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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솔이의 말이 진심이라는 걸 알았다. 매번 바라만 보다가 직접 만져 보고 소리를 듣자 순수한 감탄이 이는 목소리는 약간 흥분해 있었다.
“이건 아직 한솔이가 켜기엔 너무 커서. 우리 미니 하프로 연습해 볼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얼굴은 여전히 해맑았다. 은하가 준비해 둔 미니 하프가 있는 한쪽으로 다가가며 어쩐지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분명히 제 것이었던 적이 있는데 세월이 지나니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 기분을 뭐라 표현할 수 없어서 서우는 아이에게 집중하려 했다.
“가지고 놀다가 망가지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
이미 한쪽에 미니 하프와 다과상이 준비돼 있었다. 그곳에 앉아 부푼 아랫배에 한 손을 올려 둔 채 둘을 주시하고 있던 은하가 말했다.
“망가지면 다시 고치면 되지.”
그렇게 대꾸해 준 서우가 미니 하프를 들어 한솔이에게 안겨 줬다.
어느 것 하나 알려 주지 않고 그저 아이가 마음껏 하프의 현을 만져 보길 원했다. 어떤 소리든 아이의 손에서 나는 것 하나 예쁘지 않을 리 없다.
“언닌 꼭 엄마 같은 소릴 하네.”
하프를 대하는 방식도 똑같았다. 처음 서우를 별장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선생님은 그녀가 선망하듯 바라본 하프를 한솔이에게 한 것과 똑같이 만져 보게 했다.
서우에게서 선명하게 모친의 모습을 본 은하의 얼굴이 서글퍼졌다.
“내가 누구한테 배웠는데.”
아무렇지 않은 척 그렇게 말하며 서우가 한솔이의 현을 튕기는 소리를 가만히 들으며 반응해 줬다.
실컷 만지고 자신이 손으로 만들어 내는 음을 신기해하는 그 상태를 즐기게 내버려 뒀다.
누군가를 가르쳐 본 적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선생님께 배운 그대로 알려 줄 수밖에 없다. 작고 말랑말랑하고 예쁜 손가락이 혹여 현을 잘못 만지다 다칠까 봐 주의 깊게 바라봤다.
그런 서우를 보면서 은하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오빠 곧 결혼할 거야.”
“그래?”
“별로 안 놀라는 거 같아. 난 언니가 제일 놀랄 거라고 생각했거든.”
뜨거운 캐모마일 차를 마시며 은하가 심상하게 입을 열었다. 매번 여름엔 차가운 음료만 먹다가 아이를 생각해선지 따뜻한 음료를 마시는 은하를 보면서 새삼 많은 게 변했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다.
“은하 너한테 비하면 너희 오빠 시기가 한참 늦었지.”
입안에 든 차를 삼키는 은하의 시선이 서우의 얼굴에서 진위를 가리려는 듯 제법 날카로웠다.
선량하게 웃는 얼굴에는 거짓을 찾아볼 수 없었다. 분명히 갑작스러운 말에 미련 한 자락 보일 거라 생각했던 은하의 마음이 부끄럽도록 서우의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내가 빨리 결혼한 축이지. 엄마 돌아가시고 가족이 있었으면 했으니까. 태윤 오빠는 그러기엔 너무 멀리 있었고, 어차피 가까이 있어 봤자 나한테 위로 같은 거 안 해 줬을 거야.”
유학을 다녀오고 스물여덟이니 슬슬 결혼할 때가 됐다.
한국에 자리를 잡아 가정을 이루기 적절한 나이라는 데 서우도 동의했다. 고개를 자신도 모르게 끄덕이자 은하가 찻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탁.
“어릴 땐 언니랑 오빠랑 결혼했으면 했다?”
“정말? 우리 은하가 나 진짜 많이 좋아했구나.”
서우가 활짝 웃으면서 그 말에 담긴 딱딱하고 날카로운 가시 같은 걸 피하려 했다.
“그런데 크니까 알겠더라고. 언니가 하프를 그만두지 않았어도, 세계적인 하피스트가 됐어도 아마 태윤 오빠랑은 안 됐을 거야.”
그저 별장 고용인의 손녀였을 뿐이다.
고아가 돼 할머니 손에 크다가 우연히 그림 같은 집에 사는 선생님과 그 가족들 눈에 들어 운 좋게 후원을 받게 된 아이.
자신의 위치는 딱 거기였다.
누군가와의 결혼을 꿈꿔 본 적도 없는데 이렇게 은하가 말해 주니 실감이 나는 것 같았다. 그 전까진 막연하게 태윤이 결혼할 때가 됐지, 하는 마음뿐이었나 보다.
일찍 결혼을 하고, 일찍이 현실을 깨닫고 자신에게 말해 주는 은하의 얼굴은 제 착각이겠지만 안타까운 기색까지 느껴졌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도 절대 허락 안 했을걸.”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맞는 말이라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니까 언니도 다른 사람 만나.”
말이 툭, 하고 날아와 자신에게 부딪쳤다.
“그냥 실컷 미워해도 되는데 우리 은하는 자나 깨나 내 걱정뿐이네.”
“누가 걱정한다고.”
입술을 비죽이며 은하가 냉랭하게 말했다.
정말 괜찮은데 태윤과 자신의 관계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누가 봐도 과거의 인연이 지금은 이상하게 얽혀 있어서 믿지 않을 것 같았다.
“그게 걱정하는 거야.”
서우가 웃으면서 말했다. 반박하고 싶어서 입술이 달싹이는데 결국 서우의 옆에 붙어 앉아 있던 한솔이 까르르 웃자 은하 또한 웃고 말았다.
한솔이 작은 별을 연주해 달라고 미니 하프를 서우의 품에 안기자 그녀가 익숙한 멜로디로 현을 퉁겼다.
반짝반짝 작은 별.
제 아이가 웃는 모습을 은하가 바라봤다. 다정하고 섬세한 눈으로 그런 제 아이를 내려다보고 마주 웃는 서우의 얼굴 또한 보였다.
교통사고가 났던 다리 한쪽이 시큰거렸다.
그 아픔이 꼭 여전히 서우를 미워하는 걸 잊지 말라는 신호 같아서 은하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녁 식사를 하고 가라는데 기어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서우가 한솔과 은하에게 작별을 고했다.
“기사님 불러서 데려다줄게.”
“아냐. 내가 알아서 갈게.”
은하의 시선이 서우가 거의 먹지 못한 다과를 향했다. 레스토랑에서의 일도 마음에 걸려 식사를 하고 가라고 권했는데 웃는 낯으로 거절한다.
여름의 해는 느리게 진다지만, 7시에 가까운 시간이라 은하가 다시 한번 권하려 했을 때 서우가 말을 이었다.
“여기 오는데 도로가 너무 예뻐서. 산책해도 괜찮겠더라.”
“그래, 그럼 알아서 해.”
더 이상 권하지 않고 은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려는 서우에게 준비하고 있던 흰 봉투를 꺼내 건넸다.
“이게 뭐야?”
“레슨비.”
“내가 너한테 돈을 왜 받아. 한 것도 없는데.”
“그럼 차비라도 해.”
돌려받지 않겠다는 얼굴로 서우의 에코백 안에 기어이 봉투를 집어넣었다. 단호한 얼굴이라 결국 아이 앞에서 봉투로 실랑이를 할 수도 없어 그대로 밖으로 나왔다.
현관 밖까지만 배웅하는 은하에게 들어가라고 손짓해 보이곤 서우가 천천히 왔던 길을 따라 걸었다.
언덕이 높아 그런지 미처 깨닫지 못했는데 멀리 한강이 보였다.
한강의 물빛에 지는 노을이 반사돼 반짝이는 걸 멍하니 보며 한참을 내려갔다.
아직 시큐리티 센터가 있는 곳과는 거리가 있어 좀 더 걸어야 했다. 자신처럼 밖으로 나와 이 단지의 도보를 걷는 사람은 없었다. 제 옆으로 단지 내에 온 외제 차들이 몇 번 지나갔을 뿐이다.
갑자기 맥이 풀린 서우가 도보의 한쪽에 잠시 주저앉았다.
가끔 생각이 났다.
선생님의 죽음 뒤 자신이 돌아가지 않았던 곳에 남아 있을 제 하프를 생각했다.
어딘가 처분됐을 거라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은하가 가지고 있었다니. 반가운 마음과 꼭 그만큼의 아픔에 심장이 할퀴어진다.
“아….”
어깨에서 끈이 떨어진 에코백이 아스팔트 위로 널브러졌다.
경사진 곳이라 주저앉은 김에 움켜잡았으나 이미 동그란 물건들은 속절없이 지퍼도 없는 안쪽에서 나와 아래로 굴러갔다.
희주가 건강에 좋다고 선물해 줘서 버릇처럼 가지고 다니던 동그란 손 지압기가 제일 멀리 굴러가 서우의 걸음 또한 빨라졌다. 하나씩 중간에 멈춘 물건들을 다시 에코백 안에 넣으며 허리를 폈다.
근사한 세단 한 대가 그에 맞춰 그녀의 옆에 멈췄다.
남의 집 대문 앞인가 싶어 서둘러 걸음을 재촉하려던 때였다.
“윤서우.”
귀에 익은 목소리가 저절로 뒤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상대를 알자마자 몸이 먼저 반응했다. 그건 서우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본부장님.”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누구예요? 아~ 비서분이시구나.”
품에 꽃다발을 한 아름 안고 태윤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가 바로 서우를 알아봤다.
미라였다.
누가 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화사한 얼굴을 보고 서우가 저도 모르게 웃었다. 태윤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진 것 같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아! 한솔이 하프 가르쳐 준다고 하셨죠? 저흰 저녁 초대받아 가는 길인데.”
저희라고 말하는 모양새가 퍽 자연스러웠다. 극구 저녁을 사양하고 나온 자신에게 박수라도 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핸들 위에 올려진 태윤의 손가락이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툭툭 가죽 위를 치댔다.
“전 지금 집에 가는 길이에요. 좋은 시간 되세요.”
곧 결혼한다는 은하의 말이 떠올랐다. 이렇게 다시 봐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태윤의 비스듬한 시선을 피해 오로지 미라만 바라보면서 서우가 인사하고 자리를 빨리 피하려 했다.
“그러지 말고 같이 가서 식사해요.”
“아…. 선약이 있어서요.”
“정말요? 아쉬워라. 그럼 다음에 꼭 식사 함께해요.”
“네. 그럼 들어가세요.”
“윤서우.”
태윤이 다시 한번 제 이름을 불렀다. 윤 비서가 아닌, 윤서우라고 부른다.
그게 얼마나 미라에게 이상하게 들릴지 생각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