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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들었으면서 뭘 물어.”
서우가 웃으면서 다시 과일 코너를 돌았다. 벌써 똑같은 곳을 몇 바퀴나 도는지 모르겠다.
“그럼 지금 네가 여기서 한 시간째 이러고 있는 것도 다….”
“빈손으로 갈 수는 없잖아.”
재벌가에서 남부럽지 않게 자란 은하였다. 고작해야 할 수 있는 선물이 과일뿐이지만, 그래도 좋은 걸 선물해 주고 싶어 유명한 백화점 식품관이 오픈하자마자 들이닥쳐 고민 중이었다.
아이가 맛있게 먹을 과일을 선물하고 싶었다. 같은 모임이니 혹시 한솔이가 좋아하는 게 뭔지 아냐고 희주에게 물어봤다가 지금 하프까지 가르쳐 주기로 했다고 전부 털어놓던 차다.
“너는… 참… 속이 좋은 건지, 썩어 문드러진 건지 모르겠다.”
“이왕이면 속이 좋은 거라고 해 줘.”
“말이나 못 하면.”
서우가 결국 달짝지근한 향이 나는 복숭아까지 고르고 있었다.
“강은하한테 그런 소릴 듣고도 거길 가고 싶어?”
레스토랑에서 밥도 먹지 못하고 간 게 내내 마음에 걸려 바쁜 희주가 오늘 시간을 냈다는 걸 안다. 그리고 은하에게 들은 모진 말들이 마음에 걸려서가 아니라 다른 게 마음에 걸려서 이런다는 것도 알았다.
덤덤한 눈으로 서우가 화를 삭이는 희주를 마주했다.
“나는 별로 아무렇지 않은데.”
“딱 봐도 너 하프 그만둔 거 알고 일부러 자극하려고 하는 거잖아.”
“은하가 그렇게 못된 사람은 아니야.”
“서우야, 그렇게 못된 사람이란다. 걔는 그냥 못됐어.”
실컷 욕을 해 주려다 그래도 순화해서 말했는데 서우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희주는 눈치껏 더 이상의 험담은 하지 않았다.
지나가는 일상처럼 서우는 희주가 걱정하고 차마 묻지 못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꺼냈다.
“10년이었잖아. 내가 아마 하프를 배운 게 그 정도였을 거야. 그만둘 때는 그 스무 살이었으니까. 아마 내 인생의 절반이란 생각이 강해서 포기가 쉽지 않더라.”
마치 남 일을 말하듯 하는 걸 희주가 듣고 있었다. 탐스럽게 개별 포장된 복숭아도 몇 개 장바구니에 넣는다. 점점 무거워지는 그걸 희주가 대신 들자 서우가 눈웃음을 지었다.
“고마워.”
“내가 너보단 힘이 세잖아. 그래서? 계속해 봐. 포기가 쉽지 않은데 뭐.”
“지금은 아니야. 이제는 내 인생의 절반보다 하프를 손에서 놓았던 날이 더 길어져서 괜찮아.”
트라우마가 될 수 있는 걸 참 담담하게도 이야기한다는 생각에 희주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서우는 정말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재능이 있어서 빛났고, 스스로가 하프를 숭배하고 사랑해 그게 더 예쁘게 반짝였던 친구가 바로 윤서우였는데 어쩌다 일이 크게 잘못됐다.
“난….”
“너 같은 친구도 있고. 그래서 괜찮아.”
장난스럽게 다시 괜찮다고 연거푸 말하는 서우에게 더 이상 거기에 대해 뭐라 말할 수 없었다.
“그래. 네가 괜찮으면 된 거지. 서우야, 그런데 태윤이 이야긴 왜 쏙 빼?”
“별로… 할 이야기가 없어서?”
“강태윤 비서가 됐다는 이야길 내가 왜 네 입이 아니라 박미라한테 들어야 할까.”
미라의 한국 공연을 추진한 게 희진이었는데 공연만 추진한 게 아니라 생각보다 더 친한 사이였던 것 같았다.
“하하…. 그러게?”
“이것 봐라.”
“진짜 일만 하는 사인데 내가 뭐라고 해.”
서우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래서 태윤에 대해 희주는 다시 입을 다물어야 했다.
“이러다 하루 종일 걸리겠다. 너 점심 먹고 가려면 빠듯해. 빨리 계산하고 밥 먹으러 가자.”
희주가 적당하게 말을 끊고 돌리자 서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
과일이 무겁다며 희주가 직접 은하의 저택 앞까지 차로 데려다줬다.
한남동에 있는 새로 생긴 고급 주택 단지였다. 독채의 빌라마다 넓은 정원과 프라이빗한 공간이 나뉘어 있어 다른 동에서는 결코 안이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서우가 슬쩍 제 손등을 바라봤다. 오늘은 어쩐지 손에 시선이 많이 갈 것 같아 화장품을 두껍게 발랐다.
“와…. 되게 좋다.”
서우가 창문 밖으로 높게 솟은 나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주택 단지에 들어오니 꼭 외국에 온 것처럼 풍경이 달랐다. 안쪽에 있는 내부가 보이지 않게 조경된 나무들은 시원시원하게 컸다.
“선양 그룹 둘째랑 결혼했는데 이 정도쯤이야.”
좋다고 말하는 서우에게 심드렁하게 희주가 대꾸했다. 유럽의 유서 깊은 어느 귀족가를 표방한 듯한 단지였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은하는 결혼을 결정했다. 내내 은하를 좋아했던 선양 그룹 둘째와 혼사가 빠르게 추진됐고 이른 나이에 결혼해 엄마가 됐다.
기사를 통해 결혼식을 알았던 서우가 희미하게 웃었다.
나무로 된 고풍스러운 대문이 시큐리티 센터에서 손님으로 등록한 차량을 인식하고 천천히 열렸다.
“저기 안쪽으로 들어가면 돼.”
“태워 줘서 고마워.”
“내가 같이 들어갈까? 그게 또 심술부리면 어떻게 해.”
“뭐 하러. 내가 애도 아니고.”
희주도 잠깐 시간을 낸 거지, 다시 회사로 들어가 봐야 한다는 걸 아는 서우가 재빨리 차에서 내렸다. 트렁크를 열어 백화점에서 자신이 고른 과일들로 예쁘게 포장한 바구니를 집어 들었다.
정식으로 은하의 집에 온 건 처음이라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은하가 또 속상하게 하면 전화해. 바로 올게.”
서우가 대꾸하지 않고 빨리 가라고 손만 흔들었다. 곧 차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제야 열린 대문 안으로 묵직한 바구니를 들고 걸음을 옮겼다.
여름인데 바람이 제법 부는 날씨였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보이는 이층집의 외관이 꼭 저택의 별채를 생각나게 하는 모양새라 조금 놀랐다. 그리고 이내 그 별채의 주인이었던 게 선생님이란 사실을 깨닫고 만다.
이런 집에서조차 은하가 죽은 선생님을 많이 그리워하는 감정이 느껴졌다.
커다란 통유리가 전면을 차지하고 있는 것조차 같았다.
그리고 빙 돌아 현관으로 가기 전, 서우의 걸음이 멈춰 섰다.
짙은 고목 색의 우아한 자태는 꿈에서도 잊을 수 없을 만큼 익숙했다. 아름답고 모난 데 없는 곡선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발을 떼는 것조차 잊을 정도로 서우가 멍하게 창 너머를 바라봤다.
“…여기… 여기 있었구나.”
그랬구나.
입술이 일그러지려는 걸 필사적으로 참았다. 때맞춰 목적지 끝에 있는 현관문이 열렸다.
가장 먼저 양갈래를 예쁘게 한 아이 하나가 뛰어나왔다. 서우와 눈이 마주치자 작고 까만 바둑알 같은 눈동자가 도르륵 굴러간다.
이내 양손을 배꼽 위에 예쁘게 포개곤 작고 앙증맞은 입술을 벌렸다.
“안녕하세요오~ 선샤인 유치원 달님반 민한솔입니다!”
“안녕. 난 오늘부터 한솔이에게 하프를 가르쳐 줄 윤서우라고 해.”
잠시 무거운 과일 바구니를 옆에 내려놓고 한솔이와 똑같이 배꼽 인사를 하며 서우가 말했다. 어른이 저와 똑같은 인사를 하는 게 신기하고 재미있는지 한솔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맑은 그 웃음에 느낌이 좋았다.
내심 부담스러웠는데 여기서 일어날 모든 일들이 생각보다 별것 아니고, 다 괜찮을지도 모른다.
“언니 왔어?”
한솔이 뒤를 따라 밖으로 나온 은하가 말했다. 그리고 이내 서우가 서 있는 곳을 깨닫고 창문 안 하프에 시선을 줬다.
은하의 시선을 따라 서우 또한 다시 창문 안을 바라봤다.
“언니가 버리고 가서 내가 데려왔어. 어떻게 보면 엄마가 마지막으로 남긴 거잖아.”
서우가 대학에 합격했을 때 선생님이 선물한 고가의 그랜드 하프였다. 너무 좋아서 밤잠을 설칠 정도로, 제 베개를 들고 하프 옆에서 잘 정도로 아꼈다.
종종 생각나도 다시는 제 것이 될 리 없는 악기였기에 누군가에게 물어보지도 못했다.
“그렇지. 네가 갖는 게 맞아.”
웃으면서 다시 바구니를 들어 올렸다. 그러다 삐끗해 바닥에 다시 떨어진다.
복숭아 두 알이 기어코 바구니에서 빠져나와 바닥을 굴렀다. 서우가 서둘러 주우려 하자 은하가 말렸다.
“됐어. 땅에 떨어진 걸 왜 주워. 메이드 불러서 치우면 돼.”
좀 더 조심할 걸 그랬다. 자신이 고심해서 고른 과일이 바로 버려질 거라 생각하자 괜히 바구니를 놓친 손이 원망스러웠다.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사 왔어.”
“잘 먹을게.”
건성으로 답하며 메이드를 불러 과일 바구니와 떨어진 과일들을 가지고 들어가라고 은하가 말했다.
과일 바구니 대신, 손에 한솔이의 손이 잡혔다.
빨리 시원한 집 안으로 가자는 뜻으로 손이 달랑달랑 아이의 힘에 의해 흔들렸다.
넓은 안쪽으로 발을 디뎌 봤다.
망설일 틈도 없이 서우의 손을 잡아끌고 한솔이 도착한 곳은 그랜드 하프가 있는 거실이었다.
빤히 하프와 자신을 번갈아 바라본다. 기대와 설렘이 반반 섞여 있는 순한 얼굴이 차마 하프를 만지지는 못하고 서우를 졸랐다.
“엄마가 선생님 오면은….”
“만져도 된다고 하셨어?”
“으응…. 네.”
디잉.
서우가 하프 앞에 한솔의 눈높이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장난스럽게 현을 하나 튕겼다.
들리는 맑은 소리에 아이의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그 작고 젖살이 오른 통통한 볼이 전부 사랑스러웠다. 서우의 얼굴에 따뜻한 기색이 감돌았다.
딩.
다시 한번 현을 튕기자 아이가 수줍게 웃는다.
“한솔이는 하프를 좋아하는구나.”
한솔이의 손이 머뭇거리며 서우를 따라 줄 하나를 튕겼다.
디이.
나다 마는 소리에 서우가 웃었다. 그리고 하프의 울림판 아래 조각된 자신의 이름 이니셜을 발견했다. 전 세계의 무대를 다니라며 대학 입학 선물로 선생님이 선물한 하프였다.
“예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