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발자국 (1)화 (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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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회사가 떠들썩했다.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서우가 시흥 공장 발주를 마치고 한숨 돌렸을 땐 1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얼마 전, 부도 처리가 될 뻔한 회사를 EA 그룹에서 인수했다.

부도는 자금 악화와 경영난이 원인이었다. 직원들에게 지급할 월급이 점차 밀리기 시작했고, 공장에선 밀린 대금 재촉이 올 즈음이었다. 다들 회사를 탈주할 생각에 마음이 반쯤 떴을 때 대기업인 EA에서 인수를 추진한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그리고 일사천리로 회사가 매각되며 중소기업에서 하루아침에 대기업 계열사 중 하나가 됐다. 윗선을 제외한 일반 사원들은 구조 조정 없이 그대로 본 회사 업무를 유지한다는 이야기에 이직을 알아보던 직원들은 전부 회사에 남기로 했다.

대기업 계열사로 흡수되어 연봉이 오르고, 명함이 달라진다는데 마다할 사람이 없었다.

몇 개월 사이 일어난 일들을 떠올리던 서우가 뻐근한 뒷목을 주무르며 잠시 쉴 무렵, 옆에 있던 강 대리가 그녀의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시흥 공장에선 뭐래?”

“말일까진 힘들고, 월초까지는 물량 맞춰 보겠대요.”

“윤 주임이 고생이 많네.”

사실 EA에 인수되기 전이 훨씬 더 힘들었다. 서우의 회사는 주로 건설 자재를 만들어 해외로 수출하고 대기업에 수주를 받아 납품을 하는 곳이었다.

건설업은 기본적으로 오가는 돈의 단위가 크다. 그래서 EA에 인수되기 전, 대금이 밀리기 시작했을 때 발주 업무를 전담하고 있는 서우가 대부분의 비난과 욕을 들어야 했다.

“윤 주임은 재계약이 언제지?”

“음…. 두 달 뒤요.”

그러나 이렇게 인수 합병이 되면서 계약직들은 애매해졌다. 기존 회사의 정직원은 고용이 보장된다지만, 재계약을 앞둔 계약직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윤 주임은 일 잘해서 재계약 될 거야.”

2년 뒤 정직원으로 전환해 준다는 말을 믿고 버텼으나, 재계약이 임박한 시점에서 그건 완전히 불투명한 말이 됐다. 상황이 완전히 뒤바뀐 탓이다. EA 본사에서 내려온 윗선들에게 입사 당시 들었던 모호한 약속을 들먹일 정도로 서우는 어리석지 않았다.

“자자, 여기 주목하세요. 오늘 EA에서 새로 오신 강태윤 본부장님입니다.”

직원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구 쪽에서 머리가 벗겨진 부장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그보다 키가 훨씬 큰 누군가를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있었다. 서우 또한 자신도 모르게 등을 바로 세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상대를 바라봤다.

강태윤.

EA 그룹에서 새로 온 본부장.

그게 강태윤이란 사실은 벌써 새 본부장이 온다는 소문이 돌 때부터 알고 있었다.

190cm이 넘는 키에 운동선수라도 했을 법한 커다란 체격과 탄탄한 몸은 단숨에 이목을 집중시켰다.

검은 머리를 포마드로 넘긴 인상이 깔끔했다. 반듯한 이마 아래 짙은 눈썹, 가늘게 찢어진 눈은 언뜻 보면 말도 걸지 못할 정도로 매섭다. 미간 사이로 쭉 뻗어 있는 콧날과 또렷한 이목구비가 수려한 느낌을 남겼지만, 예의상으로도 웃지 않는 꽉 다물린 얇은 입술이 그의 인상을 단번에 정의했다.

너털웃음을 치는 부장과 달리 주변을 무심하게 훑는 딱딱한 인사에 직원들도 살짝 긴장한 채 박수를 쳤다.

그때 좌중을 둘러보던 시선이 서우와 마주쳤다.

잠시였다. 순식간에 몸을 얼어붙게 만든 시선은 이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서우를 지나쳤다.

뒤늦게 심장이 저만 알 정도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찰나의 마주침에서 어떤 기색도 느낄 수 없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절반, 그래도 조금은 서운하다는 생각이 첨예하게 부딪쳤다.

이내, 무슨 염치로 서운함을 느낀 거냔 비난이 마음속에서 불쑥 솟아올랐다.

“강태윤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별다른 감정 없는 무뚝뚝한 인사말을 마치고 그가 등을 돌려 다음 파트로 걸어 나갔다.

군더더기 없는 곧은 움직임. 절제된 동작 속에도 그의 모습이 하나하나 서우에게 각인되었다.

근사한 슈트 차림의 단정한 소매 끝에 드러난 매끈한 손등, 부드럽게 이어지는 곧고 가지런한 손가락은 여전했다.

긴 손가락으로 피아노 건반을 지그시 누르던 모습과 함께 어디선가 피아노 선율이 들리는 듯하다. 멍하니 오버랩 된 기억을 비집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윤 주임?”

“…네?”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그는 없었다. 저마다 자리로 돌아가 정리하고 앉는 직원들 사이에서 강 대리가 서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잘생겼다, 그치? 사람은 좀 싸늘해 보이는데 일은 잘할 것 같네. 미국에서 MBA 마치고 귀국했다더니. 왜 본사로 안 가고 여기로 왔는지 좀 의문이긴 해.”

이미 EA 그룹의 로열패밀리란 소문을 달고 온 남자였다.

강태윤의 거취가 결정된 직후, 사람들은 날고 기는 계열사 중 왜 하필 이제 막 인수한 이곳을 택한 건지, EA가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장 떨어지는 곳으로의 발령은 곧 좌천 아닌가, 하는 소문이 있었다.

그는 EA 그룹 주철원 회장의 외손자였다.

아들인 부회장 주영석에게 후계를 맡길 이렇다 할 자식이 없어 난감해하던 차, 후계자로 강태윤이 거론되기 시작한 것이다.

주철원의 딸이자, 이미 죽은 주하영의 핏줄이라 승계에선 멀었지만, 마땅한 대안이 없어 결국 그 뒤를 강태윤이 잇는 게 아니냐는 말이 돌았다. 이런 곳으로 좌천되듯 보낸 것도 사실 삼촌인 주영석이 강태윤을 견제해서라는 소문에 소문이 꼬리를 이었다.

서우가 강 대리의 말에 그저 희미하게 웃고 말았다.

어차피 저와는 상관없는 말들이고, 강태윤에게 이 회사는 잠시 스쳐 지나가는 곳일 뿐이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회사 다닐 맛이 없었는데 눈 호강은 하겠다, 그치, 윤 주임?”

“볼 일이 많이 있을까요.”

“그건 그래.”

강 대리의 손가락이 위층을 가리켰다. 저 위에 있지, 보통 아래로는 안 내려오잖아, 하고 쑥덕대는 그녀를 따라 웃으면서도 이상하게 가슴 한쪽이 불편했다.



 

어느새 12시가 되어 서우는 제 가방을 챙겼다. 오후부터 반차를 낸 터라 점심시간 전에 회사를 빠져나가기 위해서였다.

“아, 오늘 반차였지? 그러고 보니 윤 주임은 항상 20일에는 반차 쓰더라?”

“들러야 할 곳이 있어서요.”

“그게 어딘데?”

“…신세진 곳이요.”

“신세 많이 졌나 보다. 매번 황금 같은 반차까지 쓰고. 그래, 잘 다녀와. 내일 보자고.”

“네. 점심 맛있게 드세요.”

팀원들에게 인사하고 서우가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아침만 해도 괜찮았던 하늘이 오후에 들어서자 금방이라도 뭐가 내릴 것처럼 끄무레했다.

잠깐 현기증이 일어 회사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오랜만에 본 태윤의 얼굴이 환영처럼 스쳐 지나간다.

너 손이 예쁘게 생겼구나?

서우가 픽 웃었다.

그리고 시선을 내려 자신의 손가락을 이내 내려다보았다.

잘 모르겠다.

그때의 제 손이 지금과 얼마나 달랐는지, 얼마나 예뻤는지.

“손이 예쁜 건 저면서.”

크로스백을 고쳐 매면서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을 그제야 뒤늦게 뱉었다.

강태윤은 손이 참 예뻤다.

그가 피아노를 치면 건반 위에서 유려하게 움직이던 그 손만 보게 될 정도로 예쁜 손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바로 옆에서 그가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본 게 아직도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데….

이제는 돌아갈 수 없다.

강 대리의 말처럼 그들은 위와 아래로, 위치와 세계가 완전히 나뉘었다.

사회에 나온 뒤 그와는 모든 게 결코 동등하지 않다는 걸 서우는 이미 깨달았다.

씩씩한 걸음으로 아무렇지 않게 회사 앞의 버스 정류장 앞에서 자신이 탈 버스를 기다렸다.

점점 술렁대던 마음이 가라앉는다. 도착한 버스를 탈 때쯤엔 완전히 제 페이스를 되찾았다. 어차피 살다 보면 한 번은 마주쳐야 했다.

버스의 창문에 머리를 기대자 곧 그 너머 창으로 빗방울이 한 방울씩 툭, 툭, 내렸다. 한여름답게 시원하게 쏟아지는 소나기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퍼붓는다.

그게 꼭 흐리기 그지없는 자신의 앞날 같아서 서우는 애꿎은 눈을 비볐다.



 

비 때문에 버스에서 내려 이곳까지 택시를 타야 했다.

내리는 빗줄기에도 쉽사리 더위가 가시지 않았다. 오히려 온몸에 달라붙는 습도만 더해졌다.

서우가 저택의 정문에 서서 담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성 같은 저택 끄트머리를 한 번 바라봤다. 매달 오는 곳이라 익숙해질 만한데 괜스레 이곳에 올 때마다 주눅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윤서우예요.”

예의 바른 인사 끝에 대문 옆에 붙은 작은 문이 열렸다. 돌로 만들어진 계단을 올라가 저택이 아닌, 짧은 산책로를 걸어야 갈 수 있는 별채로 바로 걸음을 옮겼다.

하얀 인도산 대리석으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본채보다는 작았지만, 꼭 어느 동화에서나 나올 법하게 지어진 곳이라 서우는 어릴 때부터 이곳이 가장 좋았다.

가장 사랑하는 딸을 위해 지어진 이 아름다운 별채의 주인은 이제 없었다.

“서우 아가씨,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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