싸고 좋은 와인까지 지형이 시켜서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술은 잘 하지 않으나 분위기상 입에만 댄 채 서우는 그가 유럽 투어를 다니며 겪었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럼 유럽에 애인도 있는 거예요?”

비슷한 나이대의 주희가 궁금한지 호기심에 물어왔다.

“아뇨. 아직 첫사랑을 못 잊어서요.”

지형이 우스갯소리처럼 말했다. 다들 그게 농담이리라 여겨 분위기가 한층 달아올랐다.

늦은 시간까지 와인 두 병을 더 마신 뒤에야 다들 아쉬움을 감추고 갈 준비를 해 서우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나.”

“아 두 분이 오랜만에 봤다고 했죠? 우리가 먼저 일어나야겠네.”

“감사합니다. 제가 나중에 누나 통해서 공연 티켓 보내 드릴게요.”

“저 초대석 처음 가 봐요.”

가장 좋은 좌석이라는 지형의 너스레에 주희가 발개진 얼굴로 웃었다. 그냥 자리에서 헤어지자고 먼저 떠난 두 사람을 보면서 서우가 피곤한 숨을 내쉰다.

내내 대화를 함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종종 바깥을 보는 그녀를 이미 지형은 알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 다른 약속 있는 거야?”

“아니야. 그냥 피곤해서 그래.”

입에만 댄다고 생각했는데 조금씩 마셨더니 서우도 취기가 살짝 돈 상태였다.

어느새 레스토랑 마감 시간이 돼 간다는 지배인의 안내에 결국 둘도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피곤해도 나랑 이야기 좀 해.”

그의 어머니인 채희옥 여사가 생각났다.

지형의 마음을 좀 바꿔 달라고 하는데 이렇게 자유로운 영혼의 마음을 자신이 어떻게 바꾸라는 건지 궁금했다.

“커피숍도 문 닫았을 것 같은데. 어차피 한국에 좀 더 있을 거잖아. 나중에….”

“지금 해. 어차피 얼굴 알려져서 커피숍 같은 데 잘 못 가.”

공연한다고 오늘부터 광고 푸시를 하겠다더니, 그래서 그런지 알아보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지형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내 방으로 가. 나 여기서 묵어, 누나.”

“그건 아닌 것 같고 위에 바 있어. 거기 룸도 있고 조명도 더 어두워서 넌 줄 잘 모를 거야. 거기로 가자.”

칼 같은 윤서우였다. 결국 마지못해서 지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더 위층에 있는 바로 이동했다.


 

***


 

태윤이 묵직한 머리를 멀쩡한 손으로 내리눌렀다. 약을 먹어도 두통이 사라지지 않았다.

수술이 끝난 손가락을 내려다보다 이내 VIP 병실 창가에 앉아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병실을 나갈 것 같으면 윤서우에게 전화를 하겠다고 김진호가 휴대폰까지 빼앗아 난리를 치기에 겨우 이 정도 가지고 병실까지 온 터다.

“윤 비서님 말이면 다 되네.”

제 말은 가볍게 무시하면서 서우를 들먹이면 태윤이 무섭게 그를 노려보다가 결국 따르는 것을 보고 서운해서 진호가 말했다.

“어차피 윤서우에게 가려던 것도 아니야.”

자신의 손가락을 퍽 좋아했는데 어쩐지 울 것 같아서다. 머릿속을 정리하고 싶었다. 짐작하고 있었는데, 희주의 말을 듣는 순간 이성이 날아가서 스스로에 대한 분노만 남았다.

“그래? 방금 레스토랑에서 나와서 헤어졌다고 박 비서님한테 문자 왔는데, 우연히 지형이 만났나 봐.”

“하.”

서우가 제 첫사랑이라면서 항상 선망을 가지고 보던 주지형의 얼굴이 떠올랐다. 생긴 것도 기분 나빴다. 자신과 비슷한 키에 엇비슷한 얼굴에 윤서우가 속지 않겠지만, 그래도 그런 게 앞에서 알짱거리는 건 짜증이 났다.

초조했다.

그게 태윤의 마음을 갉아먹었다. 희주의 말대로 서우가 어떤 생각인지 알 수 없어서다.

이토록 윤서우를 알기 어려웠던 적이 없다. 어린 시절의 윤서우는 얼굴에 고스란히 보였다. 자신을 보는 눈을 선명하게 느껴서 그녀가 같은 마음이란 사실을 태윤은 쉽게 눈치챘다.

그가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대체 무슨 일이야?”

“가늠이 안 가서.”

“뭐?”

“얼마나 윤서우에게 빚을 지고 있는지 짐작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구역질이 나.”

어렴풋이 잡히는 마음이었다. 주 회장이 무어라 그녀를 협박했는지 희미하게 잡혔다.

너는 온전히 그걸 듣고 나와 은하를 두고 떠났는지.

태윤이 멀쩡한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진호가 그걸 보고 깜짝 놀라 일어났다. 그가 우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쓸어내린 얼굴에서 감정이 거세된 사람처럼 무감한 얼굴을 보고 차라리 우는 게 낫다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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