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발자국 (33)화 (3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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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보면 다른 회사에 다니는 줄 알겠다.

상사가 제 집 침대에 누워서 자고 있는데 비서인 윤서우만 출근했다. 어제 그렇게 힘들다고 울면서 먼저 잘 땐 언제고 기가 막히게 저를 깨우지 않고 출근한 윤서우를 도대체 종잡을 수 없어서 태윤이 포스트잇 끝을 만지작거렸다.

오늘 쉬라고 했는데도 출근한 윤서우.

윤서우는 출근했는데 정작 회사에 나가야 할 그가 나오지 않자 김진호가 전화를 몇 통이나 했는지, 다시 울리기 시작하는 휴대폰을 태윤이 노려봤다.

“그래.”

아니, 집에도 없고 어디신데 연락도 없이 안 오십니까?

안 오냐고 한바탕하려다 주변에 누군가 있는지 애써 말을 높이며 화를 삭이는 김진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우의 작은 책장에서 클래식 관련된 공연을 모아 놓은 걸 물끄러미 보던 태윤이 대답했다.

“윤서우는 출근했어?”

그럼요. 오늘 그런데 쉰다고 안 했어요? 제일 먼저 출근해서 앉아 있던데요?

“아하.”

출근을 하다못해 새벽 일찍 제일 먼저 출근했다는 말에 태윤의 입가가 비틀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늦게까지 놓아주지 않을 걸 그랬다.

그래서 언제….

“12시 안에 가.”

대체 무슨 일이길래….

“집안일.”

태윤의 단답에 결국 김진호가 뭐라고 하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귀에서 휴대폰을 떼고 그대로 끊었다. 그래도 지금은 일어나 다행히 점심 전엔 회사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태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쉬운 얼굴로 윤서우의 집 안을 훑는 눈빛이 유하게 풀어진 채였다.


 

***


 

집으로 돌아가 출근 준비를 빠르게 마치고 회사에 도착했을 땐 12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하자 이미 비서실 사람들은 점심시간이라 나가 있었고, 김진호도 보이지 않았다. 한 명은 남아 있을 텐데 텅 빈 비서실을 보면서 태윤이 저도 모르게 윤서우의 자리를 훑었다.

그때 탕비실 문이 열리고 손에 얼음 잔을 든 윤서우가 나오다가 그를 발견하고 잠시 굳는다.

“오… 셨어요?”

아무도 없는데 애매하게 말을 높이는 그녀를 보면서 태윤이 본부장실로 따라 들어오라고 손짓을 남긴 뒤 먼저 들어갔다. 재킷을 벗어 걸어 놓자마자 서우가 뒤따라 열린 본부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책상 건너편 제 의자에 앉아서 피곤하지만 어쩐지 개운한 몸을 등받이에 깊숙하게 묻고 그가 고개를 모로 기울인 채 윤서우를 바라봤다.

무표정한 얼굴은 피곤해 보이긴 한데, 어젯밤 몸을 섞었던 사이라는 걸 알 수 없을 정도로 냉랭하다시피 했다.

“오늘 쉬라니까.”

서우의 얼굴이 아니라 그녀가 나란히 앞으로 모은 가지런한 두 손이 마주 잡히는 걸 보면서 표정과 다르게 동요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태윤의 입가에 느린 미소가 어렸다.

“별로 몸이 좋지 않은 것도 아니라서….”

“그래서. 나 안 깨우고 혼자 출근한 거야? 서운한데.”

“깨웠어.”

“윤 비서님, 나 서운해요.”

저건 반칙이었다. 사적인 얼굴로 묘하게 웃으면서 그런 말을 하는 태윤을 서우가 경악스럽게 바라봤다.

전부 점심을 먹으러 가서 다행이지, 누가 들었다면 생각도 하기 싫었다.

“분명히, 일어나라고 했어.”

“얼마나 큰 소리로? 뭐라고 했는데? 내가 잠귀가 어두운 편이 아니라서 못 들었을 리 없어. 특히 네 목소리는.”

“‘태윤아, 일어나.’라고 두 번 부르고 그냥 자길래 오늘 출근은 네가 안 하는 줄 알았지.”

비서실 사람들도 연락도 없이 늦은 태윤을 두고 어제 그렇게 험한 일을 겪었으니 힘들 만도 하다고 했다.

귀하게 곱게만 자란 본부장이 창고에 갇혀서 얼마나 놀랐을까 하고 걱정하는 걸 김진호가 이상한 얼굴로 할 말을 잃은 채 한숨만 내쉬었다.

“출근을 할 거면 같이 했어야지. 같이 자 놓고 일어날 땐 혼자인 거, 버림받는 기분이라 싫어.”

“회사에선 사적인 이야기 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태윤의 말에 이렇게 벽을 치기라도 작정했는지 서우가 말을 높이며 딱 잘랐다. 그가 손으로 톡톡 책상 위를 두드리다 이내 말했다.

“그럼 가까이 와 봐.”

서우가 눈을 크게 뜨고 쉽게 걸음을 떼지 못했다. 태윤이 상냥하게 다시 묻는다.

“그럼 내가 갈까?”

뭘 계산해도 답이 나오지 않을 텐데, 잠시 고민하던 서우가 책상 앞까지 다가가자 돌아서 오라고 덧붙였다.

결국 돌아서 태윤의 앞에 섰을 때 그가 서우의 손목을 가볍게 끌었다. 저는 일어나면서 동시에 제 자리에 그녀를 앉힌다.

“아!”

푹신한 의자에 놀라서 다시 일어나려는 그녀를 제대로 앉히고 그가 책상에 걸터앉았다.

자신보다 눈높이가 높아진 태윤을 보면서 곤란한 얼굴로 서우가 입을 열었다.

“곧 점심 먹고 사람들 돌아올 거야.”

“손은? 괜찮아? 얼음찜질하려던 거 아냐?”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게 많을까. 체념한 얼굴로 서우가 훤하게 제 마음을 읽고 있는 강태윤을 포기한 채 바라봤다.

그녀의 오른손을 가지고 가 손바닥을 뒤집는다. 환한 곳에서 보자 희미해진 흉터들이 더 잘 보였다.

꾹꾹, 압을 조절해서 태윤이 서우의 손을 눌렀다.

“아픈 건 아니라 괜찮아. 평소에도 잘 풀어 놓으면 정상인처럼 생활할 수 있어.”

정상인처럼, 이라는 말에 태윤의 미간이 잠시 좁혀졌다. 이내 입을 다물고 서우의 손을 조심스럽게 눌렀다.

어떤 사고였냐고 당연히 물을 만한데 강태윤은 묻지 않는다. 이럴 때마다 이상하게 불안하고 초조해졌다. 제 입으로 말하기엔 아직 버거웠다. 그렇다고 강태윤이 알아주길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불가피한 사고였다고 여기길 바랄 뿐이다.

간밤의 이야길 어떻게 꺼내야 할지 망설였다. 되도록 그냥 한번 충동질해 일어난 일이라고 하고 싶은데 강태윤은 이렇게 서슴없이 다가와 있었다.

푹신한 의자에 앉은 채로 굳어진 얼굴을 하고선 제 손바닥만 보고 있는 그의 얼굴을 봤다.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다.

학교 다닐 때부터 잘생겼던 강태윤은 나이를 먹자 거기에 성숙을 더해 누가 봐도 다시 돌아볼 만한 사람이 됐다.

서우의 손을 주무르다 이내 그가 그 손을 좀 더 제 쪽으로 가져갔다. 그러다 태윤의 다리 사이, 부풀어 오른 곳에 닿는다. 깜짝 놀라서 주먹을 꽉 쥐었다.

“강태윤!”

“네가 그렇게 봐서 그래. 왜? 자고 나니까 새삼 괜찮아 보여?”

“너 진짜….”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서우의 움직임이 딱 멎는다. 태윤은 태연하게 문 쪽을 바라봤고 뒤늦게 그녀가 벌떡 일어나 허우적거렸다. 그의 손이 그대로 서우의 어깨를 밀어 다시 앉혔다.

대답하지 않았는데 문이 열리고 손에 태윤이 전에 부탁했던 자료들을 들고 들어오던 김진호가 그대로 멎었다.

어정쩡한 얼굴로 서우와 태윤을 번갈아 바라본다.

“대답이 없으면 멋대로 들어오질 말든가.”

“…아직 안 오신 줄 알고 놓고 나가려고 들어왔죠.”

한마디도 지지 않고 김진호가 받아쳤다. 이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가와 책상 위에 자료를 올려놓았다.

그리곤 태윤의 자리에 앉아 있는 서우에게 싱긋 웃어 보인다. 이미 왜 태윤이 늦었는지 이 미묘한 기류 사이로 깨달은 얼굴이었다.

“윤 비서님, 책상에 샌드위치랑 마실 거 사다 놨어요.”

“그걸 왜 네가 챙겨.”

서우가 점심을 거르고 남아서 비서실을 지키겠다고 하자 사다 놓은 건데 그걸 굳이 태윤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배고플까 봐요. 윤 비서님 눈을 보세요, 눈을. 어제 얼마나 놀랐는지 피곤해하는 눈인데. 이런 피곤한 사람도 아침에 가장 먼저 출근을 한 마당에 본부장님은… 이만 줄이겠습니다.”

절대 사심은 아니라고 한 번 더 강조해도 태윤의 눈이 풀어지지 않자 김진호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이면서 뒷걸음질로 나갔다.

“나도 나가 볼게.”

김 비서가 돌아왔다면, 슬슬 다른 비서실 사람들도 올 시간이 됐다.

“힘들면 말해.”

출근도 했는데 절대 힘들다고 말 안 할 서우의 성격을 알았지만, 태윤이 덧붙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걸 대답 대신 듣고 나서야 겨우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게 해 준다.

서우가 나간 뒤, 김진호가 가지고 왔던 자료에 잠시 그의 시선이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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