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7_
서로의 가슴이 붙고, 몸 위로 느껴지는 강태윤의 묵직한 무게를 느끼고 도망칠 곳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에야 입술이 떨어진다.
긴 타액이 입술과 입술 사이로 이어지자 붉은 혀가 여유롭고 노골적으로 그걸 말아 제 입으로 가져가는 게 서우의 눈에 보였다.
“하아… 하….”
입안에 고여 있는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타액이 서우의 목 너머로 삼켜지는 걸 태윤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내려다봤다.
“우리가 한 걸 단순히 입을 맞춘 걸로 설명하면 안 되지.”
그저 입술만 맞댄 건 아니지 않냐고 물어온다. 입 맞춘 건 그냥 사고 같은 거였다고 넘어가자고 하려 했던 서우의 입이 단번에 막혔다.
두 번째는 어떻게든 사고가 아니었다. 강태윤이 그렇게 만들어 버렸다.
다시 말을 꺼내면 세 번째가 될지도 몰랐다.
“좀 더 자. 내일은 출근할 필요 없어.”
“왜?”
“나를 구하느라 힘들었을 거 아니야.”
“이건 그냥 갑자기 긴장이 풀려서….”
“쉬라고 할 때 쉬어. 너 지금 나만 보면 얼굴이 빨개져서 내일 곤란할걸.”
이건 너 때문에 이렇게 된 거라고, 네가 입만 맞추지 않았으면….
말을 하려다 서우가 꾹 참았다. 바로 앞에서 그와 몸 전부를 맞댄 채 누워서 할 소린 아니었다.
“비켜. 무거워.”
강태윤이 자신에게 발정하고 있다. 계속 부정하려 해도 그가 보이는 행동, 그리고 몸의 상태가 그걸 말해 줬다.
“네가 가고 나면 난 아마 이 방에서 못 잘 거야.”
비키지 않고 태윤이 한숨처럼 말했다. 빤히 제 얼굴과 목덜미를 보는 시선에서 그는 완연한 남자의 눈을 하고 있었다.
숨을 쉬는 것 하나조차 의식됐다. 너무 가깝다. 서로가 숨을 쉬는 타이밍도, 그리곤 눈을 깜박이고 속눈썹의 개수조차 셀 정도로 가까웠다.
꼭 입술을 맞대지 않고서도 그의 호흡을 느낄 수 있었다.
여전히 그와 입을 맞대고 숨을 섞고, 혀를 섞는 알 수 없는 기분에 서우가 부풀어 오른 아랫입술을 핥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태윤아, 무겁다니까.”
서우가 괜히 그를 밀어내려 다시 말했다.
부드럽게 잡혀 위로 들려 있는 손목에 뜨거운 체온이 낙인처럼 남았다. 그런 순간이 있다. 왠지 이 열기가 평생 잊히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 때가 분명히 살아가며 생긴다.
처음 강태윤이 창문을 열고 제게 들어오라고 말했던 날이 그랬고, 마지막으로 피아노를 쳤을 때도, 그리고 지금이 그랬다.
그가 빨리 자신을 놓아줬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조금은 더 이대로 잠시 있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충돌했다.
“온통 네가 누워 있던 것만 생각날 테니까. 나쁜 짓을 하고 싶었던 마음을 누르던 나도 생각날 테고.”
그가 아쉬운 얼굴을 하고선 서우의 위에서 몸을 비켰다. 어쩐지 내리누르던 감각이 사라지자 허전함이 밀려온다.
어찌할 바를 몰라서 서우가 집에 가야겠다고 말을 꺼내려 입을 달싹였다.
“잠 깼으면 피아노 쳐 줄까.”
방금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호흡을 뱉는 법도 잊었다. 눈을 크게 뜬 채로 자신을 보는 서우를 태윤이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런 소리를 한 적 없는 얼굴로 서 있었다. 환청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어쩌면 키스를 했을 때보다 더 놀란 표정의 서우를 보면서 다시 그가 말해 줬다.
“내 피아노. 좋아하잖아.”
“…아, 그래. 좋아해.”
“그건 좋아한다고 해 주네. 난 이제 더 이상 안 좋아한다면서.”
서우가 태윤의 시선을 피했다. 이 집에 악기라고는 없을 줄 알았다. 피아노를 쳐 준다는 말을 진담으로 들어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가 나가자 자신도 모르게 침대에서 일어나 뒤를 따랐다.
주홍빛의 조명이 잔잔하게 집 안 곳곳을 밝히고 있었다.
그리고 거실 한쪽에 어제까지 없었던 피아노 한 대가 보였다. 아주 낡고 오래돼 누군가의 손때가 느껴지는 피아노였다.
서우는 그걸 단번에 알아봤다.
태윤의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남기신 피아노. 선생님은 그걸 끔찍하게 싫어해서 본가에서도 아예 방을 잠가 놓았다.
버리고 싶어 했지만, 이상하게 그것만은 태윤의 눈치를 보며 버리지 못했다.
“네가 다녀간 뒤에 가지고 왔어. 이제 여기 있어야 할 것 같아서.”
피아노는 거실의 가운데가 아니라 비스듬히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꼭 그 가운데 뭔가 들어갈 자리가 있는 것처럼 비워 놓았다. 그가 가볍게 손을 풀더니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아무렇게나 일정한 간격으로 손을 풀기 위해 두드리는 건반 소리를 듣자 그제야 진짜 강태윤이 피아노를 칠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우가 더 가까이 그에게 다가갔다. 손님을 위한 소파도,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텅 빈 거실에 다른 점은 피아노만 한 대 덩그러니 있을 뿐이다.
그가 악보도 없이 앉아서 옆에 서 있는 서우를 한 번 바라봤다.
그리고 길고 곧은, 누구보다 예쁜 손가락이 익숙한 첫 음을 냈다.
드뷔시의 ‘달빛’.
바로 어제까지 피아노를 쳤던 사람처럼 달빛 위를 걷는 환상 같은 음이 거실 안을 가득 메웠다. 태윤과는 참 어울리지 않는 곡이라고 생각했었다. 이렇게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은 어쩐지 그와 어울리면서도 다르다고 여겼다.
처음 이 곡을 들었을 때는 잠이 오지 않고 불안하고 초조해 가만히 홀로 밤을 지새웠을 때였다.
자신이 뒤척이면 항상 제 곁에서 자던 은하가 잠을 설치니까 몰래 거실에 나와 가만히 밤을 지새웠다.
그럴 때면 태윤의 방 안에서 반쯤 열린 문틈으로 이 곡이 새어 나왔다.
강태윤과 정말 어울리지 않는데 흔한 연습곡이라고 넘겼다.
가만히 듣다 보면 마음이 평온해지고, 자신의 불안감 같은 게 전부 괜찮아졌다.
자유롭게 건반 위를 오가는 손가락을 서우가 멍하니 바라봤다.
그리고 태윤의 손가락이 멈췄을 때에야 음악도 끝났다는 걸 깨달았다. 꿈을 꾸다 깬 사람처럼 서우의 눈이 몽롱해졌다가 이내 돌아왔다.
“졸려?”
언제부터 웃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강태윤이 녹아내리게 웃으며 달콤하게 그렇게 물었다. 꼭 그의 이 연주곡을 들으며 자신이 잠드는 사실을 아는 사람처럼.
“…그냥. 오랜만에 들으니까 좋아서.”
“거짓말. 어제도 들었잖아.”
제 집에서 휴대폰이 바닥에 떨어졌을 때가 생각났다. 서우가 흠칫 놀랐다. 그녀의 반응을 놓치지 않고 피아노의 건반을 길게 누르면서 태윤이 말을 이었다.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서우야, 손가락만 나온다고 그게 네가 찍었던 영상인 걸 내가 모를까.”
“그거 지형이….”
“나야. 내가 올려 달라고 했어. 네가 어디에 있든 그걸 봤으면 해서. 너라면 단번에 알아볼 것 같았거든. 네가 찍은 건데 주지형이 갖고 있더라고.”
휴대폰을 없애면서 태윤에 대한 것까지 전부 없애려고 했다. 그런데 그 마지막 영상이 아까웠다.
주지형에게 보내 놓고 서우는 완전히 잊었다. 그리고 우연히 인터넷상에서 그걸 다시 찾았을 때 자신이 그때 지웠던 모든 걸 후회했다.
“아….”
“너 두고 보라고 찍게 한 영상인데 내가 모를 리가.”
또다시 몸이 바짝 긴장하자 손이 저렸다. 서우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나는 집에, 집에 가야겠어.”
“또 뭐가 듣고 싶어?”
“또?”
강태윤이 이상했다. 피아노를 그만두고 한동안 절대 근처에도 가지 않았던 그가 부드럽게 저를 종용한다. 강태윤의 피아노를 들을 수 있다.
그 폭력적일 만큼 다정한 피아노를. 서우의 망설이는 물음에 그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가겠다고 말해 놓고 제 입은 곡을 올린다.
“Albinoni-Adagio 사단조.”
알비노니의 아다지오 사단조.
서우의 말에 잠시 태윤이 허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될까 모르겠네.”
오래도록 피아노에서 손을 놓은 그에게 연주해 달라고 하기엔 무리일지도 모른다. ‘달빛’은 그가 가장 많이 쳤던 곡이라 익숙해도 ‘아다지오’는 충동적으로 말했다.
말해 놓고 아차 싶었는데 태윤이 곧장 건반을 눌렀다.
손등 위에 돋아난 핏줄까지 가까이 보일 자리에서 그의 손을 따라 서우의 눈도 움직였다. 언젠가 그가 피아노 협주곡으로 연주했던 곡이었다. 그때 듣고 언젠가 다시 들어 보고 싶었던 곡이었다.
서글펐던 바이올린과 묵직한 첼로의 선율이 없어도, 다소 빠르게 연주하는 태윤의 피아노는 환상적으로 귓가에 맺혔다.
아다지오. 보스니아 내전 당시 무고하게 죽은 이들을 기리기 위해 연주된 곡을 처음 들은 순간, 서우는 내내 전쟁 같던 제 삶을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누군가를 애도하는 듯한 곡에 어쩐지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서우가 침음을 삼켰다.
강태윤의 피아노를 들을 때면 항상 그랬다.
자신의 감정이 날뛰었다. 강태윤이 유도하는 대로 그의 음악에 맞춰서 천국과 지옥을 오가고 꽃밭과 가시밭길을 번갈아 걸어 결국 지쳐 나가떨어진다.
“왜 그렇게 울 것처럼 그러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