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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발자국 (34)화 (3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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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119 기록과 그때 당시 출동했던 구급대원들의 신상 등이 담겨 있었다. 몇 번을 보고 확인했다.

어머니의 장례식이 끝난 뒤 그가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기 전에 기록이 삭제됐다. 출동했던 구급대원들은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났고, 전부 하나같이 불편한 침묵을 지켰다.

고작 교통사고 하나에 모두가 입을 다문 이유는 무엇일까.

기록이 삭제된 시기도 중요했다. EA의 고명딸이 사고로 죽었다. 그 기록을 삭제시킬 수 있는 건, 단 한 명뿐이다. 자신을 미국으로 보내고, 윤서우의 존재를 지워 버릴 수 있는 사람.

7년이란 세월을 한 사람을 찾는 데 보내다 보면 불편한 사실들을 알게 되기 마련이다.

태윤은 제 퍼즐이 거진 맞춰졌음을 깨달았다.

서우를 보면서 내내 들떠 있던 눈이 급격하게 가라앉는다. 누구를 위한 길인지 알 수 없다. 윤서우가 몸을 말고 영영 도망가 버릴까 싶어서 다그칠 수 없었다.

“가족 놀이를 하고 싶은 거라면 맞춰 줄게.”

윤서우의 헌신이 버겁다.

그게 그녀를 짓누르는 것 같아서. 여전히 제 어머니가 윤서우의 목줄을 쥐고 흔드는 것 같아 가끔 토악질이 치밀었다.

어린 날 부모의 기억조차 희미할 때 잃고, 내내 할머니와 살면서 따돌림을 당한 아이.

그러면서도 타인을 위로할 줄 알던 아이의 콧노래가 여전히 태윤의 마음을 아리게 했다.

언젠가는 뒤집어 까서 밝히더라도 서우의 상처를 후벼 파서 거기에 소금을 뿌려 찢어지게 하더라도 지금은 그저 곁에 곱게 두고만 싶었다.

그럴수록 자신이 겪은 서우의 공간이 공허해서, 꼭 아무런 미련이 없어 보여 태윤은 못내 그게 마음에 걸렸다.


 

***


 

주철원 회장이 오랜만에 아내와 함께 정원으로 나왔다. 그동안은 날이 너무 더워 추위나 더위를 제대로 말하지 않는 아내로 인해 의도적으로 바깥 외출을 삼갔었다.

멍하게 초점 없는 주철원 회장의 아내, 오영희의 눈은 오늘도 허공을 헤맸다.

“태윤이 녀석도 나가고 당신이 적적해서 어떻게 하누.”

주철원의 주름진 손이 아내의 뺨을 매만진다.

치매가 왔다. 딸아이가 죽은 뒤 온 치매는 빠르게 아내의 기억을 먹어 치웠다. 아내의 기억은 딸이 유학 갔을 시절에 멈추어 있었다. 가끔 정신이 돌아오면 이미 먼저 간 딸아이는 어느 나라에 있느냐고 물어본다.

“허허, 이럴 줄 알았으면 하영이에게 회사를 물려줄 걸 그랬어. 그렇지, 여보?”

죽은 딸인 주하영은 욕심이 많았다. 제 오빠를 넘어서려고 어릴 때부터 기를 썼는데 그에 비해 아들이 더 뛰어났다.

당연히 딸이 더 뛰어났다면 결과는 달랐으리라. 질투가 많았던 아이는 제 오라비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둘 모두 사랑했기에 아낌없는 지지를 하고 모든 선택을 존중해 줬다.

천애 고아인, 할 줄 아는 건 피아노를 치는 재능뿐인 사위와의 결혼을 허락한 것도 그래서다.

주하영은 갖고 싶은 건 무슨 수를 써서든 가져야 했고 충족해야 사는 아이였다.

그게 전부를 망쳤다. 사위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딸아이를 말렸어야 했다.

“…….”

“그랬다면 좀 달라졌을까. 허허허.”

주철원이 허허롭게 웃었다. 갖고 싶은 걸 전부 쥐여 줘도 갖지 못한 남은 그 하나마저 쥐겠다고 발버둥을 쳤던 딸은 이제 이 세상에 없다.

딸이 마지막으로 갖고 싶었던 건 그녀의 아들인 강태윤이 EA를 물려받는 것이었다.

아들이자 부회장인 주영석에겐 예술을 하겠다고 젊은 날의 제 고모처럼 온 유럽 천지를 돌아다니는 자식만 하나 있어서 딸의 소원을 늦게라도 들어주려 했다. 그것조차 자살한 사위의 뒤를 이어 음악을 하던 손자인 강태윤이 동의해야 가능한 말이었지만.

강태윤은 언제 음악을 했냐는 듯 순순히 포기하고 딸의 말을 따랐다.

그녀의 바람대로 미국으로 가 학위를 따고, 회사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모든 게 순조롭다고 자만하는 순간, 제 자식이 죽었다.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넜다.

“그게 후회가 돼서. 늙으면 별생각을 다 한다니까. 그렇지 않소?”

여전히 아내에게선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자식을 먼저 보내 놓고 무슨 낯이 있겠는가. 주태원은 모든 게 허무해졌다. 그때, 정원의 끝에서 훤칠하게 큰 누군가가 걸어왔다.

죽은 딸보다 먼저 간 사위를 더 닮은 얼굴이었다. 서늘한 눈매 안쪽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 없는 눈이 도사리고 있다.

가까이 다가온 강태윤이 반듯하게 허리를 숙였다.

가족에게 하는 인사라곤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타인, 그보다 한참 윗사람을 대하는 깍듯한 태도에 주태원이 침음을 삼켰다.

“그래, 태윤이 왔나.”

유학을 끝내고 잠깐 별채에 살았는데 그마저도 곧 짐을 싸서 나갔다.

누구 뒤를 쫓아 나갔는지 알고 있는 주태원이 잠시 닮은 곳 없어도 제 어미와 똑 닮은 태윤을 응시했다.

“회장님.”

딸이 죽고 태윤의 입에서 저를 외할아버지라고 부르는 말을 들은 지도 오래됐다.

“그래.”

뭔가를 말하려던 태윤의 시선이 멍하니 앞을 보고 있는 오영희를 향했다. 치매에 걸려 제정신이 아니라 해도 그녀가 들어선 안 되는 말이라는 걸 아는 주 회장이 뒤를 손짓해 멀리 떨어져 주시하고 있는 황 집사를 불렀다.

“잠깐 걷자.”

점점 죽을 날이 가까워져 허리가 굽은 저와 훤칠하게 커서 이제는 더 이상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다 큰 태윤이 나란히 걸었다.

무얼 물어보러 왔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가물가물한 시선으로 주 회장이 앞을 본다.

“그 애는 잘 있고?”

주 회장의 기억 속 윤서우는 항상 젖은 채 바들바들 떨던 어린 계집아이였다. 분노에 차서 소리치는 그에게 무작정 빌었던 아이. 그 이후 몇 번 만나도 여전히 그때의 모습을 떨치기 힘들었다.

여전히 윤서우, 그 아이는 빗속을 헤맨다.

자신이 여즉 딸이 죽은 비가 몰아치던 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잘 있냐는 자신의 말에 태윤의 얼굴에서 한기가 스쳤다.

“살아만 있는 걸 물으시는 거면, 잘 있습니다.”

잇새를 무는 듯한 대답이었다. 자신이 치매에 걸린 아내를 위해 연주를 해 달라 그 아이를 다시 찾았을 때 망가진 손으로 덜덜 떨던 걸 기억했다.

죄책감에 휩싸인 얼굴로 그렇게 하겠다는 아이를 겨우 붙들어 이곳에 붙여 놨다.

뭐가 옳고 그른 것인지, 오랜 세월을 살아오고 수많은 정적들과 수를 겨뤘음에도 주 회장은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에 정답이란 없다.

“그래. 살아만 있으면 됐지.”

“윤서우가 그때 사고로 잘못된 거라면-”

“잘못됐으면? 내 딸은 죽고, 내 손녀는 다리를 잃을 뻔했는데. 타인인 그 애가 내 눈에 들어왔을 것 같으냐?”

주 회장에게 윤서우는 그저 타인이었다. 제 딸을 죽음으로 몰고, 손녀까지 잃게 할 뻔한 굴러들어 온 재앙이라고 여겼다. 그때의 일이 기억나는 사람처럼 격해진 주 회장의 목소리에 태윤이 침묵했다.

나이 든 주 회장을 바라보는 고요한 얼굴에는 표정이 없다.

“네가 그때 뭘 할 수 있었을지 생각해 봐라. 이제 갓 20살 된 네가 내 보호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텐데.”

“…적어도 내게는 더 이상 쓸모없어진 손가락들을 모조리 부러트려서라도 옆에 있었겠죠.”

태윤은 자의로 음악을 포기했다. 거기에 미련도 후회도 없었다. 애초에 어머니의 기대에 적당히 맞추고, 무엇보다 연주를 하는 윤서우가 예뻐서 따라갔던 것뿐이니까.

음악이 아닌 다른 길로 가길 원하는 욕망에 찬 어머니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학위를 따고 얌전히 한국으로 돌아와 주 회장의 아래로 들어간다면, 윤서우에게 드리워진 어머니의 그늘을 거두는 것. 그의 조건은 그거 하나였다.

자의로 음악을 그만둔 자신과 타의로 손이 망가진 채 음악을 그만둔 윤서우는 달랐다.

어떤 감정이었을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태윤은 그게 두려웠다. 적어도 숨어 버린 윤서우를 다시 찾았다면 제 손가락을 하나씩 부러트려서라도 그녀에게 위안을 줬을 텐데.

“네 이놈! 그게 이 할애비에게 할 소리냐!”

결국엔 누구의 잘못도 아닌 걸 알면서도 주 회장은 윤서우를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알고 보면 가여운 아이란 걸, 제 딸의 비위를 맞추면서 전전긍긍한 불쌍한 아이란 걸 알면서 내쳤다.

그에겐 딸이 남긴 손자와 손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갓 20살이 된 애한테 그렇게 겁을 줘 쫓아내니 마음이 편안하셨습니까.”

기껏해야 제 손자와 같은 나이였다. 주 회장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네놈은 그래도 나를 이해해야지.”

“어머니가 누구에게 배워 그렇게 독선적인가 했더니 똑같네요. 사람에게 어떻게 짐을 지우는지 잘 알고 계셔서 조금 우습기도 하고요.”

서우의 어깨에 짊어진 짐은 자신과 은하였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주 회장도, 윤서우도 전부 저와 은하를 지키기 위해 한 선택이라는 것이다. 태윤의 의심은 확신으로 굳어졌다. 아니라고 머리로 부정하면서 진실을 향해 한 발짝씩 다가갔다.

은혜도 모르는 윤서우.

그의 입에서 이가 부딪쳐 갈리는 소리가 났다.

그날이, 모든 걸 앗아 갔다. 윤서우에게 꿈을, 여동생에겐 어머닐, 그리고 자신에겐 희망을.

“입 다물고 있어. 뭘 알아도 입 밖으로 꺼내지 말고. 네가 누굴 다시 만나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

주 회장에게도 마지막 마음의 짐이란 게 있었다.

그래서 결국 제 딸이 그토록 강태윤에게서 떨어트려 놓고 싶어 했던 윤서우를 이곳으로 불러들였다. 과거를 묻고, 새로 시작하려면 하라는, 보이는 의도를 분명하게 가졌다.

“과거를 덮어 두고, 현재를 살라. 그 말씀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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