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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사무실인데 앞장서는 건 강태윤이었다. 저런 점이 질색할 정도로 싫어서 희주는 온몸을 부르르 떨며 나쁜 기운을 털어 냈다.
“본부장님 수행 비서 김진호입니다.”
진호가 먼저 뒤돌아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는 강태윤의 뒷모습을 보며 희주에게 재빨리 제 명함과 인사를 건넸다. 서로 어쩐지 동병상련의 눈빛이 스친다.
“어떻게 하죠? 제가 급하게 나오느라 명함을 안 가지고 나왔는데.”
강태윤이 아래 와 있다는 사실만으로 뛰쳐나오느라 명함을 챙길 정신도 없었다.
“그린 스퀘어의 박희주 실장님. 명성 많이 들었습니다.”
진호가 친근하게 그녀를 치켜세웠다. 최근 클래식 공연의 대중화에 앞장선 기획을 대부분 한 게 박희주였기 때문이다.
그 역시 종종 공연을 보러 다녀서 알고 있었다.
“명성이랄 것까지야….”
희주가 손사래를 치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둘이 연애해?”
“뭐래. 미친.”
태윤의 심상한 물음에 바로 희주의 입에서 욕이 튀어 나갔다. 회사에서 바른말, 고운 말만 우아하게 쓰느라 노력하는데 강태윤의 개소리에 저도 모르게 소리쳐 놓고 주변의 누가 들었을까 눈치를 본다.
“연애하는 거 아니면 앞장서.”
무심한 얼굴로 태윤이 말했다. 속으로 욕을 구시렁거리며 희주가 진호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곤 큰 보폭으로 걸어갔다.
“왜 남의 회사까지 와서 이래. 당황스럽게.”
“표정 풀어. 그러게 내가 보자고 할 때 봤으면 여기까지 올 일도 없었을 거 아니야.”
“내가 널 왜 만나?”
흥분한 건 저 혼자인 것 같아서 희주가 내내 내리누르면서 말했다. 태윤의 목소리는 그에 비해 여유로웠다. 여기가 누구 회사인지 잠시 헷갈릴 정도였다.
“우리, 할 말이 있을 텐데.”
주어는 이야기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하는 태윤의 태도를 보면서 어떻게든 답을 듣겠다는 완고함이 느껴졌다.
엘리베이터에 타서 16층을 누르면서 희주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어디까지 이야기해도 될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무실에 도착해 태윤은 저를 보는 수많은 그녀의 팀원들을 희주의 뒤에 선 채 마주했다. 그의 등을 떠밀어 제 사무실로 밀어 넣고 문을 잠근 희주가 곤란한 목소리로 말했다.
“손님이 갑자기 와서 미팅 좀 30분만 미뤄 줘요.”
희주의 사무실 전망 아래로는 그린 스퀘어의 홀 전체에 주지형의 얼굴이 한눈에 보이도록 대형 스크린으로 걸려 있었다.
블라인드 사이로 그걸 보며 픽 웃은 태윤이 이내 그녀가 권하는 대로 손님용 소파에 앉았다.
“한국에 들어왔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테이블에도 온통 주지형의 홍보 자료들이었다. 여전히 음악을 하는 데 외숙모와 갈등을 빚어 들어와도 호텔에서만 돌지, 본가에는 거의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애초에 서로가 관심 없는 사이라 접점도 없어서 딱히 관심도 없었다.
“사흘 전에 들어왔어. 계약은 우리가 직접 파리에 가서 6개월 전에 했고.”
자신들이 제공한 호텔과 연습실에서 손을 풀고 있다면서 희주가 말했다. 어차피 주지형은 그저 날씨 이야기처럼 서두에 지나지 않았다.
태윤이 관심 있는 건, 그전에는 관심도 없어서 남처럼 지내던 사촌인 주지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기에.
그가 답답한지 타이를 조금 잡아당겨 풀었다.
어딘지 목이 죄어 오는 모습으로 보였다. 자로 잰 듯이 반듯하고 어딘가 의뭉스러움을 감춘 채 항상 윤서우의 주변 한 발자국 뒤에 서 있던 강태윤으로 보이지 않았다. 초조하고, 화가 난 것에 가까웠다.
희주가 속으로 혀를 차다 이내 깨달았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약속 없이 만나기란 힘들다는 걸 알면서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를 알아서다.
초조해서다.
얼굴을 맞대지 않으면 자신이 제대로 답하지 않고 뭉뚱그려 빙빙 돌릴 걸 알기에 대비할 시간도 주지 않고 밀고 들어온 강태윤에게 혀를 내둘렀다.
“서우 손.”
어쩐지 목이 탔다. 희주 또한 태윤처럼 제 목을 죄어 오는 블라우스 윗단추를 풀었다. 태윤이 짧게 윤서우의 손에 대해 돌리지 않고 물어왔다.
“응.”
“…사고로 그렇게 됐다고.”
태윤은 윤서우의 병원 기록부터 뒤졌다. 그녀가 다친 줄 몰랐을 때도 그랬다. 매년 기록을 뒤져 보고 병원에 간 기록이 없으면 그걸로 안심했다. 몸은 건강히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서우가 다쳤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사고에 대해 다시 알아보면서부터였다. 보험 처리를 하지 않고, 혹은 지울 수 있는 사람.
“서우가 그래? 사고라고?”
“윤서우가 어떻게 말했으면 왜? 그대로 말해 주려고? 사실만 말해, 박희주. 내 어머니 사고에 윤서우가 관여된 게 맞아?”
그 당시 출동했던 119 대원 중 하나가 그랬다. 그때 목숨을 잃고 다리까지 부상당한 사람이 있어서 확실하지 않은데 구조자 중 하나가 많이 다친 것 같다고. 다른 병원으로 옮긴 기억만 겨우 난다고 희미하게 기억했다.
다른 이들은 전부 그날 신고하고 구조대가 올 때까지 버텼던 구조자에 대해선 입을 다물었다.
“나는 말 못 해.”
“입이 있는데 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몰라. 이제 와서 서우 마음 잘 잡고 살고 있는데 넌 갑자기 왜 그러는데. 7년 전에도 가만히 있다가 왜?”
그렇게 쏘아붙였다가 이내 희주가 태윤의 표정을 봤다. 미국으로 바로 떠난 그를 기억해 냈다.
자신 역시 같은 세계에 살았으니 안다. 혼자서 무얼 하기엔 그들은 집안이라는 틀에 갇혀 있었다. 서우가 강요당했던 것처럼, 강태윤 역시 강요당했으리라.
서로가 서로의 약점이었다.
윤서우는 바보 같은 게 진짜 가족도 아니면서 눈앞의 남자와 그 여동생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어미 새처럼 싸고돌았다. 제가 망가지는 것도 모르고 꿈을 갈아 넣고, 껍데기만 남아서 숨만 쉰다.
은하의 행동을 보고 전부 말하겠다며 길길이 날뛰는 자신을 끌어안으면서 서우가 말했다.
강태윤이 매번 데리러 왔다고. 윤서우의 인생에서 강태윤은 수렁에서 항상 그녀를 잡아끌어 준 사람이라 너무 좋았단다. 진짜 언니처럼 제가 없으면 잠을 못 자고 칭얼대면서 졸졸 따라다니는 은하를 지켜 주고 싶었단다.
제 앞가림도 못 하는 게.
가족이 뭔지도 몰라서 그 이상한 걸 가족이라고.
“넌 그게 잘사는 걸로 보여?”
태윤의 물음에 희주가 입을 다물었다. 툭, 저도 모르게 떨어지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친다.
나 좀. 나 좀 데려가 줘, 희주야. 나 좀 데려가.
7년 전 그 전화를 처음 받았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짐승처럼 울면서 말하는 목소리가 낯설어서 누군가 했다. 몇 번이나 반복되는 말을 겨우 이해했다.
나 좀 데려가 줘, 희주야.
희주가 두 손바닥 안에 제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달려간 그곳에서 여러 개의 손가락이 마디마디 끊어져 하얀 붕대를 감은 채 울고 있는 윤서우를 봤다.
그때 희주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다시는 윤서우가 그렇게 사랑하던, 제 인생을 위로받는 느낌이라던 음악을 다시 할 수 없음을.
도의적인 책임으로 강태윤의 외할아버지인 주 회장은 서우의 치료를 약속했지만, 서우는 희주에게 매달렸다. 그날, 몰래 병원에서 서우를 데리고 나와 자신의 재단이 운영하는 병원에서 3년 동안 네 번이 넘는 수술을 했다.
다른 손가락들은 일반 사람처럼 쓸 수 있지만, 오른손의 집게손가락이 문제였다. 신경이 완전히 끊어져 절단 이야기까지 오갔다. 지금도 그 손에는 거의 감각이 없었다.
“…솔직히 나는… 모르겠어. 내가 윤서우 속에 들어갔다 나온 거 아니니까. 괜찮다고 하는데, 괜찮은 척인지, 진짜 괜찮은 건지 모르겠어. 알고 싶지도 않아.”
무서우니까.
마지막 말을 희주가 삼켰다. 이미 강태윤은 확인을 하러 온 거였다. 자신이 알고 있는 내에서만 희주가 입을 열었다.
아마 어떤 식으로든 결론이 나야 한다고 생각해서다. 은하는 서우에게 제 화풀이를 다 하고 있었고, 강태윤은 한국으로 돌아왔다. 과거의 일을 다시 꺼내고 싶지 않은 건 서우를 위해서다. 결코 두 남매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어긋난 관계를 어떻게든 바로 잡아야 했다.
태윤의 얼굴을 마주하자 희주는 용기가 났다. 여전히 이들에게 약한 윤서우. 이게 관계의 끝이 될지, 시작점이 될지, 혹은 모든 게 어그러질지 제 말의 파장이 어느 정도일지 가늠하지 못한 채 희주가 입을 열었다.
“서우는….”
희망의 끈을 서우는 계속해서 놓지 않았다. 그래도 한 번만 더 수술하면, 괜찮지 않을까. 다시 음악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많이 늦었다고 해도 자신은 독하게 연습할 자신이 있으니까 어떻게든 다시 할 수 있지 않을까. 매일 그런 희망을 한 번씩 붙잡고 절망했다.
그리고 한 손의 손가락 신경이 아마 영원히 그 상태일 거라는 의사의 선고를 들었을 때 서우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다.
물끄러미 제 손을 보면서 차라리 절단 이야기가 오고 갔을 때 깔끔하게 잘랐으면, 조금 더 빨리 포기했을 텐데.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흉터 제거술은 희주의 고집으로 하게 됐다. 완전히 제거할 순 없었지만,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잘 알 수 없다. 그 흉터들을 볼 때마다 서우가 고통을 떠올리게 하고 싶지 않아서다.
그럼에도 완전히 없어지지 않은 흉터로 인해 수술 뒤 화장품으로 가리거나 이제는 제법 자연스럽게 누군가와 인사를 할 땐 악수를 하는 게 아니고야 왼 손바닥으로 오른손 손등을 덮는 게 익숙해졌다.
그리고 윤서우가 병원비 명목으로 취업을 한 뒤 한 달에 일정한 돈을 희주에게 보내기 시작했다.
“걘 내가 무슨 꽃 같은 줄 알거든.”
조용히 희주의 말을 전부 들은 태윤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