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_
머리를 덜 말렸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물기에 어깨가 젖는 느낌은 썩 좋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희옥의 방문으로 외출 의지를 상실했다가 그래도 배가 고파서 밖으로 나왔다. 강태윤 때문에 충격받아서 어제저녁부터 뭘 못 먹었더니 아무것도 없는 집에서 오늘까지 굶을 순 없었다.
슬리퍼를 끌고 편의점으로 가는데 아침 조금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해가 쨍쨍했다.
“수정이 안녕~”
편의점 직원보다 더 먼저 인사하며 안으로 들어가자 낯이 익은 직원이 서우를 알아봤다.
“언니, 또 도시락 사러 왔어요?”
“응.”
“에이~ 맨날 이런 걸로 배 채우면 안 된다니까요.”
올해 대학 신입생이라는 수정이 그 나이 또래답게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자신의 20살은 어땠는지 기억이 희미해 수정을 볼 때마다 조금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가까워지게 됐는지도 모른다.
“간편하잖아. 먹고 가면 쓰레기도 집에서 안 나오고.”
“주말이잖아요. 언니 데이트 안 하세요?”
“주말에 너도 알바하잖아.”
“저야 용돈이 필요해서 그런 거고요.”
자신이 한마디를 할 때마다 까르르 웃으면서 말을 덧붙이는 게 보기 좋아서 서우가 따라 웃었다.
도시락 코너 쪽으로 가며 아무거나 집어 들고, 그 옆에 있는 음료 코너에선 시간을 조금 더 지체했다. 자신이 먹을 게 아니라 수정에게 주고 싶어서였다.
입으로 들어가면 그만이라는 주의라 아무거나 먹는 자신과는 다르게 맛있는 음료를 골라 주려 고심했다.
딩동.
유리문이 열리고 새 손님이 왔다는 벨이 울려 저도 모르게 서우의 시선도 그곳으로 슬쩍 돌아갔다.
그리고 그 순간 그대로 선반 아래 주저앉았다.
그건 그냥 본능이었다.
“…왜?”
자신도 모르게 내뱉었다가 입을 틀어막았다.
왜, 강태윤이 여기 있지?
헛걸 봤나 싶은데, 다시 확인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저벅거리는 소리가 거침없이 났다.
이쪽으로 오게 되면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를 들키게 되는데 그렇다고 지금 일어서기엔 늦었다. 손에 반쯤 기울어진 오므라이스 도시락을 들고 숨을 참았을 때였다.
발소리가 옆쪽 선반을 넘어 들리고 이내 뒤에 있는 냉장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1,600원입니다.”
계산을 하고 곧장 다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 걸 보니 나간 듯했다.
서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재빨리 커피 음료 하나를 들고 계산대로 갔다.
“아는 사람이에요?”
수정이 궁금한 눈으로 서우에게 물었다.
“아니?”
“에이, 저 손님 들어오자마자 언니 주저앉던데요?”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듯 서우가 바라보자 수정이 코너 쪽 천장에 있는 거울을 가리켰다.
거기서는 자신이 납작 주저앉아 있는 게 적나라하게 보여 더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그냥… 아는 사람.”
“전 남친? 완전 잘생겼어요. 언니, 왜 헤어졌어요. 그렇게 사지 멀쩡한데.”
아니라고 말한다 해도 믿을 얼굴이 아니었다.
진짜 잘생겼다면서 연거푸 말하는 수정에게 카드와 커피 음료를 같이 줬다.
“앗, 언니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방긋 웃으면서 커피를 흔들어 대는 수정을 보면서도 서우는 마주 웃어 줄 수 없었다.
반쯤 밥이 아래로 쏠린 도시락을 계산하고 평소 같으면 편의점에서 먹고 올 텐데 그대로 들고 터덜거리며 그곳을 나섰다.
“진짜 우연히라도 마주치면 안 되는 사이 아닌가.”
이 넓은 서울 땅에서 아무리 태윤이 어제 자신에게 보여 줬던 집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해도 이렇게 마주치는 건 이상했다.
기력이 다한 얼굴로 서우가 중얼거렸다.
“뭐가?”
“악!”
방심하던 차에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비명과 함께 서우가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쉽게 놀라는 체질은 아니었지만, 이미 이곳에 있어선 안 되는 강태윤을 마주치고 납작 엎드린 순간 한 번 놀랐던 가슴이다.
그런데 갑자기 말을 거는 태윤으로 인해 연속해서 놀라자 비명이 절로 터졌다.
그렇지 않아도 까만 머리가 땀에 젖어 번들거린다. 간편한 트레이닝복을 입고 러닝을 한 듯 거칠어진 숨이 바로 옆에서 들렸다. 살짝 상기된 뺨과 방금 물을 마셨는지 촉촉한 입술이 느리게 서우의 눈에 보였다.
아주 잠깐, 고등학교 시절 운동장에서 마주친 강태윤이 생각났다.
그때의 앳된 느낌은 어디에도 없는데 그냥 생각이 나서 시선을 돌리지 못하고 너무 뚫어져라 바라봤다.
“윤서우.”
그 기억의 조각을 지우려는 듯 서우의 눈꺼풀이 깊게 아래로 눌렸다 다시 뜬다. 잠시 멍했던 그녀가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무표정하게 태윤을 마주했다.
이 넓은 서울 하늘 아래, 본가의 저택도 아닌 곳에서 우연히 만날 확률이 몇이나 될까.
그런 쓸데없는 게 서우는 궁금해졌다.
“그냥 가던 길 가.”
건조한 목소리가 서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다닥다닥한 오래된 빌라가 즐비한 곳에서 유독 강태윤은 눈에 띄었다. 이 길 아래로 쭉 가다 보면 점점 도보와 도로부터 달라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좀 더 가면 태윤과 어울리는 저택들과 타운 하우스들이 즐비한 곳이 나왔다.
극명한 빈부 격차의 대비가 존재하는 곳의 기울어진 한쪽에 자신이 있었다.
꼭 고장 나서 기울어진 저울의 반대쪽 높은 곳에 강태윤이 있는 것 같다.
그의 시선이 손에 들린, 꼭 저처럼 한쪽으로 기울어진 도시락을 바라봤다.
당장 내일 어떻게 강태윤을 봐야 할지 막막했는데 이렇게 하루 전에 만난 걸 보니 면역력이라도 생기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빨리 그가 돌아서길 바랐다.
“강태윤!”
서우가 당황해서 큰 소리를 냈다. 자신의 손목을 잡고 강태윤이 다시 나왔던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엉망이 된 도시락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오므라이스가 아니라 비빔밥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어서… 오세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강태윤과 자신을 보는 수정의 눈에 호기심이 감돌았다. 전 남자친구냐고 물었을 때 아니라고 했는데 그새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바뀐다.
아프진 않지만, 자신이 결코 뿌리칠 수 없을 정도의 힘. 손목을 감싼 그의 손이 뜨거웠다.
편의점에서 그와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것과 동시에 태윤이 멈춰 선 곳은 도시락 코너였다. 서우의 것과 똑같은 오므라이스를 집어 들고 심상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밖에서 기다리라고 하면 갈 것 같아서.”
“뭐?”
“나도 식전이야. 같이 먹어.”
“지금 여기서 도시락을 먹자고? 나랑?”
너 진짜 왜 이러니.
그 말이 목 끝까지 나오려고 했다. 농담기라곤 없는 진지한 얼굴로 태윤이 고개를 끄덕인다.
여러 일을 겪고 어릴 땐 마인드 컨트롤이 중요해 무대에 설 때마다 평정을 유지해야 해서 자신이 꽤 표정을 잘 포장한다고 여겼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마저 까먹었는지 자꾸 무너지려는 얼굴을 강태윤 앞에서 어떻게 주체할 수가 없다.
엉망이 된 제 도시락을 태윤이 그의 것과 함께 가져간다.
작은 간이 테이블에서 비닐을 벗기고 뚜껑을 열려는 그에게 결국 보다 못한 서우가 한숨처럼 말했다.
“…계산하고 전자레인지에 데워야지.”
이런 거 한 번도 안 해 본 도련님 티를 그대로 내니까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하, 한숨과 함께 플라스틱 의자에 앉은 서우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허탈하게 어깨를 떨며 웃었다.
굳은 얼굴로 진지하게 도시락을 들고 계산대로 향하는 저 넓고 단단해 보이는 뒷모습이 낯익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다.
곧 데워진 도시락을 들고 태윤이 다가왔다.
이리저리 흔들려 엉망이 된 제 도시락을 그가 앞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멀쩡한 도시락이 서우에게 내밀어졌다.
더 이상 왈가왈부할 힘도 없어서 그냥 일회용 젓가락을 뜯으며 서우가 불편한 침묵을 고수했다.
왜 한가로운 일요일 오후에 상사인 그가 자신의 앞에 있는지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거기에 편의점 도시락이라니.
편의점 도시락이 그렇듯 MSG 범벅에 자극적인 맛 외에는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말없이 꾸역꾸역 먹는 그녀를 태윤이 바라봤다.
“어머니의 죽음 뒤에.”
별안간 강태윤이 입을 열었다.
도시락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였다. 그의 시선이 편의점 창밖의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아서 서우는 그를 보는 제 시선을 들키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음악 소리조차 어느새 꺼진 편의점 안은 강태윤의 목소리만 나직하게 들렸다.
“사고 치지 않고 얌전히 미국에서 예정대로 학위 마치고 돌아오는 것. 그게 외할아버지가 내게 건 조건이었어.”
아까부터 헛돌고 있던 젓가락이 갈 곳을 잃었다. 도시락 위로 조용히 놓인다. 손가락에 힘이 빠져서였다.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린 서우가 반대쪽 손으로 지그시 오른손 검지를 주물렀다.
“넌?”
별안간 물음이 서우에게 되돌아 왔다.
어느새 창에서 시선을 뗀 강태윤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느린 물음에 심장 어느 구석이 떨어져 나간다. 진득하게 빛나는 시선이 끈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