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4_
일요일 아침부터 두통이 있었다.
서우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안고 일어나자마자 어제 일이 떠올라 벽에 머리를 쿵 박았다.
결혼을 전제로 만나자는 말이 결국 새벽까지 저를 붙들어 잠을 설쳤다. 감히 그게 농담이냐고 다시 물어보지 못했다.
자신이 아는 강태윤은 농담도 상대에 따라 진담으로 만들 사람이었으니까.
“…출근하기 싫다.”
벌써 내일 출근해서 그를 볼 생각을 하자 흘러가는 시간이 빠르게 느껴졌다. 애써 시계를 보지 않으려 고개를 돌렸다.
미니멀 라이프보다 더 단출한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냉장고도 없는 방은 황량해 보이기까지 했다.
집에서 뭘 해 먹지 않으니 냉장고가 필요 없었고, 전자레인지 하나와 싱크대 아래는 막 뜯어 놓은 생수병 하나가 있었다. 이사를 자주 다녀 짐이 되는 물건들을 줄이다 보니 그렇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문 아래 작은 책장만은 버리지 못했다.
자신이 지금까지 갔던 연주회의 모든 기록과 스크랩이 그곳에 있었다.
그걸 눈으로 훑는데 저도 모르게 눈가가 슬며시 접혔다. 손을 뻗어 손가락 끝으로 그것들을 가만히 훑은 서우가 픽 웃었다.
월세지만 창문 사이로 적당히 잘 들어오는 볕, 몸을 뉠 수 있는 방 한 칸.
딱 이 정도면 됐다.
욕조가 없는 작은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아직 덜 마른 머리카락을 대충 털어 낸 뒤 지갑과 휴대폰, 그리고 이어폰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냉장고가 없기에 대충 휴일에 챙겨 먹어야 할 땐 편의점을 이용했다.
나가려고 옥탑방의 문을 열었는데 바깥에서 막 문을 두드리려던 누군가와 마주쳤다.
“아.”
상대도 당황했는지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바이올렛 투피스에 진주 목걸이와 귀걸이를 한 채 높은 구두 위에 서서 자신을 보고 있는 중년의 여인에게 서우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어디 나가는 길이니?”
강태윤의 외숙모인 채희옥이었다. 자신이 달에 한 번씩 가는 그 저택의 본채에 살고 있고, 안주인이자, EA 회장 주영석의 부인.
“네. 잠깐 편의점에요.”
“그럼 이야기 나눌 시간은 있겠지?”
탐탁지 않은 눈으로 자신을 보는 얼굴이 미세하게 굳어 있었다.
재벌가에서 태어나 주영석에게 시집왔고 슬하에 아들이 하나 있는 여인이다. 지금쯤 유럽 어딘가에서 연주 중일 그녀의 아들을 무심코 서우가 떠올렸다.
“황 집사가 연주비를 전해 주지 못했다고 하더구나.”
악어 가죽으로 만든 가방에서 흰 봉투를 꺼낸 희옥이 서우에게 건넸다.
몇 번을 거절해도 결국 제 손에 들어오는 봉투였다. 누군가에게 들려주기도 민망할 선율에 연주라는 이름이 거창하게도 붙고, 거기에 돈까지 받는다.
“돈은 받아 가야지.”
“번거롭게 여기까지 오실 필요 없으셨는데. 다음에 받아도 괜찮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희옥의 눈이 아직 열려 있는 서우의 집 안을 단번에 훑었다.
서우가 두말없이 봉투를 받아 들자 그녀가 아직 볼일이 끝나지 않은 듯 돌아서지 않고 말했다.
“아버님께서 그럼 큰일 나는 줄 아시잖니. 나라고 직접 오고 싶어서 온 것도 아니고.”
밖이 더운지 손부채질을 하면서 희옥이 입을 연다.
시아버지인 주철원 명예 회장을 입에 올리는 그녀에게 서우가 문에서 몸을 비켜섰다.
당연하게 들어가도 되냐 묻지 않고 희옥이 안쪽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의 뒤를 따라 그림자처럼 서 있던 비서 또한 금색 보자기에 싸인 물건을 들고 현관에 발을 걸쳤다.
순식간에 슬리퍼를 벗고 원룸 안쪽으로 서우가 들어서게 됐다.
“쯧쯧. 에어컨도 없이 용케 옥탑에서….”
희옥이 좁은 방 안 어디를 훑어도 에어컨이 없는 걸 보고 더 이상 들어오지 않은 채 혀를 찼다.
깔끔한 집이었다. 꼭 서우의 성격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집이라 어쩐지 희옥은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애초에 시누이인 주하영이 후원하겠다고 서우를 데려올 때부터 반대했던 희옥이었다.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고 몇 번 언질을 줬는데 기어이 한집에서 자라게 했다. 그냥 후원을 하고 싶었던 거라면 돈을 주는 게 나았을 텐데.
“우리 집안 남자들은 하나같이 윤서우, 너라면 사족을 못 쓰니 말이야. 재주도 좋더구나.”
희옥이 본론을 꺼냈다.
굳은 얼굴로 팔짱을 낀 채 말하는 그녀를 보면서 서우가 손에 있는 지갑을 만지작거렸다.
“지형이가….”
“저 지형이랑 연락 안 한 지 오래됐어요. 연락 끊으면서 당연히 지형이랑도 연락 끊겼고요. 지금 유럽에서 공연하고 있는 애를 저한테 설득하라고 하시는 건 사모님 월권이세요.”
“뭐?”
대사라도 외운 것처럼 줄줄 내뱉는 서우의 말에 희옥이 기가 찼다. 더 해 보라는 듯이 턱짓을 하자 서우가 표정 하나 변함없이 말했다.
“제가 지형이에게 피아노를 배우면 좋겠다고 피아니스트가 됐다는 게 애초에 말이 되나요? 지형이가 좋아서 그 길을 걷게 된 거겠죠. 회사가 더 좋으면 알아서 그만두고 회사로 들어올 테고요. 애초에 사모님 말도 안 듣는 애가 제 말이라곤 듣겠어요?”
자신이 굳이 연주비를 주겠다는 명목으로 여기에 왜 왔는지 훤히 아는 얼굴이었다.
따박따박 말하는 걸 보자니 슬슬 뒷목에 혈압이 올랐다. 말을 너무 잘해서다. 그리고 슬쩍 제 아들을 설득해 줬으면 하는 속내를 그대로 들켜서 희옥의 얼굴이 붉어졌다.
“지형이가 옛날부터 네 말이라면 죽는시늉이라도 했던 거 내가 모를 줄 알고? 네가 설득하면 금방 음악 같은 거 그만두고 회사에서 얌전히 있을 앤데….”
“사모님은 지형이 잘 모르시네요.”
“하아, 걔 속을 알았으면 내가 이러고 있겠니?”
깊은 한숨과 함께 희옥이 눈을 흘겼다. 서우가 덤덤한 얼굴로 마지막 남은 생수를 집어 들어 컵에 따라 트레이와 함께 희옥의 앞으로 가져왔다.
묘하게 예의 바른 모습이 그리 밉지 않았다. 새침하게 서우를 보면서도 아들 이야기에 목이 타 단숨에 그걸 들어 마셨다.
“냉수는 없니?”
희옥이 다 마신 잔을 다시 서우가 들고 있는 트레이에 두며 뒤늦게 물었다.
“냉장고가 없어서요.”
“에어컨도 없어, 냉장고도 없어. 그러니까 아버님이 들어오라고 할 때 별채에 얌전히 붙어 있기라도 하든가.”
희옥은 자신이 처음 그 저택에 들어갈 때부터 반대했던 사람이었다. 선생님의 고집을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그래도 아닌 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그녀였다.
못마땅해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퉁명스러운 말끝에 정이 묻어 나오는 걸 서우는 느낄 수 있었다.
“사모님.”
“아버님 그렇게 정 없는 분 아니야. 가만히 별채에서 어머님 곁에 있다가 시집이나 가면 좀 좋아? 너 시집갈 때 그냥 보내시겠어?”
아들인 주지형이 음악을 하겠다고 외국으로 가 버리고, 음악을 하던 강태윤은 오히려 사업을 물려받겠다고 눌러앉았다.
은근히 제 아들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던 희옥은 여전히 그 희망의 끈을 놓지 못했다.
아버님이야 누구든 경영하고 싶은 놈에게 물려준다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지만, 제 아들은 장손이었다. 이제는 밥벌이 안 되는 음악쯤은 뒤로하고 한국에 들어와 얌전히 후계자 수업을 할 때였다.
그저 하고 싶다는 이유로 장손을 제치고 태윤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욕심이었다. 지형뿐만 아니라, 앞으로 그가 낳을 아이들일 제 손주들의 미래에 좋은 꽃길만 깔아 주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이었으니까.
“다 옛날 일인데 제가 거길 뻔뻔하게 어떻게 들어가요. 그리고 저는 지형이에게 더 이상 중요한 사람이 아닐 거예요. 그랬던 적도 없고요.”
“그럼 태윤이는?”
“…강태윤은… 그냥 친구요. 저는 그렇게 남겨 두고 싶어요.”
사라진 몇 년의 시간 동안 어떤 일을 겪었기에 저런 얼굴로 이야기를 하는지 희옥은 알 수 없었다.
처음엔 장례식장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고 화가 났다가 이내 아버님이 서우에 대한 이야기를 한마디도 꺼내지 않아 뭔가 있을 거라고 짐작은 했다.
“지형이는 안 돼. 알았지?”
그럼 태윤은 된다는 말인지, 서우가 기가 막혀 하면서도 이야기를 더 길게 끌고 싶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끝까지 제 아들은 안 된다는 희옥에게 다시 한번 말했다.
“지형이 본 적도 없다고 이야기 드렸어요. 그러니까 걱정 말고 돌아가세요.”
자신을 내보내려는 서우를 한 번 보고 희옥이 비서에게 들고 있던 걸 내려놓으라 손짓한다.
“이건 인삼 절임. 선물로 들어온 거야. 두고 먹어.”
“냉장고도 없는데….”
비서가 비단 보자기에 싸서 가져온 것의 정체를 희옥이 말하자 서우가 난감한 얼굴을 했다.
“냉장고에 들어가기 전에 다 먹으면 되지.”
당연한 이야기를 한다는 듯 희옥이 등을 돌렸다. 비서가 그 뒤를 따랐다.
등 뒤에서 매몰차다시피 닫히는 문소리를 듣고 애꿎은 비서에게 화살이 날아왔다.
“어휴, 꼭 아가씨한테 말대답 꼬박꼬박하는 건 똑같이 배워선. 나 아가씨랑 이야기하는 줄 알았잖아. 안 그래, 서 비서?”
“저는 잘….”
“모르긴 뭘 몰라. 내가 순간 할 말을 잃었잖아. 죽은 아가씨가 눈앞에 있는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하고선 픽 웃는다.
없이 살아도 맨몸으로 저택에 들어와 버틴 고집답게 쉽게 주눅 들지 않는 건 희옥의 마음에 들었다.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젓는다.
“그래도 우리 지형이 짝으로는 아니야.”
어림도 없지.
그렇게 생각하며 희옥이 제 목적하는 바를 이루진 못했지만, 다음에 다시 한번 지형을 설득해 줄 수 있냐고 묻는 자리를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계단을 내려가는 그녀의 걸음걸이가 경쾌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