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발자국 (4)화 (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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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때문에 엄마도 죽고, 나도 다리가 이렇게 됐는데 이 정도는 언니가 해 줘야지.”

“언제까지 지나간 일 가지고 이럴래. 이럴 거면 서우, 모임에 부르지 말라고 했지.”

희주도 지지 않고 맞섰다.

“웬일이니, 진짜. 난 은하 이해 가. 그래도 어떻게든 서우 좋게 보려고 노력하니까 우리 모임에 부른 거 아니야. 이 정도야 서우도 이해하는데 희주 네가 나서는 건 아니지.”

“맞아. 그래 놓고 은하 어머니 장례식장도 안 왔잖아.”

흥미롭게 상황을 보던 민하가 입을 열었고, 윤지도 맞장구를 쳤다.

선생님의 이야기가 나오자 서우가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꾹꾹, 은하의 발만 열심히 주물렀다. 찢어진 상처가 길게 남아 있어 항상 치마를 입고 다닌다. 사고의 후유증과 상처가 여전히 남아 있는 한, 자신은 은하에게 미안했다.

“그래. 우리 은하가 성격이 좋은 거지.”

곧 고개를 들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더 꾹꾹 은하의 발을 마사지해 주며 웃으면서 서우가 말했다. 민하와 윤지의 얼굴이 뻔뻔함을 넘어서 질린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됐어, 이제 그만해. 저렇게 희주 언니가 노려보는데.”

발을 확 빼면서 은하가 완전히 서우에게서 돌려 앉았다.

아무도 더 이상 어떤 말을 하지 않자, 서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착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제 물건인 옷을 넣어 통통해진 크로스백을 챙겨 들었다.

“나 약속 있는 걸 깜박했어. 밥 맛있게 먹고 가. 다음에 다시 보자. 은하는 아프면 병원에 꼭 다시 가 보고.”

“고양이 쥐 생각하는 거야, 뭐야.”

서우는 민하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열심히 얼굴의 모든 근육을 동원해 웃으며 인사하고 서둘러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윤서우.”

오늘따라 이름을 많이도 불린다고 생각하며 서우가 웃으며 뒤를 돌았다.

자신을 따라 나온 희주가 여전히 표정이 굳은 채 양손을 교차해 팔짱을 끼고 무서운 얼굴로 다가온다.

“희주야, 나 오늘 너무 피곤해.”

“밥이라도 먹고 가.”

“그냥… 좀 쉬고 싶어서 그래.”

평소라면 뻔뻔하게 앉아서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눈치 없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끝까지 눌러앉았으리라. 그런데 오늘은 너무 피곤했다.

버릇처럼 얼굴을 쓸어 올리는 서우의 손가락이 덜덜 떨리는 걸 보고 희주가 혀를 찼다. 손을 뻗어 떨리는 손을 제 쪽으로 가져간다.

꾹꾹.

자신이 은하에게 했던 대로 제 손을 이리저리 눌러 준다.

고개를 숙여 제 손을 보느라 희주의 단발머리가 몇 가닥 앞으로 나온 게 보였다. 서우가 다른 손으로 머리를 귀 뒤로 넘겨 주자 그녀가 픽 웃는다.

“진짜 고양이 쥐 생각하네. 나 매번 참고 있어. 그것만 알아 둬.”

“알아.”

“너네 회사 강태윤네가 인수했다면서.”

“음… EA가 인수한 거지, 태윤이가 돈이 그렇게 많을까?”

서우의 말에 희주가 혀를 찼다. 이 상황에서도 농담이 나오냐고 손바닥이 아프게 눌렸다.

자신을 걱정하는 걸 보면서 그냥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좋은 친구였다. 많은 도움을 받아 미안한 친구이기도 했다.

“우리 회사로 옮겨. 너 클래식 좋아하잖아. 공연 기획해. 네가 기획한 공연은 무조건 밀어줄게.”

불퉁한 목소리로 희주가 말한다.

“나 아직 계약 기간 남아 있어. 내가 공연을 좋아하긴 해도 너네 회사 들어가기 어려운 거 다 아는데. 낙하산으로 들이려고?”

“내 회산데 누가 뭐라고 해.”

“멋있다. 내 회사라니.”

“장난칠래?”

서우가 여전히 웃고 있자 희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도움은 한사코 거절하고 마는 서우의 성미를 잘 아는 까닭이다. 어릴 때부터 서우와 희주는 같은 선생님 밑에서 음악을 배웠다.

태윤과 은하의 어머니, 주하영이었다.

잘 지낼 수밖에 없는 관계였다. 넷은 항상 그렇게 친했다. 서로에게 서로가 가장 위험한 라이벌이자 가장 좋은 동료였다.

“괜찮아. 지금 있는 회사는 계약직이라도 내 힘으로 들어온 거잖아. 좀 더 있고 싶어, 희주야.”

그리고 태윤은 은하의 말대로 이런 별 볼 일 없는 계열사에 오래 있을 리 없었다.

계약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고, 재계약 또한 거의 불투명했다. 회사가 인수 합병된 마당에 계약직들이 성할 리 없었다.

그러나 서우는 다른 회사를 알아보는 한이 있어도 희주에게만큼은 더 이상 신세 지고 싶지 않았다.

“태윤이를 좀 더 보고 싶은 게 아니고?”

내내 웃고 있던 서우의 얼굴에 금이 갔다.

그 마음을 모를 리 없는 희주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걔넨 너 미워해.”

태윤과 은하 남매를 뭉뚱그려 말하는 희주의 목소리에 서우는 천천히 손을 빼냈다. 상처받지 않은 얼굴로, 언제 그랬냐는 듯 간신히 미소를 지어 보지만 목구멍 안쪽이 따끔거렸다.

“알아. 알고 있어, 희주야.”

체념한 듯한 얼굴로 수긍하는 서우를 보자 속에서 감정이 울컥 치밀었다. 은연중에 나와 버린 말이 혹여 상처가 되진 않을까, 성급한 자신의 말이 신경 쓰였다. 희주는 재빨리 사과했다.

“미안해. 은하가 하도 무례하게 구니까, 화가 나서 그랬어. 너한테 화내는 거 아닌 거 알지?”

“너는 나한테 한 번도 심한 적 없어.”

“서우야, 나는….”

“말하지 않아도 알아. 내가 너무 시간을 많이 뺏었지? 무슨 일 있는 줄 알겠다. 얼른 들어가.”

여기까지 하자는 듯 서우가 금세 활짝 웃는 얼굴로 한 걸음 떨어졌다. 이렇게 시간을 흘려보내는 건 무의미하다는 듯, 희주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손을 흔들며 다음을 기약했다.


 

***


 

여름이라 해가 느즈막히 넘어갔다.

집에 도착할 즈음이 되어서야 하늘이 붉게 흐려졌다. 서우는 서서히 지는 노을을 보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은하와 희주를 생각했다.

그들과 한자리에 함께할 수 없는 마음이 묘하게 쓸쓸한 한편, 예쁘게 지는 해를 바라보며 마음을 달랬다.

집으로 들어가기 전, 편의점에서 생수 한 병을 구입해 밖으로 나왔다. 보라색 파라솔 아래 앉아 정신없던 하루를 곱씹었다. 숨 돌릴 틈 없이 많은 일이 있었지만, 뇌리에 남은 건 역시 태윤이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다.

“…회사 그만둬야 하나.”

두 달 뒤 재계약이 성사되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실업 급여를 받을 수 있다. 실업 급여가 생기면 새로운 회사를 구하는 얼마간은 숨통을 틀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한 달 이내로 직장이 구해지지 않으면? 그때를 생각하자 막막한 현실감에 가슴이 막혔다.

서우는 냉수를 들이켰다.

매달 들어오는 월급으로 한 달을 연명하는 것조차 벅찬 상태였다. 공백이 있어선 안 되는 시기다.

매달 나가야 할 고정 비용에, 얼마 남지 않은 잔고. 게다가 희주에게는 이미 빌린 돈을 매달 갚고 있었다.

매달 꼬박꼬박 입금할 때마다 이 정도도 네게 못 해 주냐며 섭섭해하는 눈치지만, 돈 문제는 확실히 하고 있었다. 희주에게는 몰라도 서우에게는 꽤 큰 금액이었다.

“따로 적금 넣은 게 300만 원 정도… 서너 달은 버틸 수 있을까.”

어느새 두 달 남기고 실업 급여를 포기한 뒤의 일을 머리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만큼 태윤의 존재가 버거웠다. 아마도 이건 갑작스러운 조우로 인한 충격이겠지만, 기억 속에 까마득했던 그가 현실이 되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오늘만 해도 두 번이나 봤잖아.”

머릿속에 여전히 선명한 태윤을 지우며, 서우는 슬슬 모임도 정리해야겠다 마음먹었다.

좋은 대우를 받지도 못하고, 좋은 소리를 듣지도 못하는데 꾸역꾸역 그곳에 얼굴을 비치는 건 은하를 볼 수 있어서였다.

은하가 아무리 제게 모진 소리를 하고, 철없는 행동을 해도 서우는 그녀가 밉지 않았다.

은하가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사람과 결혼해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좋았고, 이런 식으로나마 여전히 연결되어 있는 게 다행이라 여겼다.

그러니 제게 내는 짜증쯤이야, 얼마든지 받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깟 감정이 뭐라고.

그런 건 아무렇지 않았다.

하지만 그동안의 모욕 같은 언사 따위는 아무렇지 않게 견뎌 놓고, 고작 강태윤 하나에.

그의 귀국에 모든 걸 정리해야겠단 생각이 들다니.

서우의 입가로 덧없는 웃음이 흩어졌다.

씁쓸한 감정을 삼키려 손을 뻗은 테이블 위에서 물병이 미끄러졌다.

쏟아진 물병 아래로 엉망으로 젖어 버린 길바닥이 제 모습 같았다.

서우는 표정을 정돈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빈 병을 깔끔하게 휴지통에 밀어 넣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익숙한 길목으로 접어드는 걸음에 속도가 붙는다. 불어온 바람에 몸에 걸친 드레스 셔츠가 흔들렸다. 부드럽게 살갗을 긁는 감촉은 어린 날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선생님 덕분에 예쁜 드레스를 원 없이 입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주했던 꿈같은 날들이 스쳐 간다.

해가 지고 있었다.

발끝으로 이어지는 그림자가 점점 짙어졌다.

머지않아 어둠이 오면 나는 삼켜지겠지.

진창인지, 무엇인지도 모를 곳에서 검게 뒹굴 것이다.

좋았던 기억 따위는 처음부터 없던 것처럼, 행복했던 순간 따위는 언제인지도 모르고 산 것처럼. 강태윤은 이런 걸 바라고 이런 옷을 선물한 걸까.

서우의 숨이 거칠어졌다.

비가 쏟아지던 그날, 선생님께 연락하지 않았더라면 모든 게 괜찮지 않았을까.

떨리는 손으로 크로스백의 끈을 꽉 붙잡았다. 그러나 온몸에 힘을 주고 참아도 토기가 치밀었다.

막다른 골목으로 뛰었다. 벽을 짚고 고개를 숙이자 밭은 숨이 거칠게 쏟아져 나왔다.

걔넨 너 미워해.

그날 건 전화 한 통이 모든 걸 바꾸어 놓았다. 서우는 스승을 잃었고, 태윤과 은하는 엄마를 잃었다.

나도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데, 너희가 어떻게 나를 용서하겠어.

과욕이다. 바라지도 않고, 바라서도 안 되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돌이킬 수 없어.”

간신히 버텨 온 날의 가장 끝에 선 기분이 들었다.

참고 있던 어떤 방아쇠가 정확히 저를 조준하는 기분이 들었다.

텅.

방아쇠가 당겨지는 소리에 깜짝 놀라 서우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아무것도 없다. 누군가 근처의 쓰레기통이라도 차는 소리였으리라.

완전히 주변이 어두워진 걸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은 평소와 다름없이 담담했지만, 아직 마르지 않은 신발이 질척질척, 발자국을 남겼다.

모든 게 검어질 시간이었다.


 

***


 

“윤 주임, 인사팀에서 찾던데?”

아침 일찍부터 반기는 소리에 서우가 등을 돌렸다. 인사팀에 다녀오는 길이라며 강 대리가 환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저를요?”

“두 달 남았잖아. 재계약 건 먼저 이야기하려는 거 아냐?”

미련 따윈 남기지 않고 그만두기로 결심했지만, 강 대리의 너스레에 저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서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강 주임이 웃으면서 말을 잇는다.

“우리 윤 주임이 일 잘했잖아. 이렇게 갑자기 인수 합병만 안 됐어도 정직원 됐을 텐데.”

이제껏 회사 내에서 사람들이 꺼리고, 성가신 일은 전부 서우가 도맡아 했다. 강 대리 역시 서우에게 종종 신세를 졌으니 잘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 이번엔 기대해 보자며, 그녀가 언질했다.

통장에 남은 300만 원과 월세, 그리고 빚.

사람 마음이 이렇게 간사한가.

기대라는 말에 마음이 또 흔들렸다.

서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옷맵시를 간단하게 가다듬었다.

“다녀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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