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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윤의 어깨 너머를 보자 그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비스듬히 그녀를 보면서 느리게 미소짓고 등을 돌렸다.
“…고마워.”
“서우야, 하나만 물어볼게.”
겁부터 덜컥 났다. 돌아서서 나가려던 태윤이 다시 저를 보자 신발을 신은 채 방 안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가 물으려던 말이 자신이 피할 수 없는 질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뭘 벌써부터 겁을 먹고 그래.”
서우의 그런 행동에 태윤이 여전히 웃는 낯을 거두지 않고 말했다. 그가 스스로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쓱 쓸어 본다.
꼭 표적을 따라가듯 서우가 매끄러운 태윤의 입술을, 그 손가락을 눈으로 좇았다.
“내가 창고에 갇혔을 때 날 걱정해서 온 거지? 내가 무서워하기라도 할까 봐?”
“응….”
“그럼 그 마음만 가지고 있어. 나만 걱정해. 그 작은 머리로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고.”
“무슨 소리야.”
“그러다 머리 터지겠다, 서우야. 머리 굴리지 말고, 나만 예뻐하고, 나만 걱정하라고. 너 없으면 내가 얼마나 무서워할지, 얼마나 겁쟁이처럼 굴지. 그것만 생각해.”
그녀의 머릿속이 저로 가득 찼으면 좋겠다. 어머니의 망령에 휘둘리는 게 아니라 오로지 제 걱정에만 휘둘리게 하고 싶었다. 창고에서 앞뒤 상황을 재지도 못하고 무조건 저를 향해 달려온 윤서우를 보고 깨달았다.
자신은 절대 윤서우를 포기하지 못하겠구나.
“무서워하지도 않으면서.”
“…너는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 리가 없지.”
윤서우가 모두와 연락을 끊고 혼자서 잠들지도 못 할까 봐 주지형이 가지고 있는, 서우가 마지막으로 보냈다는 동영상을 올리라고 멱살을 잡았던 것도 모르리라.
어딘가에 있을 그녀가 또다시 불면의 밤 속에서 잠들지 못하고 헤맬까 봐.
서우가 시선을 떨어트렸다.
태윤이 잘 자라는 인사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나도. 나도 무서웠어.”
이미 그가 떠나고 닫힌 문을 보면서 서우가 대답했다.
그런데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는걸.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자신이 미련스럽다는 걸 안다. 하지만, 선생님을 떠나서 그냥 모든 게 두려웠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시절엔 모르는 만큼 무모할 수 있었다.
자신을 후원해 준 이 가족을 위해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돼야지. 꼭 성공하겠다는 생각으로 충만했을 때가 분명히 존재했다.
그때의 찬란함과 재능이 없어진 지금은 모르겠다. 자신이 여전히 태윤과 은하의 주변을 맴돌아도 될지. 길을 잃어버린 채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다.
서우의 손이 태윤이 열고 나간 문고리를 잡았다. 가만히 매만져 보고선 끝내 열지 못하고 뒤돌아섰다.
열면, 그를 부르고 싶어질 게 분명했다.
***
어쩐지 한없이 피곤한 몸으로 씻고 나오자 그제야 어깨나 갑자기 뛰어 고생했던 허벅지, 다리 등이 아파 왔다.
불을 끄고 가만히 눈을 감았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아마 태윤의 집에서 옮겨지는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자서 그런 모양이었다.
좁은 방 안에 가만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자 어쩐지 속이 답답해져 왔다.
내내 체기가 목 위까지 차고앉아 어떻게 누워도 불편했다. 동네나 한 바퀴 걸어 볼까 싶어서 서우가 자리에 앉았다. 말리지 않은 머리카락에서 물기가 배어 나온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황량한 방을 뒤로하고 문을 열었다.
“…강태윤?”
네가 왜 여기 있어?
그 물음은 태윤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다했다. 평상에 앉아 느른하게 두 팔을 뒤로 뻗어 상체를 기대고 있었다. 하늘을 보며 당겨져 있던 턱 끝이 서우의 부름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냥. 가끔 이상한 사람 돌아다닌다며.”
돌아다닌다고 했지 봤다고는 한 적 없다. 그런 자잘한 말까지 기억하는 그를 보며 서우가 당황했다. 여러모로 강태윤이 안 하던 짓을 하자, 어떻게 일일이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안 피곤해? 빨리 집에 가.”
“어차피 내 집에서 잤으면 너 좋아하는 피아노나 밤새 쳐 주려고 했어. 그런데 네가 여기 있으니까 아무래도 상관없어.”
밤새 피아노를 쳐 주겠다는 제안에 마음이 흔들렸다.
오늘 많은 일을 겪은 자신에게 이상한 놈까지 들러붙을까 봐 그냥 가만히 평상에 앉아 밤을 지새우려 했다는 이야기를 다정한 낯으로 말하니 어찌할지 몰라 몸이 가볍게 떨렸다.
“너 진짜….”
“나는 뒤 같은 거 안 돌아봐. 내가 너무 오래 참았거든.”
윤서우를 나락으로 끌고 들어갈 수 있는 어머니에게서 너무 오래 참았다. 눈에 보이기 시작했는데 자꾸 어떤 핑계를 대서든 치대고 싶은 게 당연했다. 어차피 제 인생은 평생 누군가의 손에 좌우된다. 그렇다면 하나쯤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고 싶었다.
“밤새 이러고 있으려 했어?”
서우의 물음에 그가 입꼬리를 올렸다. 대답 없는 대답을 듣고 기가 차서 커다란 숨이 토해졌다.
“강태윤, 왜 이렇게 사람을 곤란하게 해.”
“나를 의식한다는 소리니까 그건 그거대로 나쁘지 않고.”
잠이 오지 않았던 건, 어쩌면 밖으로 나올 핑계가 필요해서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상황이 믿을 수 없었다. 꼭 문 너머에서 자신이 그를 부르고 싶었던 망설임을 들킨 것 같았다.
불러서 뭘 어쩌려고.
이렇게 늦은 시간에 강태윤을 불러 봤자 할 말이 없는데.
그런데 미친 듯이 달았다. 그가 내뱉는 거침없는 말이, 그리고 닿았던 입술이 달아서 다시 잠들 수가 없었다.
구름 아래 가리웠던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로등 불빛도 미처 닿지 않는 옥탑 꼭대기에서 태윤이 요요롭게 웃었다.
“서우야, 물 먹고 가도 돼?”
물만 먹을 자신이 없다며 거절하던 그의 입에서 젖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홀릴 듯이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일까 봐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런데 텅 빈 건조대에 그가 입고 왔었던 카디건이 걸려 있는 걸 보고야 말았다.
이상한 사람이 올까 봐 남자가 산다고 하려고 걸어 놨던 옷의 자리가 빈 걸 보고 제 옷을 벗어 놓았다.
그래, 평상에 앉아 있던 강태윤은 흰 반팔 차림이었다.
그의 나머지 옷이 제 눈앞에 있었다.
마음 가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처음으로 충동이 일어났다. 걷잡을 수 없는 들불처럼 가슴에 불이 지펴졌다. 그 옷을 본 순간, 자신이 흘려서 한 말 하나까지 주워 먹고 있는 강태윤에게 충동질이 시작됐다.
“들어와.”
적막한 그의 눈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서우가 태윤을 바로 보며 말하자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잠시 밤바람에 날린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쓸어 넘겼다.
비스듬히 서우를 보며 곧장 그 네다섯 걸음 남짓을 한달음에 걸어온다. 마지막 걸음과 동시에 태윤이 셔츠를 벗어 그대로 건조대 위로 던졌다.
그리고 곧장 그의 맨몸과 서우의 몸이 부딪쳤다. 뒷걸음질 치는 그녀를 그대로 좁은 방 안으로 다시 밀어 넣는다.
“읏!”
밀려나며 기우뚱 뒤로 넘어지려는 서우의 허리를 단단하게 태윤이 붙잡았다.
가슴팍에 폭 안기면서 얼굴이 곧장 부드럽고 탄탄한 그의 살갗에 비벼졌다. 살갗의 체향이 평소 뿌리는 향수 냄새와 어우러져 배어 있어서 말도 못 하게 좋았다.
깊은 타바코 향과 함께 시더우드 냄새가 그대로 숨을 쉴 때마다 깊숙이 제 코 안쪽을 찔렀다.
모를 리 없다.
강태윤에게 계속 나던 향기였다.
이 씁쓸한 향이 서늘하게 생긴 그와 잘 어울렸다. 자신도 모르게 코를 박은 채 계속 숨을 몰아쉬자 태윤이 날카롭게 웃는 기색이 느껴졌다.
“서우야, 고개 들어야지.”
내가 널 어떻게 보고 있는지, 눈으로 확인해야지.
태윤이 목소리가 꼭 짐승의 그것처럼 낮게 울린다.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박고 있는 서우의 턱을 들어 올려 저를 보게 만들었다.
꼭 울 것 같은 눈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윤서우는 가만히 있어도 눈가가 항상 젖어 있어서 가끔 우는 걸로 보였다.
울리지 않아도 울고 있는 눈.
태윤의 입술이 숨과 함께 그녀의 미간에 내려앉았다.
“태….”
서우가 그를 부르려 입술을 열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더 깊숙하게 그녀를 끌어안고 그가 입을 맞춘다.
달고 따뜻했다. 타액을 훑어 숨과 함께 침을 삼킬 때마다 갈증이 밀려들었다. 오갈 데 없이 그를 끌어안지도 못하고 몸을 내맡기고 있는 서우의 손을 잡아 목 뒤로 두르게 했다.
그대로 서우의 허리를 들어 올려 엉덩이를 받치고 태윤이 힘든 기색도 없이 원룸을 가로질렀다.
매트리스만 덩그러니 있는 삭막한 그곳에 서우를 내려놓았다.
바닥에 앉은 채로 그녀의 무릎 사이에 제 몸을 끼워 넣는다. 손에 닿는 태윤의 체온이 뜨거워서 숨이 탁하게 흘러나왔다. 자신이 들어오라는 한마디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어둠 속에서 가만히 응시했다.
처음 보는 사람처럼, 강태윤이 낯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