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7_
시들기도 잘하고 건드리면 목이 부러지는 그런 연약한 꽃인 줄 안다.
희주가 질린 얼굴로 태윤을 봤다. 저게 꽃으로 보이다니 윤서우 눈이 어떻게 된 게 분명했다.
“강태윤이 꽃은 아니지.”
억지로 분위기를 풀어 보려 내뱉은 희주의 말에도 그는 웃지 않았다. 까만 눈이 어느 한 곳을 응시했다.
“윤서우는, 독하다니까.”
태윤이 한참 뒤 내뱉은 말은 그게 다였다. 어머니는 자신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아마 가장 그녀를 닮은 게 그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없는 하얗고 긴 제 손가락을 태윤이 무기질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윤서우가 좋아하는 손가락.
피아노를 치면 활짝 웃으면서 제 주변을 서성거렸다.
“선생님 뒤를 이어서 유명한 하피스트가 될 거라고. 걔는 근데 유명해지고 싶은 게 아니라, 너랑 협연이 하고 싶었대. 너 때문에 유명해지고 싶었대.”
하프와 가장 잘 어울리는 협연은 피아노라고 은근히 윤서우가 귀엽게 제 곁에서 조잘거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 말간 얼굴을 떠올리자 태윤이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뚜둑.
“야!”
경악한 희주가 비명처럼 높게 소리를 질렀다. 제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강태윤이 오른손의 집게손가락을 그대로 꺾어 부러트렸기 때문이다.
불에 손가락을 달군 듯 꺾인 손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어금니를 꽉 물었다.
“내가 여기 왔던 거 서우에겐 말하지 마.”
태윤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희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뼈가 어긋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손가락이 부러지는 걸 눈앞에서 목격했기 때문이다.
미친놈. 저건 미친놈이었다. 화들짝 놀라 119를 부르려는 희주를 막고 태윤이 보라색으로 부풀기 시작하는 손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그녀의 사무실을 나갔다. 당황해서 휴대 전화만 든 채로 얼어붙은 희주를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
태윤이 밖으로 나왔다. 로비에서 기다리던 김진호가 그를 발견하자 가까이 다가왔다.
주머니에 있던 휴대 전화가 울려 빼서 받으려는 순간 손가락에 통증이 일며 그대로 놓쳤다. 대리석 바닥 위를 휴대 전화가 그대로 떨어졌다.
이런 실수를 하지 않는 그이기에 김진호가 휴대 전화를 대신 주워 들고 허리를 폈을 때 부어오른 강태윤의 손가락을 발견했다.
“이게 왜 이래?”
자신은 고작 손가락 하나였다. 윤서우는 이걸 어떻게 견뎠을지 막막할 정도로 태윤이 자신을 다그치는 김진호에게 아무 말도 못 했다.
“최 박사님 연락할게. 어쩌다가 이런 거야? 위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시끄러워.”
머리까지 지끈거렸다. 멀쩡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숨을 몰아쉬는 강태윤을 보면서 김진호가 설마, 하는 눈으로 그를 의심했다.
강태윤 손이 타인에 의해 부러진 거라면 지금쯤 경찰차가 왔어야 한다. 그런데 멀쩡하게 나와서 제 분을 못 이겨 숨을 삭이는 건 어쩐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네가 그랬어?”
“그냥 좀 잠깐만 두면 안 될까.”
위험하게 일렁이는 눈으로 태윤이 부러진 손가락을 그냥 두라고 말했다.
통증이 머리에서인지, 손가락인지 구분되지 않을 정도였다. 온 신경이 저릿거려서 예민해진다. 병실에서 마취에 깨 눈을 뜰 때마다 윤서우가 어떤 생각을 했을지, 알 수 없어서다.
…윤서우에겐 아무도 없는데.
“미쳤어? 바로 병원 가야지.”
흥분해서 김진호가 주치의인 최 박사와 통화를 하면서 화를 냈다. 그러다 태윤이 그냥 나가려 하자 크게 소리쳤다.
“나 지금 그럼 윤 비서님한테 전화한다?”
걸음을 뚝 멎고 서서히 뒤를 도는 태윤이 싸늘하게 김진호를 바라봤다. 그럼에도 그가 물러나지 않았다. 자신은 강태윤을 보좌하기 위해 수행 비서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차 가지고 나올 테니까 가만히 있어.”
통화를 끝내고 서둘러 김진호가 지하로 향했다. 어디론가 사라지면 당장 윤서우를 부르겠다는 협박으로 인해 태윤이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그냥 서 있었다. 하늘은 맑았다. 통유리창으로 보이는 밖은 저마다 갈 곳의 목적이 뚜렷한 사람들이 다니고 있었다.
모두에게 저마다의 길이 있다. 그런데 그걸 잠깐 잃어버린 기분이 들어 태윤은 현기증이 났다.
***
J 호텔은 3년이란 시간 동안 새로 리모델링해 재오픈한 지 얼마 안 된 곳이었다.
5성급 호텔 대부분이 오래된 호텔이라 재오픈을 했을 때부터 1년이 지난 지금까지 티켓팅이나 다름없이 예약이 치열했다.
세련된 프러포즈 장소로도 유명했고, 따로 호텔 내에서 프러포즈 기획이 서비스에 들어가 있어 더욱 젊은 층에 선호받았다.
그중에 요즘 서울 내에서 가장 비싸고 그 값어치를 한다는 평가를 듣는 J 호텔 프렌치 레스토랑은 파리의 미슐랭 셰프를 초빙해 일반 예약이 더 어렵기도 했다.
“어쩌다 보니 우리 셋이 회식하게 됐네? 본부장님이랑 김 비서님은 일이 있어서 못 오신대.”
윤경이 퇴근하기 직전 연락이 왔다면서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태윤이 있다는 일은 일정에도 없는 일이었다.
서우가 그 말을 듣자마자 빈자리와 함께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서 봤으나 어떤 연락도 들어와 있지 않았다.
오후에 자신에게 전화를 걸었던 강태윤에게 회식에서 보자고 했다.
어떻게든 결론을 내야 하는데 어쩐지 민망해서 슬슬 그를 피해 강태윤이 참다못해 전화한 거라고 여겼다. 어쩐지 목소리가 조금 걸렸었다. 보고 싶다고 말하면서 무슨 일 있냐는 말에는 대답 없던 그가 불편하게 마음에 남았다.
서우가 애써 빈자리에서 시선을 돌렸다.
어둑하게 진 하늘 아래 서울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대부분의 호텔 레스토랑이 그러듯 이곳도 뷰가 좋았다.
“우리끼리 서우 씨 환영회 하면 되겠다. 비서실에 여자 셋이서.”
“전 좋아요.”
윤경의 말에 주희가 맞장구쳤다. 그제야 서우가 잠시 태윤에 대한 생각을 접고 겨우 따라 웃었다.
식전주 샴페인이 먼저 나왔다. 이미 언질이 있었는지, 자신을 지배인이라 소개한 남자가 오늘 나올 메뉴를 간단하게 설명해 준다. 각자 디너 코스에서 먹고 싶은 메뉴를 따로 선택했다.
아무거나 지배인이 추천해 준 대로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서우 씨, 무슨 일 있어?”
어쩐지 불안해 보이는 그녀에게 윤경이 물었다.
“잠시만요. 통화할 곳이 있어서요.”
서우가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례라는 걸 알면서 어쩐지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휴대폰을 손에 쥐고 레스토랑 밖으로 향했다.
잠깐 망설이다 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윤 비서님.
김진호였다. 순간 답할 말을 잊고 서우가 괜히 주변을 서성였다. 레스토랑으로 들어가려던 사람들이 한 번씩 서우를 바라본다.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김진호에겐 뭐라 물을 수 없었다. 주변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죄송하다고 끊으려는 서우에게 김진호가 한숨을 내쉬며 조용한 곳으로 옮기는지 소음이 잦아들었다.
지금 일정이 있으셔서, 아마 오늘은 연락 드리기 힘들 것 같습니다.
“혹시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요.”
낮의 통화가 마음에 계속 걸린다고 하기엔 김진호를 보기 민망해서 서우가 말을 줄였다. 그의 목소리 또한 별로 좋지 않아 혹시 본사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싶었다.
아무 일도 없습니다.
김진호가 단호하게 말했다. 괜히 제 기우였나 싶어서 서우가 다시 한번 죄송하다는 이야기를 한 뒤 전화를 끊었다.
“내가 뭐라고….”
선을 긋다가도 꼭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으면 저도 모르게 넘어 버린다. 내내 강태윤을 이리저리 피했으면서 먼저 전화를 걸어 그의 안부를 물은 스스로가 우스웠다.
전화를 끊고서도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는 서우에게 누군가 레스토랑에 들어가다 멈춰 섰다.
“서우 누나?”
순간, 눈앞에 강태윤이 서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곧 그보다 더 연한 갈색 머리에 귀를 뚫은 피어싱이 보였다.
서우가 그를 알아보자 상대 역시 곧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가까이 다가와 불시에 그녀를 끌어안았다.
“와, 누나를 이런 데서 보다니! 이게 얼마 만이야.”
주지형이었다.
태윤의 사촌이자, 유럽 어딘가에 있을 피아니스트. 그의 말대로 주지형을 여기서 볼 거라곤 생각하지 못해 서우가 당황했다.
어린 날이야 가끔 함께 연습도 하고, 매번 주지형이 제 뒤를 따라다녔다. 그런데 지금은 가는 길이 너무 달랐다.
“지형아, 좀 놔 봐.”
“너무 반가워서 그래. 연락도 끊고 어디 있었던 거야? 태윤이 형이 주기적으로 나한테 누나랑 연락하냐고 물어보던데.”
잊을 만하면 모르는 번호로 연락 와서 강태윤이 그를 달달 볶았다. 새벽이라도 전화해 혹시 윤서우의 안위를 물어보고 모른다고 말하면 칼같이 끊어 버려 황당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태윤과 비슷한 얼굴을 하고선 텐션은 5단계쯤 위였다.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이렇게 순수하고 반갑게 자신을 맞아 주는데 그 기운이 좋았다.
생각해 보니 주지형은 항상 사람을 웃게 만들었다. 긍정적이었고, 제 감정에 솔직한 아이였다.
“잘 지냈어? 너 공연하는 영상 가끔 봤어.”
“여기서도 나 유명하지?”
지형이 한쪽 눈을 찡긋하면서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