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발자국 (28)화 (2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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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못 들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좋아서.”

“너는 정말 내가 피아노 치는 걸 좋아해.”

“가끔… 위로처럼 들려서.”

한번 그렇게 들리니 강태윤의 피아노가 꼭 제 기분을 좌지우지하는 것 같았다. 항상 그의 연습실에선 자신이 듣고 싶은 곡이 나왔다.

어쩌면 그에 대한 사랑은 당연했다. 제 감정이 이렇게 멋대로 움직여서 가는데 거기에 강태윤이 있었을 뿐이다.

“맞아.”

태윤이 명료하게 말했다.

“뭐?”

“창고 아래서 네가 노래를 부르던 게 나에겐 위로라서.”

그래서 내 음악도 너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했다는 달콤한 대답이 돌아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거짓말.”

“왜? 난 줄리엣이 된 기분이었는데.”

그럼 자신이 로미오란 말인가. 어이없는 말에 서우가 피식 웃었다.

그러다 문득, 한 번도 제 감정을 보여 주지 않았던 강태윤이 떠올랐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위로했던 그의 음악이 함께 스쳐 지나갔다.

“너는….”

음악으로 그의 감정을 전했다. 서우가 한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일그러진 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다.

조금 더 일찍 알았다 해도 달라지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그의 마음을 너무 늦게 안 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서우야, 난 네게 들어오라고 했던 그날을 후회해.”

그날은 자신에게 잊을 수 없는 날이었는데 강태윤은 후회한다고 말한다.

“…왜….”

“그땐 내가 너무 어려서 몰랐어. 소중한 건 누구에게도 드러내선 안 된다는 걸.”

자신이 실어증을 딛고 처음 입을 열었을 때, 어머니는 기민하게 눈치챘다.

‘이걸’ 곁에 둬서 트로피 같았던 제 아들을 돌려놔야겠다고.

어느 쪽이 윤서우에게 괜찮았을지 태윤은 아직도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보호자가 아무도 남지 않았을 때 오히려 윤서우가 이 집과 어머니를 벗어날 계기가 되지 않을까 했다. 하지만, 세상에 아무도 없는 기분을 자신은 겪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를 떠올리고 윤서우의 위로를 떠올렸다.

다시 아들이 말을 잃은 걸 제 체면을 덧씌워 걱정하는 어머니를 이용해 윤서우를 데리러 갔다.

아마 그때 적당히 윤서우를 이용해야겠다고 여겼으리라.

보여 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가장 원하는 걸 어머니의 눈에 보이게 했다. 억지로 매번 사랑받으려고 노력하던 윤서우가 잔뜩 겁을 집어먹고 고아원 한구석에 웅크리게 둘 수 없었다.

최악이냐, 차악이냐.

그 선택만이 남았다. 그때의 강태윤에게 어머니는 차악이었다.

“태윤아.”

어머니의 욕심에 희생된 건 저뿐만이 아니었다. 서우는 어떻게든 그녀의 눈에 들기 위해 매일 밤을 불면에 시달렸다.

불안해서 잠들지 못하고 서성였다. 그걸 자신이 몰랐을 리 없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곤한 잠이 들 만한 피아노를 연주해 주고, 서우에게는 더 이상 다가가지 않았다.

그저 어머니가 후원하는 아이.

그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가끔 자신에게 끝없이 말을 걸어오면서 제 연주를 물끄러미 바라볼 땐 피아노에서 손을 떼고 머리를 만지고 싶었고, 손을 잡아 보고 싶기도 했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걸 어머니가 알면 더 이상 같이 있지 못했을 테니까.”

그래서 그는 서우와의 사이에 거리를 뒀다. 어떻게 제 어머니 아래서 저렇게 다정하고 사려 깊을 수 있는지 여전히 그녀에 대해 의문이 든 채였다.

“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나를 좋아한다니.”

“졸업하고 내게 고백한다고 해서 계속 기다렸어. 예쁘게.”

모를 수 없다. 은하가 그렇게 들으라는 듯이 떠들고 다녔으니까.

그런데 그 전에 서우가 사라졌다. 그 역시 쫓기듯 미국으로 가야 했다. 어머니가 죽고 그에게 남은 건 지켜야 할 약속뿐이었다. 미국에서도 사람을 풀어 행방을 찾았는데 결국 찾지 못했다. 영영 숨어 버린 사람처럼.

“난….”

“이제 숨지도 마.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꼭 뭔가를 아는 사람처럼 그렇게 말한다.

“아, 안 돼. 나는 있잖아….”

“넌 내 어머니를 좋게만 보니까. 그래서 그분에 대해 나쁜 말은 하고 싶지 않아. 그런데 내 어머니는 사람에게 짐을 지우는 걸 가장 잘하는 분이셨거든.”

마음의 빚을 교묘하게 지게 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벗어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어리석게도 벗어나는 길이 꼭 자살밖에 없었던 것처럼 아버지는 그걸 선택했다.

자신이 평생 처음 제 손으로 돈을 벌어 마련한 낡은 피아노 위에 올라가 목을 맸다.

서우의 어깨 위에 있는 그 보이지 않는 짐의 무게를 태윤은 알고 있었다.

그 역시 음악을 그만두고 얌전히 회사에 들어가 외삼촌의 뒤를 잇겠다고 약속했다.

그럼 어머니에게서 자유로워지리라.

가장 먼저 윤서우를 거기서 빼 와야지. 자신이 어머니가 가장 바라는 걸 이루어 준다면 윤서우를 놓아주리라고 여겼다.

“나는 안 돼. 우리는 안 돼.”

“누가 그래.”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나한테….”

그렇게 횡설수설 입을 열었다가 서우가 멈칫했다. 그리고 이내 꾹 다물어 버린다. 태윤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울렁거리는 얼굴을 그녀가 메마른 손바닥에 묻었다. 마른세수를 하면서 정신을 차리려고 애쓴다. 태윤의 고백은 갑작스러웠다. 그런데 듣고 보니 자신이 아주 몰랐던 고백 같지 않았다.

그의 음악은 전부 자신을 위로하고 있었다.

“너한테 뭐라고 했어.”

“절대 안 된다고. 어차피 안 될 거 나도 알고 있었어. 그래서 선생님이 그렇게 말하는 게 이상하긴 했는데….”

태윤의 입가가 비틀렸다.

아무리 숨겨도 결국 티가 났다. 어머니는 자신을 설득하다간 전부 뒤로하고 그가 과거처럼 돌발 행동을 할까 봐 그녀를 신처럼 따르는 서우를 설득했다.

“내 어머니지만 머리가 좋은 분이라니까.”

죽어서도 서우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더 이상 윤서우는 음악을 하지 않았고, 어머니의 착한 학생도 아닌데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태윤의 기분이 끝 간 데 없이 침잠하게 가라앉았다.

“그게 선생님의 마지막 말일 줄 몰랐어….”

서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성마르게 그득 차올라 뚝뚝 떨어지는 눈물은 생리적인 현상이었다.

크게 눈을 뜬 채 당황해서 처음으로 그에게 속내를 내보인다.

“어머니는 죽었고, 난 살아 있어. 나를 저버리면 내 마음이 많이 아플 것 같은데.”

선생님의 모든 것이었던 강태윤이 그렇게 말했다. 혼란스럽고 머리가 아팠다.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방향을 잡을 수조차 없다.

“하아.”

“죽어서 7년이나 윤서우를 갉아먹었으면 어머니도 널 놔줄 때가 됐지. 너도 마찬가지고.”

자신의 어머니에게 하는 말치곤 냉랭했다. 타인을 이야기하듯 건조한 말에는 애정이라곤 없었다.

“선생님은-”

“겉보기에 좋은 걸 좋아하는 분이셨지. 이왕 후원하기로 한 거 재능까지 있었으니 네가 밤에 잠들 수 없을 정도로 몰아붙인 거고. 어머니는 누구보다 널 잘 아셨을 거야. 너는 사랑받으려고 굉장히 노력했으니까. 그 발버둥이 보이지 않을 리가.”

다시 고아원으로 가게 될까 봐, 자신을 따르는 예쁜 동생인 은하와 손을 내밀어 저를 이쪽 세계로 끌어당겨 준 태윤과의 연이 영영 끝날까 봐 서우는 앙다문 입술이 터질 정도로 노력했다.

선생님에게 예쁨받아야 좀 더 오래 함께할 수 있다.

선생님의 뒤를 이어서 멋진 하피스트로 무대에 선다면 어쩌면, 자신의 삶도 조금은 괜찮아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발버둥.

태윤이 그렇게 말할 만하다.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하고 그대로 소화가 되지 않아 욕실로 가 토하고, 밤에 잠들지 못한 채 온 집 안을 뒤꿈치를 들고 헤맸다.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자신에게 투자 가치가 없다고 여기면 쫓겨날까 싶어서.

욕실에서 같이 토하려던 은하를 만났을 때는 웃기기까지 했다.

악기는 죽어도 하기 싫어 발레를 하는데 몸무게를 유지해야 해서 토하러 간다는 은하는 서우를 보고 힘없이 웃었다.

자신이 꿈을 좇아 성공한 여자로 유명했으니 그 아들과 딸 또한 어느 방면에서든 재능이 있어야 한다고 다그쳤다.

자신뿐만 아니라 태윤도, 은하도 선생님의 트로피였다.

“그래. 그랬었던 것도 같아.”

“그러니까 이제 마음대로 해. 갖고 싶은 건 손 내밀어서 갖고, 물러서지 마. 이젠 너 도망갈 곳도 없어.”

그가 그렇게 두지 않을 거라고 나지막이 말한다.

서우가 손등으로 젖어 있는 얼굴을 닦았다. 피아노에 앉은 채로 태윤의 시선이 그녀의 전부를 훑는다. 그는 자제력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기에 손을 대고 싶은데 손대는 순간 자제할 수 없을까 싶어 표정이 무섭도록 굳은 채였다.

“…집에 갈래.”

“배고프지? 너 잘 때 죽 주문해 뒀거든.”

아무 말이나 꺼냈는데 다행히 태윤이 그녀의 말에 맞춰 줬다.

더 이상 몰아붙이기엔 오늘 서우가 힘든 하루였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 환자 아니야. 집에 가서 먹으면 돼.”

“또 편의점 도시락이나 먹으려고? 내가 네 집에 안 가 봤어?”

냉장고도 없는 작은 방 안. 음식 같은 게 제대로 있을 리 없다. 태윤의 싸늘한 물음에 결국 서우가 입을 다물었다.

강태윤을 들이는 게 아니었는데. 혼자 사는 사람이 해 먹는 것보다 사 먹는 게 차라리 돈을 절약하는 방법이라는 걸 그가 알 리 없다.

“그러는 너도 아무것도 안 해 먹으면서.”

태윤이 그제야 조금 웃는다.

그가 뱉은 자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 하라는 말을 곱씹자 자꾸만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 같아 괜히 불퉁하게 말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잠시 서우를 보던 태윤이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조금 쓰다듬었다.

“네가 이해해. 나는 종종 너한테 손이 나가거든.”

그건 그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였다. 참고, 참다 보면 모든 건 언젠가 터지기 마련이다.

태윤은 이미 자신이 한 번 비틀어져 터졌다고 생각했다. 손이 나가는 의미는 만지고 싶어 견딜 수 없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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