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_
강태윤은 내내 정해진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 성격은 교만에 가까울 정도로 오만했지만, 영리했다. 그래서 굳이 주철원 회장이 ‘사고 치지 않고’라는 조건을 왜 붙였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강태윤이 사고 같은 걸 칠 리 없다.
“뭘 묻는 건지 모르겠어.”
입안에 케첩 맛이 진하게 남았다. 혀가 떨어져 나갈 것처럼 아리다.
“손자에게도 거래를 하는 분인데, 타인인 너라고 다를까.”
“넘겨짚지 마. 그런 거 없어. 그럴 분도 아니고.”
“넌 가끔 우리 가족을 굉장히 상식적인 좋은 사람들로 봐. 옆에서 그렇게 겪어 놓고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는 걸 가끔 이해할 수가 없어.”
“선생님은 좋은 분이셨어.”
“가족이라고 했지, 그게 네 선생님이자 내 어머니란 소린 안 했는데.”
서우가 입을 다물었다. 입술 끝이 씹힌다.
객관적으로 타인이 봐도 어머니는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자식에게도 혹독했던 사람이 타인인 그녀에게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었을 리 없다.
사람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 욕망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주하영, 그의 어머니였다.
“밥 다 먹었어. 먼저 일어날게.”
도망치듯 그 자리에서 일어난 서우가 제 반쯤 먹은 도시락을 치우려다 그대로 바닥에 쏟았다.
그런데 일어난 타이밍에 태윤도 함께 일어나 자신에게 한 발짝 다가왔을 때 쏟아 그의 무릎 아래로 음식물이 흘렀다.
당황한 얼굴로 주저앉아 치우려고 손을 뻗었다. 그런데 먼저 앉은 이가 있었다. 떨리는 서우의 손을 잡고 무심한 얼굴로 강태윤이 말했다.
“서우야.”
엉거주춤한 채 그를 바라봤다.
손목에서 시작돼 바들바들 떨리는 제 손가락에 온 신경이 갔다. 한 번씩 당황하거나 피곤할 때마다 그랬다. 괜찮은 척 필사적으로 굴려고 할 때마다 놀리듯이 더 떨리기만 했다.
“괜찮아.”
괜찮냐고 묻는 것도 아니고 그저 괜찮다고 말한다.
강태윤이, 아무것도 모르면서 괜찮다는 말을 던진다.
목 끝에서 내내 뭔가 걸려 나오지 않았다. 강태윤을 다시 만나고부터 내내 통증처럼 삼켜 왔던 게 터져 나오려 했다.
그건 아마도 가장 끔찍한, 들어 본 적 없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일 것 같아 서우가 끝내 숨과 함께 삼켜 냈다.
“제가 치울게요.”
수정이 다가와 치우겠다고 해도 대부분은 이미 태윤이 손이 음식물을 치웠다.
“죄송합니다.”
그가 한 일이 아님에도 예의 바른 사과를 한다. 수정은 처음 보는 서우의 혼란스러운 얼굴을 보면서 눈을 굴렸다.
“미안해, 나 잠깐만….”
태윤이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기 전에 서우가 도망치듯 사과를 뱉고 밖으로 나갔다. 손끝이 차가웠다. 답답한 숨을 내쉬자 더운 공기가 훅 끼친다.
이내 뒤처리를 하고 따라 나온 강태윤을 향해 돌아섰다.
바닥의 음식물을 집어 치우느라 미처 닦지 못한 더러워진 손과 그의 트레이닝복 밑단까지 자국이 튀어 있었다.
하얀 러닝화에 묻은 오물이 더 눈에 띈다. 이대로 각자 갈 길 가고 회사에서나 공적으로 보자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말문이 턱 막힌다.
자신이 아는 강태윤은 항상 흠 하나, 티 하나 없이 말끔했다.
타인에게 흠 잡히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선생님의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아서라고 여겼다. 십여 년을 그와 함께 지냈는데 흐트러진 모습을 보지 못했다.
“신경 쓰지 마. 집에 가서 씻으면 돼.”
자신이 뭘 신경 쓰는지 아는 얼굴로 태윤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어제 그 집에서 잔 거야?”
“슬슬 옮길까 해서.”
그럼 그 별채엔 여사님 홀로 남는구나.
창밖으로 계절이 가는 것을 바라보며 죽은 딸을 그리워하면서. 긴 여행을 끝내고 딸이 다시 돌아오길 바라면서.
머리로 그 집까지의 거리를 계산하다가 이내 머뭇거렸다.
자신이 엎지른 음식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다.
“집이 근처거든. 괜찮으면 씻고 가.”
이 말이 뭐라고 목 안쪽이 간지러웠다. 목소리 끝이 조금 떨렸는지도 모른다. 서우의 말에 두말하지 않고 태윤이 가깝게 걸어왔다.
가까이 말없이 서자 그의 체구가 더 크게 느껴졌다. 재빨리 등을 돌려 먼저 앞서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따라오는 태윤의 기척에 몸이 잔뜩 예민해졌다.
“미안해, 나 때문에.”
옷도 버리고.
서우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렇게 사과를 건넸다.
“괜찮아. 네가 뭘 해도.”
그런 걸 뒤집어쓴 적은 처음일 텐데. 누구라도 냄새나는 음식을 뒤집어쓰고 괜찮을 리 없다.
조금 더 빨리 그를 씻게 해 주는 게 좋을 것 같아 걸음을 재촉하자 편의점에서 집까지는 얼마 되지 않아 금세 도착했다. 3층 빌라를 올라갔다. 그리고 옥상으로 가는 철제문을 열었다.
원룸 형식으로 되어 있는 옥탑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옥탑방 바로 앞에 있는 빨래 건조대에서 커다란 남자 트레이닝복 바지와 티셔츠를 걷어 한 손에 걸쳤다.
그리고 비밀번호를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현관에서 비켜야 했다. 태윤이 들어오자마자 꽉 찼기 때문이다.
“저쪽이 욕실. 이걸로 갈아입고 가.”
어차피 문은 현관문과 욕실문 하나뿐이라 가리킬 필요도 없는데 그렇게 알려 줬다.
태윤의 시선이 서우의 어깨너머를 바라봤다. 꼭 희옥도 그 자리에 서서 그렇게 봤는데 알려 줄까 하다가 말았다.
싱글용 매트리스 하나에 옆에 있는 작은 책장. 생활감이라곤 없는 간이 주방이 전부였다.
창문을 여는 걸 깜박해 해가 한창인 시간이 되자 오히려 바깥보다 더 더웠다. 그에게 옷을 건네주고 서우가 창가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혹시 태윤이 더울까 봐 별 도움은 안 되겠지만 선풍기도 틀어 그를 향해 돌려 줬다.
“누구 거야?”
누가 봐도 남자 것이 분명했다.
그것도 거의 태윤의 몸집만 한 남자.
고저 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묻는 태윤을 보면서 서우가 시선을 슬쩍 옆으로 돌렸다.
“남자 사는 티를 내는 게 좋다고 해서 인터넷으로 산 거야. 동네에 가끔 이상한 사람이 돌아다니기도 한다고 해서.”
그의 눈을 똑바로 못 보는 이유는, 기껏해야 가짜로 걸어 둘 남자 옷을 사면서 무의식중에 태윤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쯤은 크지 않았을까. 머리로 생각하고 지워 버렸는데 얼추 맞을 거 같았다.
고등학교의 마지막까지도 강태윤은 컸다. 지금은 그보다 더 단단해진 느낌이었다.
“그럼 다행이고.”
왜 네가 다행인데?
서우가 미처 묻기도 전에 태윤이 신발을 벗고 한 걸음 만에 욕실로 들어갔다.
그걸 보며 선풍기를 다시 제 쪽으로 돌렸다. 미적지근한 바람에 갑자기 달아오른 얼굴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괜히 손부채질까지 더했다.
방음이 되지 않는 집 안에 물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제 집에 들어와 씻는 것은 처음이었다. 희주도 이곳에 들어와 본 적 없는데. 와 보면 어떻게 사람이 이런 곳에서 사냐고 화를 낼 게 뻔해서 한 번도 초대한 적 없다.
이깟 물소리가 뭐라고 여기에 혼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있다는 생각만으로 정말 꼭 사람이 사는 집 같았다.
쏟아지는 물줄기 소리에 점점 달아오른 얼굴도 식혀졌다.
침대에 기대 무릎을 세우고 얼굴을 그 사이에 묻었다.
“분명히 아무렇지 않았는데.”
10년을 한 악기를 놓았는데 상실감 뒤에는 결국 제 것이 아니었다는 포기가 뒤따라 왔다.
마음이 그걸 포기했다는 걸 인정하는 시기가 언젠가는 찾아온다. 그래서 서우는 괜찮았다.
희주에게 말했던 대로 여전히 마음은 좀 술렁이지만, 클래식 공연을 보러 다니고 여사님에게 달에 한 번씩 엉망인 연주를 해 주고, 은하의 집에 가서 아이의 레슨을 어설프게 봐 주는 것도 괜찮았다.
인정했기 때문이다.
자신은 절대 그 빛나는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현실은 8평 남짓한 이 옥탑방이라는 사실을.
“너는 왜 그럴까.”
강태윤을 하프보다 더 빨리 잊었다고 자만했다. 내 고통이 끔찍해서 가장 먼저 그를 지워 버렸다는 게 맞다. 언젠가 다시 만나도 은하를 대할 때와 똑같을 거라 여겼는데 강태윤은 거침없었다.
자의든 타의든 그가 자신의 집에서 욕실을 쓰게 될 상황이 올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어떤 상상도 해 본 적 없는데 강태윤이 여기에 있다.
어쩌면 자만했던 제 마음보다 은하가 더 눈치 빠르게 알아채서 불안해했는지도 모른다.
“떨지 마. 떨지 마, 제발.”
서우가 주먹을 가볍게 쥐고 심장 근처를 툭툭 쳤다.
떨지 말라는 게 가슴인지, 정처 없는 제 손인지 어느 쪽에 대고 하는 말인지도 모르면서 그랬다.
나는 우리 태윤이랑 서우가 각자 맞는 길을 갔으면 좋겠어. 선생님 말 무슨 말인지 알지? 서우는 똑똑해서 잘 알 거야. 네가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서포트해 줄게. 서우는 지금까지 선생님 말 잘 들었잖아. 한 번도 날 실망 안 시켰어.
네. 그럼요.
서우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아무것도 없어도 선생님의 눈에 들 정도로 하피스트로 이름을 알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까마득하게 높은 곳에 열심히 날갯짓을 하면 어깨를 같이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고등학교도 채 졸업하지 못한 어린 여자아이는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은하가 자신을 좋아하고, 선생님은 엄하지만 후원을 아끼지 않고 그녀의 자식들이 받는 모든 교육을 똑같이 제게도 시켜 줬기 때문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까불었다.
그때의 저를 순수했다고 칭해야 할지, 어리석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서우가 웃음이 나와서 웃었다. 그때 욕실 문이 열리고 무지 색의 발판에 커다란 발이 쓱 내밀어졌다.
발판보다 더 큰 발을 보며 저도 모르게 발끝부터 위를 훑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