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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한 네 동생을 생각해라.”
“어머니를 생각하고, 은하를 생각하고, 그다음엔 또 뭘 생각해야 할지 고민되네요. 윤서우는 여전히 망령에 사로잡혀 있는데.”
“내 딸이 생전에 그렇게 싫어하고 말리려던 일을 그래도 나는 해 주겠다 하지 않아! 그 아이를 다시 만나든, 무엇을 하든 그냥 둔다고 하지 않아!”
죽은 딸은 재능이 뛰어난 윤서우를 외국으로 보내지 않았다. 한국의 대학에 머물게 했다. 그리고 태윤이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면 그때 윤서우를 외국으로 보내 평생 그곳을 떠돌게 할 셈이었다.
길고 긴 시간을 떨어트려 놓으면, 언젠가 마음도 끊어지기 마련이기에.
어린 나이의 스쳐 지나가는 치기 어린 불꽃이라 치부했다. 꺼지지 않는 불꽃도 있다는 사실을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대단한 결심이시네요.”
태윤이 자조적으로 웃으며 주 회장을 바라봤다. 윤서우가 안전한 곳에, 주 회장의 보호 아래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으로 가는 그의 등을 떠밀면서 어머니와 마지막으로 한 약속을 지키라고 종용하는 주 회장에게 윤서우가 무사한지에 대해서만 물어봤다.
그러고도 미국에 가서 믿지 못해 찾아 돌아다니는 제게 주 회장은 완전히 숨겨 버렸다.
그때는 치기 어리고 어렸다.
주 회장의 말대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그의 그늘이 아니라면 버틸 수 없는 기고만장한 도련님이었을까. 윤서우의 눈에 그렇게 보였으니 저를 믿지 못하고 떠났으리라.
그저 머리카락 한 올 보여 줬다면 이렇게 제 마음이 무너지지 않았을 텐데.
태윤의 눈꼬리에 붉은 기가 어렸다. 그가 맑은 하늘을 한 번 올려다봤다. 등을 돌려 걸어 저택에서 걸어 나오며 요즘 며칠 내내 자신을 슬슬 피하는 윤서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야.”
…업무 중에 통화는 곤란합니다.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있는지 딱딱하게 대답하는 윤서우의 목소리를 듣자 웃음이 나왔다. 자신이 상산데 뭐가 그렇게 곤란한지 모르겠다.
서우와 첫 밤을 보내고 난 뒤 따박따박 출근해 아무리 꼬셔도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피하기만 했다.
방금까지 가라앉아 엉망인 기분이 서우의 목소리에 눈 녹듯이 풀렸다.
본사에 들어간다는 태윤으로 인해 비서실에는 세 명의 비서만 있었다. 수행 비서인 김진호가 대문 앞에서 그를 보자 재빨리 뒷좌석을 열어 줬다.
“같이 밥이나 먹을까?”
저녁에 회식이 있어서요.
며칠 피하는 동안 약속했던 회식 날짜가 오늘이란 사실에 그가 웃음을 삼켰다. 헛소리하지 말고 보고 싶으면 저녁에 회식 때나 보자고 돌려 말한 윤서우식 화법을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태윤이 잠시 말을 하지 않자 장소를 옮기는지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 있어?
분명 저는 웃고 있었는데 그녀에겐 그렇게 들리지 않은 모양이다.
그 다정한 물음을 어쩐지 오래 듣고 싶었다.
“다시 말해 줘.”
태윤아.
누군가 들을까 봐 제 이름을 작게 불러서 꼭 바로 귓가에 속삭이듯 들렸다. 태윤이 귀와 어깨 사이에 휴대폰을 끼운 채 고개를 기울였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대답하지 못할 정도로 안온한 기분이 들었다.
주 회장의 말대로 굳이 과거를 헤집지 않고 모른 척 묻어 두고 싶을 정도로.
태윤이 잠시 감았던 눈을 떴다.
“보고 싶어.”
불과 몇 시간 전에 서우를 봤어도 내내 보고 싶었다. 천연덕스러운 태윤의 말에 너머의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할지 망설이는 기색이 느껴졌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서우가 불규칙하게 내쉬는 숨까지 태윤은 알 수 있었다.
탕비실에서 전화를 받았는지 밖에서 서우를 부르는 소리에 또다시 허둥대는 소리가 들려 태윤의 눈가가 부드럽게 휜다.
이따 회식 때 봐.
“그래. 그때라도 나 봐 주면 좋고.”
그의 농담에 픽, 하고 웃는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곧 전화가 먼저 끊겼다. 그새 뜨끈해진 휴대폰을 들고 태윤이 무릎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어디로 모실까요.”
그가 잠시 저택에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윤서우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이곳을 드나든단 사실을 알고 있었다. 태윤은 여기에 머무르는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걸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수행 비서인 김진호였다.
통화 중 그렇게 달콤하게 말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무심한 얼굴이 생각에 잠겨 있다.
백미러로 그런 태윤을 김진호가 힐끗 바라봤다.
“좋은 사람 같던데.”
그와 함께 유학 생활을 했던 김진호가 말했다. 모를 수가 없다. 강태윤은 시간이 날 때마다 윤서우의 흔적을 찾아다녔으니까.
“너무 좋아서 문제지.”
한 손으로 피곤한 얼굴을 문지르며 답하는 태윤의 목소리가 싸늘하다. 잠시 생각에 잠긴 그가 이내 목적지를 입에 올렸다.
***
솔음 문화 재단에서 운영하는 그린 스퀘어는 국립으로 운영하는 예술 재단보다 공연이나, 국내외 유명 아티스트를 섭외하는 면에서 뛰어나다고 입소문이 나 있었다.
얼마 전부터 솔음 재단의 목표가 클래식의 대중화였기에 최근 2년 이내엔 유독 클래식 공연이 많았다.
그린 스퀘어에 도착할 때쯤, 여기저기 붙어 있는 커다란 포스터엔 피아노 앞에 눈을 감고 앉아 있는 주지형의 얼굴이 가장 크게 클로즈업되어 도배돼 있었다.
유럽에서 가장 사랑받는 피아니스트, 주지형.
국내 공연보다 유럽에서 하는 공연들이 월등히 많은 그를 그린 스퀘어에서 섭외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 진위는 곧 밝혀졌다.
실력을 인정받은 뒤로 유럽이나 미주 공연만 다니던 천재 피아니스트,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뒤로는 그 명성이 높아져 그를 한국에서 볼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런 주지형이 그린 스퀘어에서 공연을 한다는 광고가 오늘부터 대대적으로 들어간 참이었다.
뒤로는 그의 든든한 백그라운드가 되어 주는 재벌집 도련님이 돈으로 상을 수상했다는 오명도 함께 따라다녔으나 주지형은 더러운 소문에는 신경 쓰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태윤의 시선이 거대한 포스터에 가 닿았다.
얼핏 보면 놀랍도록 그와 비슷하게 닮아 있는 모양새였다. 실제로 한 살 차이인 그들이 함께 학교에 다닐 때 사람들은 종종 둘을 헷갈려 했다.
지금이야 선이 뚜렷해져 그런 오해는 거의 없지만, 피아노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주지형과 아직도 음악을 그만둔 강태윤을 종종 이야기한다.
“지형이 한국 오나 보네.”
미국에서 공연이 있을 때 주지형의 팬이라며 김진호가 쫓아가서 보는 통에 태윤도 오랜만에 사촌을 만났다. 그때 제법 둘은 친해졌지만 정작 사촌인 태윤은 그와 데면데면했던 걸 김진호가 기억해 냈다.
턱을 괸 채 무의미하게 바깥을 보던 태윤이 이내 차가 오피스동에서 멈추자 천천히 내렸다.
“누구 찾아오셨어요?”
1층 데스크에서 몸에 맞춘 슈트를 입고 약속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느른하게 들어와 멀끔한 얼굴로 서 있는 태윤에게 안내하는 사람이 묻자 그가 이름 하나를 댔다.
“박희주 문화 기획 실장 만나러 왔습니다.”
“약속은 돼 있으신가요?”
“강태윤이 왔다고 전해 주시면 됩니다.”
당당한 태도에 직원이 잠시 당황했다. 이내 위로 전화를 걸자 그가 더 두고 볼 것도 없다는 얼굴로 로비의 소파에 가서 긴 다리를 꼬고 앉았다. 오피스동에도 주지형의 얼굴이 군데군데 붙어 있었다.
차를 주차하고 곧장 지하를 통해 올라온 김진호가 태윤의 옆에 앉았을 때 누군가 엘리베이터로 내려왔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난데없는 태윤의 방문에 희주가 기가 차서 물었다. 몇 번 만나자는 그의 제안을 고의적으로 거절했는데 이렇게 회사까지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다.
“그냥. 오랜만에 얼굴이나 볼까 해서.”
“퍽이나.”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일부러 시간 내서 얼굴 볼 사이는 더더욱 아니고. 독선적인 태윤의 성격을 희주는 아주 질색했다.
어딘가 의뭉스러웠다. 사촌에 비슷한 얼굴이라고 해도 제 감정에 솔직하다 못해 드러내 놓고 다니는 주지형과 의뭉스러운 얼굴로 표정 없는 강태윤은 전혀 딴판이었다.
분명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로비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리라.
그렇게 판단한 희주는 벌써 머리가 아파 오는 걸 느꼈다. 서우에게 이걸 지금 말해 줘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강태윤이 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우리 사이에 오갈 이야기에서 윤서우는 안 끼었으면 하는데.”
우리 사이라고 할 만한 일도 없었다. 자신과 강태윤 사이의 접점은 전혀 없어서 희주가 한숨을 폭 내쉰 채 그에게 손짓했다.
“내 사무실이 제일 조용해. 거기로 가자.”
진작 그렇게 하지, 하는 표정으로 태윤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