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_
“어쨌든 내가 제일 필요할 때 내 옆에 없었던 건 사실이잖아.”
떨리는 목소리로 끝까지 은하가 반박했다.
“그럼 나는. 나 역시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미국으로 갔다가 이제 온 건데. 네 옆에 없었던 건 마찬가지야.”
“오빠는….”
“난 그 알량한 혈육이라 괜찮고, 혈육처럼 널 아끼던 윤서우는 타인이라 미워해도 돼?”
“언니가… 언니가 나쁜 거야.”
어쩐지 태윤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윤서우에게 화풀이를 하고 미워하던 제 마음을 정확하게 집어 나긋하게 물어보는 그가 두려워서다.
속을 전부 긁어서 밖으로 뒤집어 놓는다. 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서우에게 이만큼 자신은 상처받았다고 화를 내고 싶어서 그랬다.
웃으면서 그랬냐고 얼마든지 받아 주는 그 얼굴이 더 화가 났다.
“이상하잖아. 너 윤서우 손 봤어?”
“손이 왜?”
태윤의 눈이 싸늘해졌다.
비틀린 입꼬리가 잔악하게 일그러진다. 낮게 혀를 찬 그가 고개를 돌려 빌딩 숲으로 이루어진 창밖을 바라봤다. 뭔가를 꾹 억누르고 인내하는 얼굴이었다.
“가서 한번 잡아 봐. 그래도 모르면 할 수 없고.”
타인의 손을 자세히 볼 일도, 그리고 잡아 볼 일도 거의 없다. 악수할 때라면 모를까.
“지금 언니 손이 무슨 상관이야? 오빠랑 내 이야기를 하고 있었잖아. 미라랑 잘해 봐. 나는 오빠가 걔랑 잘됐으면 좋겠어.”
이를 꽉 깨물며 은하가 말했다.
“좋은 집안에서 자라 똑똑하고 밝고 사랑스럽지.”
객관적인 감상을 태윤이 건조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래. 난 오빠가 그런 사람 만났으면 좋겠어. 얼굴도 모르는, 할아버지가 정해 줄 정략혼보다는 낫잖아.”
“내 취향은 좀 더 감추고 음험한 쪽이라. 안 되겠는데, 어쩌지?”
“오빠!”
“시끄러워. 임산부에게 심한 말 하고 싶지 않으니까 나가. 앞으로 이런 식으로 찾아오지 않도록 로비에 말해 놓을 테니 헛수고하지 말고.”
로비에서부터 그녀가 올라오는 걸 막겠다는 의미였다.
은하가 기가 막혀서 씩씩거렸다.
“어떻게 나한테 이래. 오빠는 내 오빠잖아.”
가여운 아이였다. 태윤 역시 제 동생이 가여웠다. 하지만, 그 이유로 눈과 귀를 가리는 건 용납되지 않았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게 뭘까.”
“놓치고 있다니.”
“강은하. 우리는 어렸고 부모의 죽음을 전부 받아들이기엔 어렸어. 그렇다고 그게 한 사람의 인생을 박살 내는 데 대한 면죄부는 아니야.”
“무슨…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지금!”
“글쎄. 누가 입을 꼭꼭 다물어서 나도 잘 모르겠는데.”
태윤이 자조적으로 웃는다. 그리고 더 이상 상대하기도 싫다는 몸짓으로 손을 휘 내저었다.
그가 그럴 땐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결국 은하가 소득 없이 본부장실을 나왔다.
“나 좀 부축해 줘요.”
질린 얼굴로 본부장실을 나와서 걱정으로 뒤덮인 서우의 시선을 똑바로 보며 은하가 말했다.
“아…. 네. 괜찮으세요?”
“제가 할게요, 주희 씨.”
가장 가까이에 있는 주희가 일어나려는 걸 서우가 막고 은하에게 다가갔다. 은하의 마른 손이 서우의 팔을 꽉 붙잡는다.
눈이 힐끗 저도 모르게 태윤이 말했던 손을 향했는데 겉으로 슬쩍 볼 땐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서우는 은하의 시선을 느끼자 자연스럽게 왼손으로 교묘하게 오른 손등 위를 감싼다.
입을 앙다물고 서우와 함께 본부장실을 나와 엘리베이터가 있는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괜찮아? 병원 안 가도 되겠어?”
“주말에 오빠랑 같이 있었지.”
물음도 아니고 확신이었다.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서우는 침묵을 택했다. 무슨 말을 해도 변명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명하게 흐르던 묘한 기류를 입 밖으로 꺼내 놓기 두려웠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버튼을 누르고 은하가 숫자가 올라가는 것만 노려보면서 입을 열었다.
“괜찮아. 언니 탓하려는 거 아니야. 어차피 둘이 좋아해도 안 될 텐데, 뭐.”
“은하야.”
“외할아버지가 아주 질색하잖아. 엄마 그렇게 고아인 우리 아빠랑 결혼해서 힘들었던 거 아시니까. 언니를 받아 줄 리가 없지.”
주 회장을 들먹이면서 은하가 차갑게 웃었다. 서우를 돌아보면서 여전히 그 웃음이 그대로였다. 마주 웃으려고 했는데 입꼬리가 가늘게 떨려 제 얼굴이 어떤지 알 수 없었다.
“응. 그러실 리가 없지. 나도 알아.”
“그럼 주제 파악 좀 해.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자꾸 오빠 앞에서 얼굴 맞대면 없던 정분도 나겠어.”
“내가 어떻게 할까.”
“나한테 물어보지 말고 언니 잘하는 거 있잖아. 말도 없이 가 버리는 거. 그거라도 하든가.”
자신의 오빠는 행복하길 바랐다.
결혼을 하고 보니 그 바람이 더 확고해졌다. 자신의 엄마처럼 아무것도 없는 남자와 결혼해 스스로를 갉아먹는 생활을 하길 바라지 않았다.
특히 외삼촌 다음으로 회사를 물려받을 사람이기에 더 결혼에 신중했으면 했다.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말을 은하는 막을 수 없었다.
상대를 할퀴고 기어이 피를 보려는 언사였다.
“그럴까? 그럼 네가 좀 편해지겠어?”
다정하게 서우가 은하와 눈을 맞추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상처 같은 거 하나도 안 받은 얼굴로 덤덤하고 여전히 저를 보는 눈이 사근했다.
“…짜증 나서 하는 말이잖아. 왜 내가 짜증 나서 하는 말을 구분을 못 해! 진짜 짜증 나게….”
정말 싫다.
저 덤덤한 얼굴이 상처받으라고 꺼낸 말이었는데 오히려 제 가슴이 어쩐지 떨렸다. 은하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말했다. 그 마음을 다 아는 사람처럼 서우가 가볍게 은하를 안아 줬다.
“울지 마. 별일 아닌데 왜 울려고 그래.”
우리 은하, 착하지.
엄마가 집에 돌아오지 않을 때면 항상 서우가 꾸물꾸물 제 침실 안의 침대로 비집고 들어와 자신을 꼭 안아 주면서 했던 말이었다.
“짜증 나.”
“임신 때는 그럴 수 있대. 그… 호르몬 교란인가 그래서….”
“내가 지금 애가 둘인데 그걸 모르겠어?”
“그래. 네가 더 잘 알겠지.”
서우가 나직하게 웃었다. 그 웃는 기색이 귓가에 스몄다. 왜 여전히 이 사람이 따뜻한지 모르겠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은하가 서우를 밀어내고 혼자 그 안으로 탔다. 애초에 부축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둘이서 이야기할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토요일에 와.”
퉁명스럽게 그렇게 말하는 은하에게 서우가 여전히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으로 제 눈을 가리켰다.
은하가 알아듣고 재빨리 눈가에 남아 있는 눈물 자국을 훔쳤다. 문이 닫힐 때까지 그 자리에서 기다리는 서우를 미련하다고 생각했다.
비서실로 돌아오자 어쩐지 상기된 얼굴의 동료들이 자신을 맞았다.
“서우 씨! 본부장님이 미안하다고 사과하시면서 금요일에 팀 회식하자고 하셨어. 금요일에 시간 되지? 빠지면 안 돼. J 호텔 레스토랑이란 말이야.”
은하가 가고 난 뒤 본부장에게 한 소리 들을 걸 언제 걱정했냐는 듯 분위기는 좋은 쪽이었다.
슬슬 비서실이 한번 뭉치긴 해야 했다며 요즘 SNS에서 가장 뜨는 곳인 J 호텔 레스토랑을 윤경과 주희가 번갈아 말했다.
“예약하려면 최소 두 달 전이라는데. J 호텔이 EA 계열이잖아요. 와, 이럴 때 진짜 우리 본부장님이 생긴 것도 그렇고 로열패밀리가 맞구나~ 그런 생각 든다니까요.”
“서우 씨도 약속 없지?”
“네. 저도 괜찮아요.”
약속이 있어도 빠져야 될 자리가 아니었다.
“상사랑 회식 진짜 싫은데 우리 본부장님은 잘생기셔서 전 회식 끝까지 계셨음 좋겠어요.”
주희가 당차게 말했다. 잘생긴 사람은 그게 상사라도 오래 보고 싶다고 하는 말에 서우가 심란한 마음을 지우고 따라 웃었다.
“그러게요.”
“그쵸? 서우 씨도 우리 본부장님 잘생긴 거 인정하죠?”
어릴 때부터 유명했다. 굳이 지금이 아니더라도 내내 봐 왔으니 안다. 서우가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어느새 열린 본부장실 사이로 눈이 마주쳤다.
입술 끝이 굳는 그녀를 보면서 강태윤이 사무적인 말투로 말했다.
“윤 비서님. 잠깐 들어오시죠.”
다행이다. 사람들이 있는 앞에선 제멋대로 굴진 않는구나.
서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대답했다.
“네, 본부장님.”
무슨 일인가 싶어서 두 사람 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우를 바라봤다.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곤 본부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천 공장 발주 건 말인데.”
“아…. 네.”
왜 그가 다른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했을까. 일적인 이야기가 나오자 서우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말 편하게 해. 둘만 있잖아. 발주하면서 이상한 일은 없었어? 사소한 거라도.”
이미 위에 몇 번 말했다가 가만히나 있으라는 말을 들었었다. 그리고 시키는 일 외에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윽박지름도 겪었다.
계약직에게 회사 내 위치가 협소한 건 당연했다. 전체를 볼 겨를이 없었다.
책상 끝에 한 다리를 올리고 걸터앉아서 자신을 보는 태윤에게 그녀가 입술을 달싹였다.
“…출하 자료를 살피다가 OQC에서 문제가 좀 많이 발생한다는 걸 발견했어. 그래서 PQC3) 담당자에게 연락해서 알아보니까 공정 과정에선 문제가 없던 게 항상 OQC에서 문제가 일어나는 거야. 그때 PQC 담당자도 화를 내고 있었거든.”
태윤이 그녀의 말이 끝나길 기다렸다. 이곳은 아파트 건설의 여러 부품을 만들고 수입하는 회사지만, 이 회사가 가장 독보적으로 유명한 건 아파트의 환기 시스템이었다.
Home IOT 시스템에서도 특화돼 특정 고급 브랜드로 유명한 아파트에만 들어가는 걸로 유명했다. 그 사업에 필요 이상의 돈이 쓰이고 있었다. 대부분 불량으로 판정 난 건에 대한 손해를 고스란히 안는 방법으로 말이다.
그 시스템 하나로 연명하는 곳이나 다름없었는데 막상 들어와서 보니 적자를 훨씬 많이 끌어안고 있었다.
태윤의 손가락이 단단한 허벅지 위에서 꼭 피아노를 치듯 여유롭게 움직였다.
“분명히 PQC 통과한 재고를 내가 알고 있는데 자꾸 불량이라고 하니까.”
서우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답답했던 그녀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아 태윤이 물었다.
“그래서?”
“부장님께도 이야기 드렸는데 그 이후에 PQC 쪽에서 조용하더라고.”
“왜 조용해졌을까.”
“하, 불량으로 판정한 거 빼돌려서 뒷돈 함께 먹기로 했겠지.”
자신도 모르게 본심이 나왔다. 툭 튀어나온 말에 서우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으나 태윤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