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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뒤에선 덜덜 떨면서 몇 번이나 침을 꼴깍 삼켰으면서 막상 올라가면 누구보다 환하게 웃었다.
아래 같은 걸 달고 있는 새끼들이 아직도 그렇게 윤서우라면 환장하는 이유가 있다.
알고 있을까.
여전히 사내새끼들이 모이면 종종 그녀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걸.
누군가의 첫사랑, 선망의 대상이었던 윤서우.
태윤은 그게 못내 불쾌했다. 역시 제 눈에 빛나는 건 모두의 눈에도 빛나 보이는 법인가 싶을 정도였다.
“커피 준비할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서우가 스윽, 말없이 쇼핑백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어제 놓고 가신 옷이요. 그리고 그때 빌려주신 옷도 함께 들어 있어요.”
어제 놓고 갔던 옷.
그 말이 은밀하게 귓가를 간지럽혔다.
“재미없다, 서우야.”
윤서우가 꼬박꼬박 존대하는 걸 보는 재미도 있는데, 역시 별로였다. 그어 놓은 선이 확실하게 보여서다.
책상에 한 손을 올려놓고 턱을 괸 채 태윤의 손가락이 톡, 톡, 두드렸다. 그의 나른한 말에 서우의 선이 흔들리고 동요하는 모습이 그제야 마음에 들었다.
하.
서우의 입에서 결국 한숨이 터졌다.
그냥 어이가 없어서 웃겼다. 눈이 마주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었다. 근사하게 눈을 휘며 웃는 태윤의 모습에서 어린 날을 찾았다.
“나도 이런 거 재미없어. 그런데 재미로 회사 다니는 거 아니잖아.”
“재미로 다니게 해 줘?”
“…아니.”
정말 그렇게 해 줄 것 같아서 서우가 짧은 침묵 뒤에 고개를 저었다. 태윤이 지레 물러서는 그녀를 보고 픽 웃는다.
점점 그에게 이상하게 말린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틀 새에 회사에서 봤다고 서로 정중하게 말하는 게 결국 둘 다 웃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그가 웃는 낯 그대로 의자 뒤로 깊숙하게 몸을 기댔다.
“일단은 이 정도로만 해. 같이 있을 땐 굳이 모르는 척할 필요 없잖아.”
“너를 자꾸 보다 보니까 나까지 이상해지는 것 같아.”
“의식하고 있다니 다행이네. 난 네가 괜찮을까 봐 그게 걱정이었거든.”
그러니까 계속 의식하라는 말에 서우는 기가 막혔다. 뻔뻔한 얼굴로 강태윤이 서우에게 나가 보란 말도 하지 않고 태블릿을 다시 한 손에 들고 천천히 바라봤다.
생각보다 출근은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가기 싫어서 거의 뜬눈으로 날을 샜는데도 그랬다.
무서운 건, 이게 익숙해질까 두려워서다.
강태윤이 당연한 일상에 다시 물들까 싶어서.
우리가 함께했었던 10년.
그리고 혼자 섰던 7년.
3년만 더 버틴 뒤에 그를 만났으면 완전히 괜찮아졌을 수도 있는데. 어쩌면 음악보다 그를 놓기가 쉽지 않았다. 하프는 자신이 다시 하고 싶다고 해도 어떻게 할 수 없게 됐으니까.
그런데 강태윤은 어떻게 할 수 없는 존재에서 이상하게 가깝게 다가왔다. 차라리 은하처럼 좋고 싫은 게 분명했다면 어떻게 대응이라도 할 텐데 경고 없이 떨어지는 폭탄과도 같았다.
“나가 보겠습니다.”
딱딱한 목소리로 서우가 말했다.
태윤이 태블릿을 보며 웃는 기색이 느껴졌다. 하지만 굳이 재미로 회사 다니는 거 아니라는 말을 한 서우를 잡고 놀리진 않았다.
어릴 때도 잘하지 않았던 소꿉놀이를 그와 하는 기분이 들었다.
점심시간이 막 되기 전에 본부장실로 일정에 없던 손님이 찾아왔다.
부른 배를 안고 온 은하였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싸늘해져서 토요일에 자신에게 계속 부재중 전화를 걸었던 걸 기억해 냈다. 계속 태윤과 부딪쳐서 은하에게 따로 연락을 한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본부장님 만나러 왔는데요.”
“실례지만 미리 약속을 하고 오셨을까요?”
최주희가 친절한 미소와 함께 응대했다. 은하의 시선이 서우를 쓱 보고선 대답한다.
“가족이에요.”
“아,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됐어요. 기다리면 나 안 볼 사람이니까.”
약속도 없이 갑자기 쳐들어와 싫은 소리를 하려는 저를 보지 않을 게 분명해 비서실에서 연락이 가기 전 은하가 막무가내로 본부장실 문을 노크와 함께 바로 열었다.
“그렇게 들어가시면….”
“차는 필요 없으니까 아무도 들어오지 마세요.”
문을 닫으면서 그렇게 말한 뒤 은하가 문을 닫았다.
“와…. 우리 본부장님께 혼나겠죠?”
최주희가 혀를 슬쩍 빼면서 말했다. 이러고 손님이 간 뒤에 혼이 나는 건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가족이라는데 힘으로 끌어낼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 좋은 일로 온 건 분명 아니었기에 상사의 후폭풍까지 보통 비서실은 감내해야 했다.
강태윤과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가 화낼 땐 어떻게 대처할지 알 수 없어서 일순간 비서실 내에 싸한 침묵이 감돌았다.
“서우 씨, 그렇게 굳어 있을 필요 없어. 어차피 한 소리 듣고 끝날 텐데, 뭐.”
윤경이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굳어 있는 서우에게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은하가 저렇게 화가 나서 온 게 토요일 일 때문이라는 걸 안다. 잘 말했어야 했는데 자신으로 인해 이렇게 온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다.
그런 서우를 본부장에게 혼나는 게 무서워서 얼굴이 굳은 신입으로 착각한 윤경이 계속 괜찮을 거라고 다독였다.
“오빠.”
계속 전화를 받지 않고, 본가에 가도 그가 나갔다는 말만 듣고 난 뒤라 화가 나서 은하는 이곳까지 찾아왔다. 그날 미라에게 얼마나 면이 서지 않던지 제 오빠가 원망스러웠다.
올라오는 길에 서우를 봤다는 미라의 한마디에 둘 다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둘 다 받지 않았다. 심지어 서우는 자신에게 어떤 연락도 없어서 더 화가 났다.
“왜 그렇게 화가 났어?”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고개를 모로 기울고 있던 태윤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맥이 풀리는 기분이 들어 은하가 잠시 아랫배를 한 손으로 받치며 숨을 골랐다.
“…토요일에 뭐 했어. 일요일은?”
“내가 내 사생활까지 너한테 다 이야기해야 하나.”
“해. 해야지. 세상에 나랑 오빠 둘 뿐인데 나한테 해야지. 오빠가 그렇게 가 버리면 미라는 어떻게 해. 내 체면은. 내 체면이라는 것도 있잖아.”
목소리가 어쩐지 떨려 나왔다.
어릴 때부터 오빠인 태윤과는 그리 친하지 않았다. 분명히 한 핏줄을 타고 태어났는데 항상 그와 자신 사이에 벽이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그 벽 사이엔 서우가 있었다.
서우가 집으로 들어오고 난 뒤, 은하는 태윤이 조금 편해졌다.
냉랭한 제 오빠가 가끔 사람처럼 웃기도 했다. 서우가 옆에 있으면 그랬다.
그래서 은하도 괜히 태윤과 친해지려고 일부러 더 서우와 살갑게 지내고, 붙어 있고, 자매처럼 따랐다.
그것도 옛날 일이지, 이젠 아니었다.
여전히 마음에선 자신이 힘들 때 곁을 떠난 두 사람에 대한 원망이, 특히 서우에 대한 원망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미우면서도 마음속으론 완전히 미워하지 못한다.
불편한 애증의 관계. 그게 저와 서우의 사이로 돌변했는데 한 핏줄인 태윤의 심사를 은하는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당연히 저처럼 서우에게 화가 났을 거라 생각했다. 어쩌면 괘씸해서 혼을 내 주려 할지도 모른다고.
그럼 자신이 나서서 말려야지, 그런 생각도 했었다.
여전히 서우가 제 오빠를 좋아하고 있을까 봐, 그리고 제 오빠 역시 같은 마음일까 봐 불안했는데 그래도 은혜를 저버린 서우를 같이 용서하지 않을 거라 여겼다.
“그래서 안 쫓아내고 여기서 이야기 들어 줬잖아.”
그것만으로 은하의 체면을 다했다는 이야기였다.
“…아니지? 차라리 괴롭혀. 배은망덕하게 분수도 모른다고 윤서우 차라리 괴롭히라고!”
“네가 그랬던 것처럼?”
저게 한 핏줄인 동생을 보는 눈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태윤이 서늘하게 그녀를 보고 있었다. 은하가 섬찟해서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잘 모르겠다. 강태윤은 가족 안에서도 항상 겉돌았다. 그를 감싸 주는 건 오로지 자살한 아버지뿐이었다.
그가 죽고 난 뒤로 엄마는 더 히스테리를 부렸고 자신은 필사적으로 엄마 눈에 들기 위해 눈치만 봤다.
“괴, 괴롭힌 거 아니야. 난 그냥….”
“언제까지 아이처럼 굴 거야. 윤서우가 전부 받아 주니까 까불지.”
“언니가 잘못한 거잖아! 어떻게 엄마 장례식장에도 안 오고 그렇게 딱 끊을 수 있어? 자길 데리러 간 건데! 그러다 사고가 난 건데 어떻게 그렇게….”
“그래서 네가 애라는 거야. 이상하지 않아?”
“뭐?”
강태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흐트러진 슈트를 바로 잡는다. 그가 책상 앞쪽으로 걸어와 은하와 마주 보고 섰다.
크고 탄탄해서 거기에 맞는 슈트가 꽉 조여 와 위압적으로 보였다.
“윤서우가 왜 그랬는지 생각해야지.”
“사, 사람들 시선이 무서웠겠지. 결국엔 언니를 데리러 가다가 엄마가 죽은 거니까. 손가락질당할까 봐 도망친 거겠지!”
“걔는 고아에 가난뱅이에 독종, 후원자 뒷구멍 핥아 주면서 겨우 살아남았다고 그 얼굴에 대고 직접 말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애야. 그런데 고작 그 손가락질이 무서워서 피했다고?”
태윤이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웃었다.
윤서우의 목줄을 쥐고 흔들어서라도 진짜 대답을 듣고 싶은 걸 겨우 참고 있는데 은하가 와서 부채질을 하자 얼굴에 인내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