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발자국 (22)화 (2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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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실사 날짜 기억해?”

“실사는 부장님이랑 전에 있던 박 전무가 함께 갔는데 지난달 말로 기억해.”

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내 책상에서 일어나 책상 위에 있는 휴대폰과 차 키만 손에 들었다. 서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가 말했다.

“가서 짐 정리해서 가지고 나와. 거기서 바로 퇴근할 거니까.”

“어디 가는데?”

“실사. 네가 재고도 기억한다며. 이런 건 갑자기 가 줘야 뭘 못 빼돌리지.”

“나는 그냥… 계약직인데.”

“3분 뒤에 여기서 나갈 거야. 내가 비서실 앞에서 너 짐 챙기는 거 기다리게 하지 않으려면 빨리 가서 준비해.”

얼떨결에 서우가 등 떠밀려 나왔다. 혹시 그녀가 혼났나 싶어서 두 사람이 빠르게 속삭였다.

“왜. 무슨 일이야, 서우 씨.”

“혹시 혼났어요?”

“아뇨. 그….”

이천 공장에 실사를 가야겠다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았다.

미리 간다는 걸 굳이 말해 혹시 모를 말이 새어 나가려는 것보단 태윤의 생각이 맞다. 비서실 사람들을 얼마 겪지 않았지만, 좋은 사람들이라는 걸 안다. 비밀 유지 계약도 조항이 있었으나, 서우는 입을 다물었다.

“외근 동행하자셔서.”

궁금증 어린 두 시선을 애써 무시하고 제 자리로 가서 빠르게 짐을 챙겼다. 그래 봤자 가방 안의 짐을 빼놓지 않아 가방과 휴대폰만 챙기면 됐다.

3분이 채 되지 않아 태윤이 본부장실에서 나왔다.

“점심에 식사들 하세요. 저랑 윤 비서님은 바로 외부에서 퇴근할 겁니다.”

“앗, 네. 감사합니다!”

태윤이 제 카드 한 장을 비서실 위에 올려놓았다.

그걸로 비싸고 맛있는 걸 먹으라는 뜻이었기에 다시금 두 사람의 얼굴이 호기심과 기쁨으로 물들었다.

“서우 씨, 잘 다녀와요.”

어딜 가냐고 궁금해했던 것도 잠시, 블랙 카드를 손에 들고 두 사람이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어쩐지 태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비서실을 나서는 길이 어색해서 서우가 좀 떨어져 걸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엘리베이터 앞에서 다시 멈춰 서게 됐다.

“먼저 감사과에도 이야기해야 하는 거 아냐?”

“수 쓰는 거잖아.”

“응?”

“너랑 데이트하려고 수 쓰는 거라고.”

태윤이 일을 허투루 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 말이 가볍게 들렸다.

방금 이 안에서 눈물을 눈꼬리에 매달고 내려갔던 은하가 생각나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런 말 좀 하지 마.”

“그래. 가는 길에 드라이브도 하고 우리도 점심은 먹어야 할 거 아니야.”

데이트란 말을 하지 말라고 하니, 그걸 또 풀어서 이야기한다. 꼭 어린아이 장난 같았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태윤은 종종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했던 이야기를 곱씹듯이 미간이 굳어 있기도 했다.

“직접 운전하려고?”

“김 비서 데려갈 거야.”

단둘이 아니라 수행 비서인 김진호가 함께라는 말에 서우가 눈에 띄게 안심했다.

그걸 태윤이 엘리베이터의 투명하게 비치는 유리 너머로 알 수 없는 눈을 하곤 바라봤다.

“여기.”

지하 주차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진호가 태윤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리고 한 발자국 뒤에서 따르는 서우를 보고도 눈인사를 건넸다.

손에 들고 있던 차 키를 그에게 던지자 능숙하게 받아 재빨리 차가 주차된 곳으로 갔다. 비서와 본부장 사이를 떠나서 합이 잘 맞는 꽤 친한 사이로 보였다.

“뒤에 타.”

당연히 조수석에 타려는 서우를 향해 태윤이 말했다.

서우가 저도 모르게 뒷좌석의 문을 열고 태윤을 기다리고 있는 진호의 눈치를 봤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그만이 그녀를 똑바로 보고 있을 뿐이다.

“뒤에 타시죠.”

진호도 태윤의 말을 따라 했다. 시간이 지체되는 것 같아 서우가 열어 준 뒷좌석에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타자 차 문이 닫혔다.

태윤이 당연히 옆에 탈 줄 알았는데 그는 그녀가 타려고 했던 조수석에 올라탔다.

“2시간 정도 걸리니까 편하게 자.”

밤새 제대로 자지 못한 서우를 알아봤는지 그가 말했다. 백미러로 뒤를 보지 않으려 애쓰는 김진호의 식은땀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이건 누가 봐도 이상한 관계였다. 상사인 그가 조수석에 타고 비서인 자신이 뒷좌석에서 자라는 말이나 듣다니.

굳이 이천까지 자신이 따라갈 필요가 없는데 꼭 핑계를 만들어 데리고 나온 사람처럼 느껴졌다.

“…괜찮습니다, 본부장님.”

“진호는 알아. 그러니까 어색하게 안 그래도 돼. 너 그렇게 말할 때마다 로봇 같아.”

옆에서 진호가 차에 시동을 걸다가 풉, 하고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서우가 그대로 창문에 머리를 박고 싶었다.

둘이 친한 사이 같더니 정말 친한가 보다. 뭘 아냐고 물어보고 싶었는데 여기가 둘만 있는 자리가 아니니 그냥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말을 해 봤자 태윤의 입에서 폭탄만 떨어질 걸 알았기 때문이다.

차가 조용히 출발했다.


 

***


 

출퇴근 시간이 아니라 그런지 이천까지 가는 길은 막히는 곳 없이 뚫려 있었다. 서울 시내를 벗어나자마자 차가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가끔 태윤과 진호가 주고받는 대화 소리만 들리고 누구도 서우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정말 잠이라도 자라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혼자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을 수도 없어서 창밖만 보다가 설핏 잠이 들었다.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얼굴을 머리카락이 살살 간지럽히는 느낌에 겨우 눈을 떴을 때 바로 앞에 손이 보였다. 머리카락 몇 올을 가지런히 뒤로 넘겨 주는 세심한 손길에 지금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활짝 열린 차 문 사이로 상체를 숙이고 있던 태윤이 자신을 보면서 다정하게 말했다.

“일어났어?”

언젠가, 이런 날이 있었는데.

입시 때 너무 힘들어서 제대로 잠을 못 잤던 날로 기억했다.

연습을 하다 현이 나가 펑펑 울면서 하프 어깨에 기대 잠깐 잠들었는데 하필이면 이렇게 날이 좋았다. 잠시 자고 눈을 떴을 때 마주 보는 창문 밖으로 강태윤이 있었다.

자신을 보면서 입을 연 그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데도 무슨 말인지 알아차렸다.

일어났어?

그제야 그가 큰 키로 여름의 햇빛을 막아 주고 서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자신의 얼굴에 드리운 빛이 어느 정도 가려졌다는 걸.

꼭 지금처럼.

“…응, 태윤아.”

그날이라고 혼몽한 기억 속에 착각이 들어 서우가 대답했다. 그리고 이내 놀란 듯 살짝 치켜뜬 태윤의 눈을 보고야 정신이 들었다.

벌떡 허리를 곧추세우다 그와 부딪칠 뻔해 다시 시트에 몸을 묻는다.

“내 이름을 부른 걸 보면 누구랑 착각한 건 아닌데.”

그 대답이 무척이나 다정해서 혹 다른 사람과 착각한 게 아닌지 태윤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좀 비켜 줘.”

반대쪽으로 내리고 싶게 만드는 몸집이었다. 서우가 작은 목소리로 요구하자 태윤이 천천히 문에서 물러났다.

당연히 이천 공장인 줄 알았는데 도착한 곳은 한정식집이었다. 이천 쌀로 만들었다고 적혀 있는 걸 보니 이곳이 이천이긴 이천인가 보다.

“밥은 먹어야지. 여기까지 데리고 나온 김에.”

이곳까지 오는 동안 점심이 지나서인지 주차장에 차들이 한가했다.

진호는 그사이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가자 한정식 뒤쪽의 대나무 숲이 있는 곳에 별채가 있다며 그곳으로 안내했다.

솨아아아-

바람이 지나가며 대나무 잎들이 마치 파도 소리를 냈다. 동그란 돌다리를 건너면서 잠시 걸음이 멎을 정도로 휘어진 채 바람길 소리를 내는 대나무 숲은 장관이었다.

직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태윤이 그런 서우를 가만히 기다렸다.

도심에서 갑자기 바짝 긴장한 채 살다가 동떨어진 것 같은 이곳에 오니 긴장이 풀려서 마음이 술렁거리는 걸 조용히 내리눌렀다.

강태윤을 만나고 난 뒤 매일같이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서 서우가 시선을 돌려 자신을 기다리는 그를 물끄러미 마주했다.

좁혀지지 않을 거리를 가늠할 필요도 없다.

왜 태윤과 은하가 괴로워하는 걸 알면서 이 주위를 자신은 위성처럼 맴돌고 있는 건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음악을 잃어버린 대신 내 가족이나 다름없던 이들은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이 과연 못된 건지 모르겠다.

“나 잠깐 고아원에 있었잖아.”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무도 저를 맡아 줄 사람이 없었다.

당연한 수순으로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 잠시 맡겨졌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할머니가 있었으니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더 씩씩하게 굴고 사랑받으려 따돌림을 당할 때조차 말하지 않고 견뎠다.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과장되게 제 행동을 포장했다.

그런 저를 찾으러 온 건 강태윤이었다. 우습게도 그랬다.

강태윤이 선생님과 함께 자신을 찾으러 왔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선생님 뒤에 서 있었고, 선생님은 그녀를 따라오라고 다정하게 말했지만, 세상에는 그냥 알 수 있는 사실도 있는 법이다.

말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강태윤.

그리고 선생님의 집으로 가자 뛰어나와 제게 안기며 우는 은하.

혹독하고 엄했지만, 자신을 거둬 준 선생님을.

이 가족을 전부 서우는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고맙다고 말 못 했잖아. 데리러 와 줘서 고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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