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발자국 (23)화 (23/70)

023_

가족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 TV에서 나오는 가족의 형태와 이들이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서우는 노력했다. 강태윤에게, 강은하에게, 그리고 선생님에게 사랑받기 위해 악착같이 굴었다.

“그걸 왜 지금 말해.”

“그냥 지금 생각나서 말하고 싶었어.”

그렇게 말한 서우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태윤을 지나쳐 먼저 직원이 안내해 준 별채로 들어갔다.

손님이 저희밖에 없는지 안쪽은 조용했다. 좌식 테이블에 앉자 창 옆으로 지나온 대나무 숲이 고스란히 보이는 자리였다.

김진호는 따로 먹는지 방 안에는 둘뿐이었다.

이미 주문이 들어가 앉자마자 한 상이 바로 차려졌다. 떡갈비부터 시작해 버섯전골과 스무 가지도 넘는 밑반찬이 나왔다. 서우가 말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로만 채워진 상을 보며 한 그릇을 싹싹 비워 냈다.

오랜만에 밥 같은 밥을 먹어 기분이 좋았다.

서로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은 아니라 조용하고 편안한 식사였다. 벽에 등을 기댄 채 아직 식사를 덜 끝낸 태윤이 먹는 걸 지켜봤다. 사람이 먹는 걸 빤히 보면 실례라고 배웠는데 참 단정하고 예쁘게도 먹어서 눈이 갔다.

절반도 먹지 못하고 태윤이 식기를 내려놓는다.

“후식으로 다과랑 수정과 준비해 드릴게요.”

차려진 속도와 비슷하게 음식이 치워졌다.

계피 향이 진하게 나는 수정과의 깊은 색을 들여다보고 있자 이제는 더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그만하자. 네가 자꾸 이러면 내가 정말 염치없는 사람이 된 것 같잖아.”

“넌 그래도 돼.”

태윤이 싸늘하게 일축했다.

“은하한테 그러지 마.”

자신이 부모님과 보냈던 시간보다 더 오래 함께했던 이들이었다.

“쓸데없는 생각 그만해. 염치없는 게 누군지 나는 확인해야겠으니까.”

서우가 테이블 아래로 두 손을 맞잡았다. 감각이 별로 없는 손가락을 무의미하게 주물렀다. 간다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그리고 강태윤을 떼어 낼 수 있는지 확신이 없었다. 그저 정적뿐인, 제법 잘 버티고 있다고 생각한 제 삶에 변수가 나타났다.

눈 딱 감고 방향을 틀어 끝까지 가 보고 싶은 변수.

“강태윤, 너 무서운 게 없지?”

“있어.”

태윤의 까만 눈이 긍정한다.

선생님은 우리 서우 믿어.

주문처럼 자신에게 박힌 말을 서우가 다시금 되새겼다. 재능 있던 강태윤이 피아노를 하루아침에 그만뒀을 때 선생님은 기뻐했다.

단 한 톨의 아쉬움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오빠의 그늘에 눌려 EA의 후계자가 되지 못했으니, 아들이라도 그렇게 만들고 싶은 야욕을 거침없이 보였다.

“그만 일어나자.”

스스로 정리를 마친 서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은 채로 저를 빤히 바라보는 태윤을 피해 신발을 신기 위해 나왔다.

“넌 그냥 가만히 있어. 네 입으로 들어 봤자 빌빌거리는 죄책감뿐일 테니까.”

“대체 뭘 가만히 있으라는 거야.”

“나는 왜 널 찾을 수 없었는지. 그렇게 완벽하게 널 숨길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겠어.”

구두를 신고 막 일어나려던 서우가 휘청였다.

태윤은 잡아 주지 않았다. 싸늘하게 그 동요를 바라봤다.

“내가 그냥….”

“기대해. 나는 지금 재미있어 죽겠거든. 내내 기분이 벼랑 끝에 치달아서 아래로 밀리는 느낌 알아?”

그럴 때마다 배 속 깊은 곳이 뜨거워졌다. 오금이 저리도록 이를 악물게 된다. 주 회장은 긴 유학 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저를 보고 눈빛이 더 더러워졌다고 혀를 찼다.

가만히 삭였다. 저를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하는 서우를 견딜 수 없어서다.

영원히 제 기분을 짐작만 하고 있을 것 같아 태윤이 결국 서우의 손을 깍지 껴 잡았다. 힘없이 잡히는 여리고 여린 손을 아프지 않게, 놓치지 않게 잘 잡고 걸었다.

마지못해 따라오면서 흘리는 한숨 소리를 태윤은 모른 척했다.


 

***


 

이천 외곽 부지에 지어진 2만 평 규모의 커다란 공장 부지는 평일에도 열심히 돌아가고 있었다. 정문 검색에서 본사 본부장이라고 하자 경비원이 급하게 안으로 호출을 넣고 얼마 안 가 안쪽에서 몇 명이 뛰쳐나왔다.

“아이고, 본부장님! 미리 연락을 주고 오셨으면 진작 준비를 했을 텐데요.”

반가움보다는 사색이 된 얼굴에 가까웠다. 진호에게 차를 주차하라 시키고 태윤이 그들이 안내하는 안쪽으로 걸어갔다.

“PQC와 OQC 담당자 데리고 오세요. 그리고 지난 3년간 납품 내역과 불량 폐기된 기록들, 지금 현재 공장의 창고에 남아 있는 재고까지 전부 확인해야겠으니 준비해 주세요.”

정중한 부탁이었지만, 말은 명령에 가까웠다. 인사 없이 바로 진행하는 태윤의 언사에 공장장이라고 본인을 소개한 최만호가 눈을 굴렸다.

새파랗게 어린놈이 본부장으로 왔다길래 조금 안심하고 있던 터였다.

회사가 합병될 때쯤, 윗선들이 전부 잘릴 걸 대비해 서로서로 살길을 마련했다. 합병된 뒤에는 슬쩍 눈치를 봤어야 했는데 통장에 꽂히는 돈 단위를 보고 무리해서 욕심을 부렸다.

“그럼요. 보셔야겠다면 다 준비를 해야죠. 한데 본사에도 똑같이 보고가 올라가 있을 텐데….”

“불량이 이 정도로 심하면 공장 문을 닫든가, 회사가 살아날 다른 방도를 모색해야 합니다. 마이너스만 끌어안고 있을 순 없으니까.”

비수처럼 강태윤의 말이 나와 있는 이들을 찔렀다. 작작 좀 해 처먹지 그랬냐는 은유에 찔끔한 얼굴로 공장장이 허허롭게 웃었다.

“그렇게 안 하셔도 저희가 다….”

“서울에서 감사팀이 여기로 팀 꾸려서 법무팀과 오기까지 세 시간은 걸릴 텐데. 더 할 말 있습니까.”

“일단,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태윤을 무작정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윤 비서님, 김 비서와 함께 장부 확인해 주세요. 놓치고 있는 게 있을 겁니다.”

“네.”

태윤이 진호와 눈빛을 주고받았다. 어차피 장부를 숨겨 놓는 곳은 대부분 사무실일 테고, 가장 허둥지둥 당황한 곳을 찾으면 쉬웠다.

공장 내부에서 근무하는 사무직 직원들이 있는 곳으로 진호와 서우가 사라졌다.

“이쪽으로 오시죠. 담당자들은 금방 올 겁니다.”

더위가 그래도 제법 가셨는데 땀을 뻘뻘 흘리면서 최만식이 제 사무실로 태윤을 안내했다.

“시간이 없는데 제가 직접 가죠. PQC 담당자부터 보고 싶은데.”

“아…. 예. 그러십시오. 그 사람이 아까 재고 창고에서 뭘 하는 것 같던데. 소식 없어?”

괜히 옆 직원을 닦달하는 뻔한 연극을 보며 태윤은 지루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자신이 가 보겠다고 공장장의 사무실이 아닌 태윤이 움직였다. 이렇게 보자마자 꼬리를 내릴 거면서 몇 년 새 수십억이 넘는 돈을 해 먹었다.

간부들이 바뀌면서 그 윗선까지 단단히 해 먹고 합병을 핑계로 물갈이를 했을 때 뒤로 꽤나 두둑한 퇴직금을 챙겼을 게 분명했다.

그가 파악한 것만 해도 수십억이니, 오래전부터 이랬다면 금액은 더 됐으리라.

이제는 더 이상 생산 라인을 돌리지 않는 곳으로 슬슬 최만식이 태윤의 눈치를 보며 데려갔다.

“이번에 다시 라인을 돌리려고 정비 중이라, 아마 이쪽에 있을 겁니다.”

그래도 PQC 담당자가 항의를 지속적으로 했었다니, 잘만 설득하면 일이 쉬워질 것 같았다.

불량으로 처리한 물건을 뒤로 빼돌려 이익을 챙기는 건 오래된 관습이라는 걸 태윤도 안다. 하지만 휘청이는 회사에서 이렇게 마지막 단물까지 빼내려 일괄되게 윗선부터 발 벗고 나선 건 다 같이 망하자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생산 라인 옆에 있는 정비 창고를 최만식이 가리켰다.

그 안쪽으로 태윤이 들어갔을 때 뒤에서 문이 닫혔다.

“아이고! 이게 한번 닫히면 고장이 나서… 잠시만요. 제가 사람 불러올게요.”

연기까지 어설펐다.

얕은수에 태윤이 머리를 쓸어 올리며 짧게 웃었다. 캄캄하고 좁은 창고 안에 PQC 담당자가 있을 리 만무했다.

밖에서 문이 잠기는 소리를 들으며 품 안의 휴대폰을 꺼냈다. 얼마나 당황했으면 본사 본부장을 가둬 둘 생각을 한 걸까.

영원한 비밀은 없다.

회사가 흔들릴 때보단 덜 해 먹는다 쳐도 여전히 몇 년간 걸리지 않은 자신감으로 뻔뻔하게 나서는데 눈치채지 못할 리가.

“나야.”

여기 지금 난리도 아닙니다. 아오, 나가라니까요? 자자, 다들 컴퓨터에 손대지 마시고 이대로 밖으로 나가시면 됩니다.

사무실 안이 난장판이라고 진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감사팀이나 법무팀에도 뇌물을 받은 자가 있을 게 분명해 언질을 주기 전 먼저 내려왔다.

사람들을 내보내고 사무실 문을 걸어 잠그는 게 김진호의 일이었다.

“날 창고에 가두던데.”

네? 창고요? 나참, 급하긴 급했나 보네. 어느 창고요? 지금 가기 좀 그런데. 눈을 떼면 아예 하드를 부술 기세예요.

“경찰 부를게. 별수 있나.”

더 귀찮아질 뿐. 오늘 9시 뉴스에 제 얼굴이 헤드라인으로 실릴 것 같았다. 태윤이 혀를 찼다.

넥타이를 죽 잡아 빼며 그가 창고 한쪽 벽에 몸을 기댔다.

창문 사이로 희미한 먼지가 풀풀 날린다. 숨을 쉴 때마다 코가 더럽혀지는 느낌이다. 이 퀴퀴하고 건조하고 음울한 냄새를 태윤은 전에도 맡은 적 있었다.

“아주 좋은 거 떠올리게 하네.”

저 바깥 어딘가에 있을 서우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그의 눈이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