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_
어디서부터 들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비밀도 아닌 이야기였기에 서우는 시치미를 뗐다.
“태윤 오빠, 그럼 다음에 또 봬요.”
“그래요.”
“오빠는 무슨 내 친구한테 말을 높이고 그래?”
은하가 새초롬하게 태윤에게 눈을 흘겼다. 미라가 부끄러운지 얼굴이 약간 상기됐다.
같이 식사를 하러 나가는 줄 알았는데 둘만 돌아섰다. 은하의 옆까지 걸어온 미라가 멋쩍게 웃다가 이내 서우의 책상에 있는 제 팸플릿을 발견했다.
“어? 제 공연 팸플릿! 오셨었어요?”
“그럼요. 친구 덕분에 치열한 티켓팅 성공했거든요.”
서우가 웃으면서 맞장구를 쳤다. 쑥스럽게 웃는 미라를 보면서 머릿속에 방금 둘이서 서 있었던 장면을 다시금 떠올렸다.
그림 같은 모습이었다.
“사인해 드릴까요?”
미라가 활짝 웃으며 서우에게 말했다. 먼저 그렇게 말하리라곤 생각 못 해서 그녀가 눈을 잠시 의아하게 떴다. 이내 상사인 태윤이 뒤에 있다는 걸 깨닫고 망설이던 차였다.
“난 신경 쓰지 말아요.”
서우의 마음을 아는지 태윤이 말하자 어쩐지 더 신경이 쓰였다.
결국 펜과 팸플릿을 앞 데스크에 놓는데 그사이 손에서 놓친 펜이 옆으로 굴러갔다.
아무렇지도 않게 펜을 다시 집어 들어 팸플릿 위에 놓았다. 아무도 서우의 그런 행동에 신경 쓰지 않는다.
자신의 얼굴 아래 크게 사인을 한 미라가 돌려줬다.
“감사합니다. 스크랩해서 잘 간직할게요.”
“네. 다음에 또 봐요.”
은하와 미라가 비서실 문을 나선다.
“저 사람이 그 사람이야?”
문이 닫히기 전 조심스럽게 은하에게 묻는 미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우가 한 귀로 듣고 흘렸다.
은하의 대답이 문이 닫혀 들리지 않았다. 시선을 떼자 본부장실로 들어갔을 거라 여겼던 태윤이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갑작스러운 적막이 비서실 안을 감돌았다.
“샐러드나 간단히 드실 만한 음식을 준비할까요?”
이대로 점심을 거를 생각인 것 같아 태윤에게 물었다.
“은하한테 꽤 잘해 주네.”
“선생님은 제게 은인이셨으니까요. 못 해 줄 이유가 없죠.”
이곳에서 근무하고 첫날 이후로 태윤에게 꼬박꼬박 말을 높였다. 그의 이런 편한 말에 편하게 대꾸할 정도로 어리석진 않았다.
서우의 선을 긋는 말에 그가 고개를 모로 기울인 채 그녀를 본다.
“나한테도 잘해 줘.”
“네?”
“윤 비서님, 나한테도 잘해 달라고. 방금 그렇게 말했는데.”
사무적인 미소를 입가에 띤 채 서우가 굳어 가는 걸 태윤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응시하고 있었다. 웃는 낯 그대로 굳은 그녀가 태윤의 의도를 간파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눈빛에 결론 값을 추론해 내는 걸 실패했다.
“기대할게요.”
멋대로 기대한다는 말을 남기고 그가 문을 닫고 들어갔다.
미라가 사인해 준 팸플릿을 소중하게 다시 마지막 서랍에 넣고 닫은 채 서우가 의자에 가만히 앉았다.
강태윤이 이상했다.
똑똑.
노크와 함께 잠시의 시간 뒤 열린 문으로 서우가 들어오자 태윤이 모니터에서 눈을 뗐다.
아마 비서실에 있는 트레이 중 가장 커다란 것에 뭔가 잔뜩 들고 들어오는 게 보였다.
태윤을 향해 묵례한 그녀가 소파 테이블에 트레이를 내려놓고 가지고 온 것들을 세팅했다.
우유와 생과일 주스, 커피, 그리고 샐러드, 샌드위치, 수프 등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모든 걸 다 가지고 들어와 늘어놓자 태윤이 픽 웃었다.
“뭘 좋아하실지 몰라 골고루 준비했습니다. 2시부터 7시까지 임원 회의와 미팅이 잡혀 있어서요.”
지금 끼니를 놓치면 안 된다고 말하는 소리에 태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까이 가서 보자 후식으로 작은 컵 과일까지 있었다. 회사 1층에 있는 카페테리아를 털어 온 것 같았다.
“같이 먹죠.”
“괜찮습니다.”
그린 듯한 미소로 서우가 칼같이 잘랐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정말 다른 목적이라곤 없는 비서의 본분을 마친 사람처럼 고개를 숙여 보이고 뒤를 돌아섰다.
“그럼 내가 비서실에서 먹을까?”
나가려던 그녀의 몸이 움찔거렸다. 소파의 상석에 앉아 태윤이 그녀의 반응을 지그시 바라봤다.
잘해 달라고 했더니 이게 윤서우의 방식인지 궁금해서다. 다시 거절할 줄 알고 그다음 말로 뭘 말할까 느른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이내 그와 적정거리를 벌리고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자리에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서우가 단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뭘 좋아할지 몰라 여러 가지 준비했다면서 막상 그의 자리에는 커피를 밀어 준다. 태윤 또한 당연하게 달달한 생과일 주스를 서우 쪽으로 건넸다.
잠시 그의 행동에 당황한 서우가 머뭇거렸다.
“왜. 이제 다 커서 단 건 안 먹어?”
“아뇨. 좋아하긴 좋아하는데요….”
분명히 동갑인데 꼭 어린아이 대하듯 다 커서 단 건 안 먹냐는 질문에 일단 대답부터 나갔다. 그러다 서우가 미간을 굳히자 태윤이 샌드위치 껍질을 벗겨 그녀에게 한쪽 다시 건넸다.
손을 거둘 기세가 아니기에 재빨리 받아 들자 참을 수 없는 사람처럼 태윤이 짧게 웃는다.
최대한 빨리 먹고 나갈 기세로 입에 넣었다.
선생님이 살아 계실 적의 아침은 이렇게 빵으로 시작했다.
할머니 손에서 자란 어린 자신이 TV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빵을 먹는다는 게 신기해 너무 좋아서 주인공이 된 기분이 들어 배시시 웃었다.
태윤이 자신에게 내민 샌드위치 조각이 그때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제 몫에는 손대지 않고 다리를 꼰 채 서우가 먹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팔걸이에 손을 올려 턱을 괴고 비스듬히 보는 시선을 피해 서우가 입안에 든 것을 삼켰다.
“난 한식 좋아해요. 빵 안 좋아해.”
“그런데….”
10년 가까이 내내 거의 붙어 지냈던 그들의 아침은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영국식, 혹은 미국식 조식으로 먹었다.
자신도 모르게 과거를 들먹일 뻔했다. 서둘러 입을 꽉 다물자 태윤이 태연하게 말을 잇는다.
“빵은 윤서우가 좋아했지.”
그가 천천히 서우가 건넨 커피를 마셨다.
목울대가 크게 움직인다. 밀려오는 허기를 채우는 사람처럼 그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눈앞에 보이는 음식에 대한 허기가 아니라, 분명히 다른 쪽이다.
태윤의 눈이 침잠하게 가라앉았다.
남은 샌드위치 한 쪽도 그가 서우에게 밀어냈다.
윤 비서, 윤서우.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태윤의 어투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가 자신을 비서로만 대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윤서우라고 부를 때마다 점점 확신이 사라졌다.
“본부장님 여동생분도 빵 좋아했어요.”
“그랬나?”
미묘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태윤이 말한다.
몰랐을 리 없다. 자신의 식성도 기억하는 남자가 제 여동생이 뭘 좋아하는지 모를 리 없다.
“잘 먹었습니다. 저는 남은 일이 있어서 먼저 나가 보겠습니다.”
애초에 그가 제안할 때부터 재빨리 먹고 일어날 생각이었는지 이미 일어나서 고개까지 숙이는 서우를 보며 태윤이 끄덕였다.
“그래요. 나가 봐요.”
자신이 먹었던 흔적까지 치우고 그녀가 남은 멀쩡한 음식들은 그가 먹길 바라며 뒤를 돌아 나갔다.
태윤이 얼음이 가득 차 있는 커피가 담긴 플라스틱 컵을 손안에서 가볍게 돌렸다.
“윤 비서님, 진짜 나한테 잘해 주네.”
그 말을 들어야 할 사람은 이미 바깥에 있었다.
잘해 주라고 했더니 이게 그나마 최선을 다 한 것 같아 제법 재미있기도 했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나한테.”
입가에 걸린 미소와 다르게 스스로에게 묻는 태윤의 기색이 싸늘하다.
목적을 알 수 없는 분노가 엉겨 붙는다. 무례하게 구는 제 여동생을 보는 서우의 시선은 시종일관 다정했다.
그 자리에서 가만히 지켜봤던 이유는 자신이 끼어들어 그 다정한 기색이 사라지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강태윤의 기준에서 윤서우는 배신자였다.
그가 손쓸 수 없을 때 자취를 감추고, 수년이 지난 후에야 겨우 나타났다.
더 이상 하프를 켜지 않고, 생기를 잃은 얼굴로 평범한 사람이 돼서 이곳에 있었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알아낼 수 없었던 윤서우의 과거를 태윤은 알아야 했다.
***
“뭐어?”
이번에 자두와 살구의 장점만 접목해 새로 나왔다는 과일인 플럼코트를 들고 희주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입을 떡 벌렸다. 그리고 곧장 시선을 돌려 태연하게 희주의 손에 든 플럼코트를 빼앗아 장바구니에 넣는 서우를 바라봤다.
“다시 말해 봐. 방금 뭐라고 했어?”
주말에 모처럼 점심을 먹자고 했더니, 백화점에 가야 한다는 서우의 말에 신이 나서 나온 희주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이따 오후에 은하네 집에 가기로 했어.”
“가서 다섯 살짜리 애 하프를 가르쳐 주기로 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