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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발자국 (17)화 (1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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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바지 길이가 좀 더 짧았다. 복사뼈 한 뼘 위로 올라간 바지는 트레이닝복이 아니라 어쩌면 레깅스 같기도 했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위를 따라가다가 뭔가를 느낀 서우가 시선을 재빨리 아래로 내렸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

여전히 웃는 낯인 서우를 보면서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어 내며 태윤이 묻는다.

묻은 부분만 대충 씻고 나올 줄 알았는데 남의 집에서 샤워까지 할 줄은 몰랐다.

“네가 너무 뻔뻔한 거 같아서 웃었어.”

보통은 그 부분만 대충 씻고 나오는데 누가 샤워까지 하냐며 서우가 눈가를 접고 말했다.

자신이 했던 생각을 지우듯 눈빛을 숨긴다. 괜히 태윤에게 타박하면서 씻었으면 나가라고 손짓하는데 그가 도리어 침대 쪽으로 걸어왔다.

“그래? 그럼 밥 먹자.”

“뭐?”

“뻔뻔하다며. 배고파. 나 아무것도 못 먹었어.”

서우의 옆에 딱 붙어 앉아서 선풍기 바람을 같이 쐤다.

드러난 팔이 태윤의 습기 머금은 팔과 맞닿았다. 훅, 하고 사람의 체온이 전달되자 어쩐지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태윤은 아무렇지 않은지 태연하게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었다.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기가 툭, 툭, 제 어깨 위까지 튀었다.

“집에 먹을 거 없어. 너희 집 가서 먹어.”

“거기도 먹을 거 없는데.”

어제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아까 도시락을 먹는 시늉이라도 한 건 자신뿐이었다. 다른 곳에서 살지만 생활은 비슷해서 또 픽, 웃음이 샜다.

태윤에게서 몸을 떼고 벽에 좀 더 가까이 붙었다.

“본부장님, 우리 그냥 회사에서만 보면 안 돼요?”

반쯤 진담을 섞어서 서우가 말했다. 회사에서의 거리는 아주 멀어서 괜찮았다. 윤서우가 윤서우로 있을 수 있었다.

어릴 땐 보이지 않던 거리가 확실하게 현실적으로 느껴져서 원래 이게 맞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의 강태윤은 너무 가까웠다.

이렇게 우리가 가까운 시절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그에겐 7년의 간극이 느껴지지 않았다.

좋아했던 마음은 제 것인 줄로만 알았는데.

강태윤은 자신에게 친절하고 잘해 줬지만, 그것뿐이었다. 좋아했던 건 오로지 서우 혼자였다.

가끔은 생각났다. 그에게 저는 은하와 같은 여동생이었던 느낌일지, 그것도 아니면 그저 그의 동정으로 집에 들어와서 후원을 받은 사람이었는지.

이제는 무의미한 게 궁금한 밤이 분명 있었다.

“좀 더 자주 봐야 나랑 뭘 하든 할 거 아니야.”

퇴근 시간은 보통 밤이라 그와 뭘 할 시간이 없다. 그 시간까지 독점하고 싶다는 욕망을 태윤은 스스럼없이 드러냈다. 더 이상 모른 척하기엔 꼭 애가 닳은 사람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서우는 강태윤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꼭 자신이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모습이기에 그랬다.

“가. 너 가.”

서우가 손으로 현관을 가리켰다. 빨리 가라고 밀어내고 싶었는데 차마 막 씻고 나온 강태윤의 몸에 손을 대지는 못했다.

알 수 없는 얼굴로 웃으면서 아예 침대에 뒤로 두 팔을 뻗어 불량하게 걸치곤 머리를 살짝 뒤로 숙인다.

올라간 콧날이, 그리고 턱 끝이 뚜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마치 이 집의 주인이 자신이 아니라 강태윤 같은 천연덕스러움이었다.

“솔직하게 말해?”

“뭘.”

“네 냄새 나서 가기 싫어.”

서우를 보지 않고 여전히 조금 얼굴을 들어 올린 채 제 방의 어딘가를 바라보며 태윤이 말한다.

공기 중에 떠도는, 선풍기의 바람 사이로 이 좁은 집 안을 가득 채운 그녀의 체향을 느른하게 맡고 있었다.

혼자 사는 작은 원룸에 그가 들어가 주인 행세를 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묘하고 그리운 냄새가 나는데 몸이 늘어졌다. 잠이 오는 건지 태윤의 눈꺼풀이 깜박였다. 속눈썹이 낮게 드리워진 채로 입꼬리가 올라간 채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게 이상하게 피곤해 보였다.

눈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짚으면서 꾹 누른다.

“잠깐만 있을게.”

그렇게 말하는 강태윤은 여전히 이쪽을 보지 않았다. 낮은 목소리에 담겨 있는 어쩔 수 없는 피로가 묻어 나왔다. 그가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걸 간과했다.

서우는 항상 이 남매에게 약해졌다.

은하가 자신에게 하는 말이 전부 상처로 돌아와도 그게 못내 미워하지 못하고 귀여운 것처럼, 곤란하다고 하면서 강태윤을 완전히 밀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다 커 버린 이상, 한 집에 함께 있는 건 누가 봐도 이상한데.

“내가 나가 있을 테니 알아서 가, 그럼.”

서로의 숨이 섞이기라도 할까 봐 도망가는 것처럼 서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윤의 시선이 그녀를 그제야 따라왔다.

“그냥 있어. 네가 나가면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잖아.”

그렇게 말한 태윤이 침대에 기댄 그대로 눈을 감았다. 옥탑이라서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워도 하나 좋은 점은 빛이 잘 든다는 점이었다.

일어선 그대로 다시 앉지도 못하고 눈을 감은 그를 내려다봤다.

빛이 태윤의 드러난 팔의 살갗, 그리고 목덜미, 볼 위로 쏟아지자 살짝 서우가 발을 옮겼다.

빛을 등지고 섰다.

제 그림자에 드리워진 강태윤이 보였다.

여전히 물기를 닦지 않은 덜 마른 머리카락이 내려오자, 회사에서의 본부장 강태윤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머리를 넘겼던 건 나이가 어려 보이지 않기 위해서가 아닐까.

정말 피곤했는지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서우는 문득, 이 순간을 아마 영원히 곱씹게 될 거라는 걸 불현듯 깨달았다.

문이 아닌, 커다란 통창을 열고 자신에게 들어오라고 말했던 어린 강태윤을 종종 생각하듯이.

휴대폰과 이어폰만 챙겨서 서우가 잠이 든 강태윤을 뒤로하고 집을 빠져나왔다.

그러기 전에 창문의 커튼을 가볍게 치는 걸 잊지 않았다.



 

멀리 가지 않았다.

제집을 두고 완전히 벗어날 생각도 없었다. 그저, 무방비한 강태윤과 거리를 두고 싶었을 뿐이다.

옥탑의 옥상에 있는 평상 위로 눕자 찜질방 열기 못지않은 뜨거움에 등을 몇 번이나 뒤척였다. 있으나 마나 한 파라솔 하나가 겨우 햇빛을 가려 줬다.

서우가 이어폰을 꽂고 익숙하게 즐겨찾기에 저장된 동영상 하나를 클릭했다.

카메라는 건반 위에 가지런히 놓인 손가락을 주목하고 있었다. 동영상이 몇 분, 몇 초인지, 눈을 감고서도 동영상과 완벽하게 그 음을 기억해 낼 정도로 돌려 봤다. 인터넷 세상이란 건 이렇게 편리했다.

유명한 연주자의 유튜브 채널이었다.

하지만, 연주자의 얼굴은 나오지 않는다.

드뷔시의 달빛.

누워서 파라솔의 끄트머리를 보며 여전히 현실적이지 않은, 제 방의 강태윤을 생각했다.

결국 서우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한 손으로 눈을 가렸다. 빛이 어슴푸레 차단되자 묵히고 덮어 놓은 감정마저 거세된 느낌이 들었다.

느리게 귓가에서 감미롭게 흐르는 그 달빛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이것만은 도저히 끊을 수가 없어서다. 전부 괜찮았는데 이 음악이 없인 고통 속에 멀쩡하게 제정신으로 있을 수 없었다. 눈꺼풀을 가린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렸다.

꼭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눈꺼풀 위를 탁탁 미약하게 두드린다.

건반 위에 가지런히 놓인 예쁜 손가락, 카메라에 찍히지 않은 단정하고 서늘한 얼굴이 자신을 보면서 잠시 휘어진다.

영상을 찍은 건 서우였다. 장난처럼 잠이 안 올 때 듣겠다고 하자 별거 아니라는 듯 강태윤이 쳐 준 피아노 음악이었다. 화질이 흐릿한 카메라가 차마 그걸 치는 강태윤의 전신을 잡지는 못했다.

여전히 영상에는 수줍음이 남았다.

카메라를 올리면 피아노를 치는 강태윤의 얼굴을 마주해야 하니까.

그게 못내 부끄러웠던 시절이 있었다.

음악에 집중하자 겨우 떨림이 멎고, 서우가 진정했다. 그리고 미처 느끼지 못한 피곤이 몰려왔다.



 

비가 끊임없이 내렸다.

어릴 때 자신을 두고 먼저 돌아가신 부모님과 할머니를 같이 모신 납골당에 간 날은 비가 많이 내렸다.

간밤에 내렸던 눈이 녹지 않았는데 비까지 내리자 연신 사고 소식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래도 그날은 경기도 외곽에 있는 납골당을 꼭 찾고 싶어서 갔다가 발이 묶였다.

비가 쏟아지고 택시까지 끊겨 서우가 서울로 돌아가기에 좀 늦을 것 같다고 선생님께 전화를 한 지 두 시간이 지났다.

빗줄기가 점점 약해지고 있어서 괜히 초조한 마음이 들어 납골당 밖으로 나왔다.

우산을 쓰고 지대가 높은 납골당 아래로 내려와 지나가는 택시라도 잡아서 서울로 가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선생님의 마지막 목소리가 마음에 걸렸다.

지금 태윤이랑 같이 있는 거 아니지? 선생님이 믿어도 되지?

태윤은 주 회장이 불러 나갔는데 자꾸 자신과 태윤의 사이를 의심하는 선생님으로 인해 서우는 답답했다.

태윤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선생님이 먼저 알아차릴 줄은 몰랐다.

연신 서우를 믿는다고 당부하는 스승에게 저 혼자만의 마음이니 너무 걱정 마시라고 웃었다.

강태윤은 누구나 좋아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으니 당연했다. 저 말고도 그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은하는 자신감을 가지라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래도 태윤이 미국으로 유학 가기 전에 고백해 보고 싶었는데 선생님이 알게 됐다. 절대 강태윤을 흔들지 말라고, 이러려고 너를 후원해 준 게 아니라는 단호한 말에 제 주제를 깨달았다.

은인인 선생님이 그렇게 반대하는데 이깟 마음이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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