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발자국 (5)화 (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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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잘하고 와.”

이미 반쯤 기정사실처럼 됐다. 강 대리의 응원에 귀를 쫑긋 세워 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거들었다.

아무래도 서우의 자리가 공석이 되면, 이제껏 서우에게 도움을 받아 온 사람들은 곤란할 것이었다. 그녀만큼 능률 좋은 신입이 들어오리란 보장도 없었다.

서우는 인사팀이 있는 8층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와중에도 마음이 여전히 갈팡질팡했다.

그만두기로 한 결심과 현실이 치열하게 대립했다.

일은 나쁘지 않았다. 대학도 졸업하지 못한 자신이 계약직이라도 전전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사람들도 대부분 좋았고, 흥미가 있는 일은 아니지만 혼자서 먹고살 수 있는 정도는 됐다.

근면 성실이 최대 장점인 그녀에게 다시 재취업을 해서 이만한 직장을 찾는다는 건 사실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우선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나 보자.”

똑똑. 노크와 함께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안쪽에 있는 인사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윤….”

“이쪽으로 와요.”

인사팀장은 간단한 인사를 건너뛰고 회의실로 서우를 안내했다.

강 대리 말로는 분위기가 나쁘지 않다고 했는데.

정신없이 바빠 보이는 전형적인 회사원의 모습을 하고 있는 팀장의 모습에 서우는 무슨 소릴 듣더라도 놀라지 말자고 다짐했다.

“서류상 계약 기간이 두 달 남았다고 돼 있는데. 맞죠?”

자리에 앉은 인사팀장이 바로 본론을 꺼냈다. 서우에게 앉으라고 맞은편 의자를 고개로 까딱인다. 조심스럽게 자리를 잡고 앉아 등을 곧게 펴고 허리를 세웠다. 책상 아래 감춰진 손이 서로 꽉 마주 잡았다.

남은 기간을 확인하는 목소리에 심장이 쿵, 울렸다.

“네. 맞습니다.”

“부서 이동을 좀 해 줘야겠어요.”

“부서, 이동이요?”

역시 강 대리의 감이 틀렸다. 두 달밖에 남지 않은 시기에 부서 이동은 좋지 않았다. 이대로 한갓진 곳으로 가 그대로 퇴사하는 게 일반적인 수순이었다.

인수 합병 뒤 생긴 새로운 조직에서 자리를 잡을 리 없고, 그 조직에서 보통 심부름이나 하다가 퇴사할 미래가 저절로 그려졌다.

남은 두 달이라도 버텨야 할지, 아니면 이대로 어제의 결심대로 그만두는 게 나을지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윤 주임. 내 말 듣고 있어요?”

“…네. 듣고….”

“본부장 비서실에서 인력이 부족하다는데. 그쪽으로 가 줘야겠어요.”

“네?”

서우가 멍하게 되물었다.

“사무실 돌아가서 물건 챙겨서 바로 21층으로 가세요. 인수인계는 팀에 알아서 하라고 내가 말해 놓을 테니까.”

그녀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통보였다. 생각지도 못한 인사 발령에 그녀가 넋 놓고 있자 인사팀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갑작스러워서 당황스러운 건 알겠는데. 어차피 기간이 많이 남은 것도 아니고, 그쪽에서 일 잘하면 재계약은 더 수월할 수도 있고.”

또다시 희망 없는 고문을 한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이 회사에 그래도 계약 기간이 끝날 때까지 있어도 되지 않을까 했던 것도 강 대리가 말한 것처럼 본부장을 볼 기회가 몇 번이나 될까 싶어서다. 같은 회사라도 마주치기엔 그와 자신의 거리가 꽤 있었다.

나가 보라는 인사팀장의 말에 무슨 정신으로 인사했는지 알 수 없이 나왔다.

“나도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

인사팀장이 영문을 알 수 없는 목소리로 혼잣말을 한 건 미처 듣지 못했다.



 

팀으로 돌아오자 이미 부장을 통해 말이 전달됐는지 강 대리가 멋쩍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럼 인수인계는 어떻게 해요?”

입사한 지 몇 달 안 된 신입 사원이 곤란한 얼굴로 강 대리를 졸랐다. 서우가 갑자기 다른 팀으로 발령을 받았다고 하자 그 일이 막내인 자신에게 돌아올 걸 가장 걱정하는 사람이었다.

“점심시간부터 제가 인수인계….”

“그냥 문서로 작성해서 주세요.”

신입이 퉁명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서우가 계약직인 걸 알았을 때부터 줄곧 그래 왔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잖아도 나가는 날을 대비해 인수인계할 목록을 조금씩 틈날 때마다 작성 중이었다.

“윤 주임, 그건 나중에 하고 본부장실로 가 봐. 그쪽 비서팀에서 올라오라고 하더라고.”

인사팀에서 소문이 난 게 아니라, 바로 본부장실에서 부장을 통해 서우를 호출한 모양이었다. 부장이 초조한 얼굴로 빨리 올라가 보라고 손짓한다. 처음 자신을 응원해 줬던 팀원들의 분위기가 묘했다.

저마다 한 자락의 호기심을 담고 있었다.

대체 본부장이 오자마자 계약직 사원 하나를 직접적으로 호명하는 일은 누구라도 궁금해하기 충분했다.

“퇴사하려고 하는데 사표는 여기 제출해도 되나요.”

“뭐?”

오늘따라 가발을 쓰고 온 부장이 벌떡 일어나다 그게 흔들렸다.

평소라면 강 대리와 책상 밑으로 들어가 숨죽여 웃었겠지만, 서우는 담담했다.

통장에 300이 있다. 큰돈은 아닌데 그렇다고 그녀에게 적은 돈도 아니었다.

“부서 이동 몰라? 부서 이동? 이제 우리 부서 아니야. 위에 가서 이야기해.”

부장이 혹시 불똥이라도 튈까 봐 손을 내젓는다. 여기서는 사표를 받아 줄 수 없고 이제 새로운 팀, 즉 본부장실에 가서 이야기하라고 했다.

자기 마음대로 그만두라고 했다가 이제 막 부임한 본부장의 눈 밖에 나기 싫어서다. 본부장실에서 직접 서우를 호출한 건 다 이유가 있다고 굳게 믿는 얼굴이었다.

“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부서 이동이라니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간밤에 사표를 준비해 두길 잘했다 생각하며 본부장실로 향했다.

결심을 하자 마음이 평온해진 한편 약간의 현기증이 일었다. 상승하는 엘리베이터 숫자 끝을 바라보면서 크게 심호흡을 했다.

“윤서우 주임님이시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비서실에서 막 걸어 나오던 남자가 서우를 보며 물었다.

“네.”

“생각보다 일찍 오셨네요. 들어오시죠. 전 수행 비서 김진호라고 합니다.”

본사에서 온 태윤의 수행 비서인 모양이었다. 나오려던 모양새 그대로 다시 비서실의 문을 열고 김진호가 그녀를 바라봤다.

“…사표를 내고 싶은데요. 이곳으로 가라고 하셔서요.”

수행 비서라는 김진호가 사표를 받아 준다면 자신이 굳이 비서실 안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 그 너머에는 본부장실이 있기 때문이다. 최대한 그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서우가 손에 들고 있는 사표를 내려다보며 말하자 진호가 침음을 삼켰다.

본부장인 강태윤의 말에 의문을 표하지 않았는데 그 역시 이번의 인사이동에 이상함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본부장실로 가시죠. 지금 계십니다.”

꼭 그래야 하냐는 말이 목 끝에서 결국 넘어오지 못했다.

김진호가 자신의 곁을 스쳐 짧게 묵례하는 서우를 바라봤다. 비서실 안쪽에서 자신을 향한 호기심 어린 시선은 원래 이곳에 있는 비서들의 것이리라.

얼굴의 양옆이 따끔하게 찌르는 기분은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삐-

“윤 서우 주임이 왔습니다.”

- 네.

진호가 본부장실에 미리 호출하자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서우가 짙은 고목 색의 문을 바라보다 곧 손가락을 세워 노크했다.

이곳에서 자신에게 쏟아지는 어쩔 수 없는 시선들과 이 안쪽의 시선 하나 중 어느 것이든 선택해야 할 시간이었다.

똑똑.

잠깐의 시간 뒤 문고리를 돌려 열자 너른 창을 등지고 앉아 있는 남자의 모습이 가장 먼저 보였다.

“…안녕하세요. 강태윤 본부장님.”

그의 그린 듯한 입술 끝이 약간 올라갔다. 자신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 순간부터 바라보고 있던 시선은 결코 어딘가로 비껴 가지 않는다.

서우가 흔들림 없는 걸음으로 가까이 다가가 손에 들고 있던 사직서를 그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단정하고 단아한 얼굴이었다.

어깨를 조금 넘는 머리카락은 뒤로 가지런히 묶여 있고, 피곤한 듯한 얼굴은 약간 창백하게 질려 있다. 커다란 눈이 놀랐을 땐 얼마나 크게 뜨여지는지.

강태윤은 이미 윤서우에 대한 모든 걸 지나치게 깊게 알고 있었다.

그의 긴 손가락이 서우가 내려놓은 직사각형의 사직서 위를 지그시 누르고 길게 아래로 긋는다.

그 모습이 꼭 자신의 몸 어딘가를 깊게 내리누르고 손자국을 내는 것처럼 느껴져 그녀가 몸을 움찔 떨었다.

“뭘 벌써 겁을 먹고 그래.”

이렇게 사직서까지 냈으면서.

태윤이 그런 서우의 작은 행동까지 놓치지 않고 바라보며 물었다. 그의 손가락이 사직서 위를 가볍게 두드린다.

“겁 안 먹었어.”

그가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건 회사의 윤 주임이 아니라 윤서우라는 걸 깨닫고 그녀가 한숨처럼 대답했다.

“그럼 이건 뭐야?”

“나랑 부딪치면 네가 불편할 것 같아서.”

“내가? 참 대단한 배려네.”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태윤이 상냥하게 웃었다. 강태윤은 어릴 때부터 그랬다.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선생님은 종종 그녀의 아들인데도 강태윤을 조심하라고 매번 그 꾀에 속는 서우에게 혀를 차며 말했다.

“어차피 재계약은 안 될 테니까.”

피차 불편하게 지내느니 자신이 나가는 게 맞았다. 새로운 오너 일가 중 하나인 강태윤에게 나가라고 할 순 없으니.

“내가 먹고 싶은 건 건설이야. 이런 부자재나 납품하는 회사가 아니라. 두 달. 혹은 그보다 짧을 수도 있고.”

지익.

사직서를 들어 올린 그의 손가락이 우아해 보일 정도로 길게 그걸 찢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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