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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발자국 (29)화 (2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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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머리카락 위를 조금 쓰다듬어 놓고 태윤이 한숨과 함께 주방 쪽으로 향했다.

괜히 이상한 기분이 들어 서우가 그가 스친 머리카락 위를 쓰다듬어 본다. 단단해 보이는 뒷모습이 쇼핑백 안에서 죽을 꺼내 데우는 걸 보면서 이내 현관 쪽에 이 집과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게 눈에 들어왔다.

작은 빨래 건조대에 여자 옷이 걸려 있었다.

어디선가 많이 본 옷이다. 자신이 전에 드라이해 두고 아침에 태윤에게 줬던 옷을 여기서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이걸 왜 널어 놨어?”

쇼핑백에 있던 옷을 굳이 널어 놓은 거다. 이 큰 집에 건조기 하나 없을 리 없는데 이 건조대는 어디서 나온 건지 궁금했다.

“그냥. 네 옷을 걸어 두고 싶었어.”

자신이 남자 옷을 집 앞 건조대에 걸어 놓았던 것처럼.

서우가 자신도 모르게 탁하게 숨을 내쉬었다.

“…너 진짜 변태 같아.”

“알면 됐고.”

변태라는 말로는 그에게 어떤 타격도 주지 않는 것 같다. 서우가 괜히 자기가 부끄러워서 건조대에 가서 옷을 걷었다.

“남자 혼자 사는 집에 이걸 왜 걸어 놔.”

“음. 김진호도 똑같은 소릴 하던데. 건조대 가져오라고 하니까 변태냐는 소리는 이미 들었어.”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로 태윤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심지어 건조대는 김 비서의 것이었냐고 서우가 머리를 짚었다.

혼자 사는 남자 집에 여자 옷이 걸려 있으면 퍽이나 오해할 만한데 정작 본인은 만족스러운 모양이다.

“김 비서님한테 다시 돌려줘.”

“괜찮아. 대신 건조기 사 달래서 사 줬으니까.”

어쩐지 김진호는 태윤에게 최소한의 것을 주고 최대한으로 가져가는 법을 아는 사람 같았다.

그가 데워진 음식을 놓고 서우를 불렀다. 고소한 전복죽 냄새가 코를 찌르자 배고픔이 뒤늦게 몰려왔다.

그와 넓은 식탁을 마주 보고 앉자 낮에 함께 밥을 먹었을 때와 다른 느낌이 들었다. 어제부터 내내 태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서우가 표정을 감추면서 숟가락을 들었다.

제대로 풀리지 않은 손의 경직이 미세하게 떨린다. 죽이 조금 아래로 흐르는 게 더러워 보여서 서우가 손을 내려놓았다.

들키지 않으려 괜히 죽을 식히려는 듯 뒤적거렸다. 눈치 없는 손가락은 꼭 이럴 때 바보처럼 군다.

“서우야.”

“응?”

시선을 전복죽 아래로 내리고 있다가 태윤의 부름에 얼굴을 들었을 때 잠시 멈칫했다. 얼굴 앞에 그의 숟가락이 와 있었다.

“아, 해.”

“나 애 아니야.”

“알아. 그냥 내가 해 주고 싶어서 그래.”

“조금 보기 싫게 먹을 뿐이지, 내가 먹을 수 있어.”

더 이상 알고 있는 그에게 숨기지 않았다. 서우가 떨리는 손으로 죽에 푹 담갔던 숟가락을 떠 입으로 가져갔다.

동시에 태윤이 다른 손으로 물컵을 건넸다.

“뜨겁겠다. 천천히 먹어. 누가 뭐래.”

뜨거웠다. 꼭 방금 안 그의 마음처럼.

물을 한 모금 마셔서 입안은 식혔는데 어쩐지 가슴 아래가 식혀지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전히, 속이 뜨거웠다.

강태윤이란 남자를 단단히 잘못 삼킨 게 분명했다.


 

***


 

그의 집에서 저녁까지 먹고 난 뒤에 서우가 집에 가겠다고 해 결국 함께 차를 탔다. 걸어가는 게 불안하면 차라리 택시를 타겠다고 했는데도 강태윤은 그녀를 차에 밀어 넣었다.

차로는 2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편의점 앞에서 내릴게.”

“왜. 집까지 가지.”

“살 게 있어서.”

이제 진짜 마실 물이 없었다. 강태윤과 조금이라도 더 빨리 헤어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생필품도 떨어진 게 있어서다.

서우의 말에 태윤이 편의점 앞에 잠시 주차했다.

“잘 가. 내일은 알아서 출근할게.”

“쉬라니까.”

“멀쩡한데 어떻게 쉬어.”

서우가 어깨를 으쓱하며 태윤에게 친구처럼 손을 흔들려다 멈칫하고 애매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럴 때만 본부장이냐며 그가 헛웃음을 짓는다.

알아서 잘 가겠지 싶어서 바로 편의점 안으로 들어오자 주말도 아닌데 수정이 일하고 있었다.

“언니! 저 오늘 대타예요. 저녁 알바가 펑크내서 급하게 불려 왔어요.”

“그래? 피곤하겠네. 커피 한 잔 사 줄까?”

“에이~ 매번 얻어먹기만 하잖아요. 제가 알바비 나오면 맛있는 거 사 드릴게요.”

묻지 않아도 수정이 조잘거렸다. 없는 형편에도 이상하게 수정에게 정이 가서 자신도 모르게 하나씩 작은 음료라도 사 주게 됐다. 아마 은하의 영향으로 ‘언니’라는 말에 약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서우가 수정의 밝은 모습에 따라 웃으면서 500미리 생수 12개 묶음을 살까 고민하다가 오늘 무거운 걸 들면 안 될 것 같아 결국 생수 2개와 커피 하나를 들고 계산대에 섰다.

“어제 그 남자 있잖아요.”

“아….”

그러고 보니 수정도 태윤을 여기서 봤다.

“진짜 잘생긴 남자 말이에요. 언니 전 남친?”

“아니야. 그냥… 옛날 친구.”

“옛날 친구가 그렇게 끼 부려요?”

“끼를 부려?”

바코드를 찍고 비닐봉지를 열면서 수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옷이랑 손에 묻은 거 닦고 가라고 물티슈 준댔는데 그냥 나갔어요. 완전 여우예요, 남자 여우! 언니한테 불쌍하게 보이려고!”

흥분해서 말하는 수정에게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오늘 내내 그에게 홀린 듯이 있다가 왔기에 여우라는 말에 어느 정도 동의했다.

“그래?”

“같이 가는 거 보니까 언니 또 맘 약해서 집에 들어왔다 가라고 했죠?”

“…응.”

“잘생겼는데, 진짜 잘생겼는데 치명적인 결함이라도 있어요? 성격이 더럽다거나 술버릇이 이상하다거나….”

“아닐걸.”

성격은 이상하다고 해야 하나. 서우가 잠깐 고민할 때 수정이 입을 열었다.

“그럼 전 찬성이요. 남자가 여우 같은 맛도 있어야죠. 그렇게 언니 좋다고 쫓아다니는데 남친 아니면 남친으로 만들어 버려요.”

타인의 눈에 자신을 좋아해서 쫓아다니는 걸로 보인다는 말에 어쩐지 부끄러워졌다. 태윤의 고백이 연이어 겹쳐진다.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인사를 하려고 고개를 들던 수정이 깜짝 놀라서 헉, 소리를 냈다.

뒤에서 나온 손이 서우의 앞에 있는 봉지를 가져갔다.

“안 갔어?”

“들어 주려고. 잠시 주차해도 될까요?”

“네? 그럼요. 하셔도 되죠.”

다시 봐도 잘생긴 얼굴이었다. 수정이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태윤을 말려 봤자 또 하고 싶은 대로 할 사람이란 걸 알고 있어서 서우가 아까 망설이던 일을 하기로 했다.

“그럼 잠깐만. 나 물 12개짜리 살래.”

풉, 수정이 터지려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 서우의 말에 태윤이 물이 진열돼 있는 쪽으로 다가가 12개 묶음을 가볍게 들고 왔다. 그리고 곧장 커피와 음료수, 간식거리를 눈에 보이는 대로 들더니 함께 계산해 달라고 카드와 내민다.

“감사합니다. 나머지는 드세요.”

물과 서우가 미리 계산한 봉지를 든 그가 앞장서서 먼저 편의점을 나갔다. 수북하게 순식간에 쌓인 간식거리를 보면서 수정이 엄지를 들어 보인다.

“언니, 저분 좋은 사람 같아요. 그리고 진짜 여우 같아요.”

맛있는 거 사 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고 웃는 수정이었다.

“고생하고, 다음에 봐.”

“네. 들어가세요~”

서우가 인사를 마치고 나오자 태윤이 한 번 가 봤던 길이라고 먼저 앞장섰다. 그 뒤를 재빨리 따르면서 괜히 한마디를 했다.

“안 들어다 줘도 되는데.”

“그러기엔 바로 더 사던데.”

태윤의 말에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가로등을 켰는데도 군데군데 어둑한 길을 지나면서 오늘은 어쩐지 외롭지 않았다. 반나절 전만 해도 강태윤을 밀어냈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모순적이었다.

다세대 주택의 계단을 올라가는 길이 오늘따라 금방 끝났다.

“여기다 두면 돼.”

“안에 둘게. 어차피 문만 열면 되잖아.”

서우가 잠시 망설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걸 알면서도 태윤이 다시 방문하는 자체가 부담됐기 때문이다. 그의 집에 비해 제 집은 너무도 좁았다. 그와의 거리가 그만큼 좁혀지는 것 같아 싫었다.

그 찰나의 망설임 뒤에 결국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강태윤이 정말 현관까지만 무거운 걸 옮겨 주고 바로 나가려 했다.

“태윤아.”

불러 놓고 왜 그를 불렀는지 서우가 아차 싶은 얼굴로 한쪽 눈을 찡그렸다. 현관은 두 사람이 서기에 비좁아 잠깐만 움직여도 몸이 스친다.

“말해.”

“물 먹고 가.”

줄 게 물밖에 없었다. 차는 자신이 별로 마시지 않았으니까. 그게 꼭 이상하게 들렸다.

“물만 먹고 갈 자신이 없어서.”

노골적인 의미를 담은 말에 목덜미를 붉힌 채 서우가 시선을 다른 쪽에 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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