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탈출하라-850화 (850/850)

#850

개항장 인근의 저택에서 유유자적하게 지내고 있는 윤휴는 장남인 윤의제가 매일 아침 문안 인사와 함께 북미신문을 가져오면, 이를 살펴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렇기에 윤휴는 오늘도 평소처럼 윤의제가 가져온 북미신문을 받아들고 가장 먼저 1면 기사를 살피기 시작했고.

“상훈제도를 개편한 것으로 북미왕국의 발전은 한층 가속화되겠구나.”

상훈제도의 개편에 관련된 기사를 읽은 윤휴가 이렇게 평가하자, 윤의제가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아버님. 이번에 개편한 북미왕국의 상훈제도는 부유한 북미왕국에선 무척이나 효과적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맞다. 물론 돈이란 것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지만, 북미왕국의 관리나 연구원쯤 되면, 돈이 크게 궁하진 않을 테니, 포상금을 준다 하더라도 이들의 의욕을 크게 고취시키지는 못했을 게다. 헌데 이번에 개편한 북미왕국의 상훈제도는 돈이 아니라 명예를 쥐여주는 셈이니...”

“예. 아마 공을 세우기 위해 무척 분발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관리나 연구원, 장인뿐만 아니라, 상인, 예술가들에게도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상을 내리니, 앞으로 있을 북미왕국의 발전은 다양한 분야에서 이루어질 것 같고요. 그리고...이 훈장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괜찮아 보이는군요.”

“그러게나 말이다.”

물론 조선에서도 훈장과 비슷한 것은 있다.

바로 국왕이 공신에게 내리는 문서인 공신교서가 그것이다.

공신교서는 공신이 어떤 공훈을 세워 공신이 되었는지, 그리고 이로 인해 어떠한 포상을 받았는지 상세히 쓰여 있는 문서이기에, 이 문서가 있는 가문은 나라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집안이라는 것을 나라에서 인정한다는 것이었고, 이는 훈장과 흡사했다.

다만, 공신교서와 훈장의 차이점이라면, 공신교서는 문서이다 보니 쉽게 훼손될 여지가 있어 집안 깊숙이 보관해야 했다면, 훈장은 금속으로 되어 있어 훼손될 여지가 적을뿐더러, 장신구처럼 옷에 달 수 있게 만들었기에, 훈장을 패용함으로써 굳이 입 아프게 떠들어대지 않더라도, 자신이 나라에 큰 공을 세웠음을 자랑할 수 있었고, 가문의 권위를 높일 수 있었다.

그러니 명예를 중요시하는 조선의 양반들에게는 꽤나 괜찮아 보일 수밖에 없었고.

더불어 공신을 책봉하는 것보다, 이렇게 훈장을 수여하는 것이 조선 왕실에서도 부담이 덜해 보였기에, 아마 머지않은 미래에 조선도 북미왕국의 상훈제도를 참고해 조선의 상훈제도를 개편하고, 훈장도 제작하지 않을까 싶은 윤휴가 이를 말하자, 윤의제는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인 후, 윤휴의 눈치를 슬쩍 살피며 입을 열었다.

“헌데...이 기사를 보니 조금 아쉽긴 합니다.”

“음? 무엇이 말이냐.”

북미신문에 눈을 떼지 못하던 윤휴가 의외의 말을 하는 아들을 바라보았고.

이에 윤의제가 윤휴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아버님께서는 북미왕국의 건국과 발전에 크게 일조하셨잖습니까. 헌데 북미왕국의 백성이 아니라는 이유로 훈장을 받지 못하니...아쉽고, 또 섭섭하고, 좀 그렇습니다.”

물론, 건국 훈장의 경우는 다른 훈장과는 달리 국적에 상관없이 수여할 수 있었지만, 북미왕국에서는 언론에 알릴 때 의도적으로 이 사실을 누락했다.

어차피 조선과의 외교 관계 때문에, 건국 훈장 수여 대상자인 조선인들에게는 비공식적으로 훈장을 수여하기로 한 만큼, 이를 알릴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특히, 건국 훈장은 북미왕국의 건국에 일조한 이에게 수여하는 훈장인데, 이 훈장을 외국인에게도 수여한다고 알린다면, 그 대상은 당연히 조선인일 수밖에 없었으니.

해서 북미왕국에서는 이를 의도적으로 누락해 언론에 알렸고, 이 때문에 진실을 모르는 윤의제가 북미왕국 백성들에게만 훈장을 수여하겠다는 북미왕국의 결정에 섭섭함을 토로한 것이다.

특히, 자신이야 북미왕국의 건국이나 발전에 큰 공을 세웠다고 여기지 않았지만, 아버지인 윤휴는 개척촌을 잘 운영하면서 정성국을 뒤에서 지원해 북미왕국의 건국에 한 팔 보태기도 했고, 북미왕국이 건국된 이후에는 북미왕국의 헌법을 제정하는 것을 총괄해 북미왕국의 법체계를 만들었으니, 북미왕국의 건국과 발전에 엄청난 공을 세운 셈이었다.

그런 만큼 아버지인 윤휴가 북미왕국의 훈장을 받을 자격은 충분해 보이는데, 북미왕국의 백성이 아니라는 이유로 훈장을 받지 못하니 안타까웠고.

처음 의아한 기색으로 아들을 바라보던 윤휴는 윤의제의 말을 듣고,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북미왕국, 정확히는 북미왕국의 국왕인 정성국의 처사에 내심 섭섭함을 내비치는 아들을 달래듯이 말했다.

“허허허. 훈장은 북미왕국에 큰 공을 세운 북미왕국인에게만 수여되는 것이니 조선인인 내가 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아쉽고 섭섭할 것이 무어냐. 그리고 훈장이 북미왕국 내에서야 명예를 주지만, 조선에서는 화려한 금속 쪼가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너도 알지 않으냐.”

“그래도...아버님의 업적이 잊힌 것 같아 솔직히 조금 안타깝습니다.”

윤휴가 북미왕국을 위해 여러 일을 했다는 것을 정성국이나 몇몇 사람들은 분명 알고 있었다.

허나 조선과의 관계 때문에, 대외적으로 윤휴의 업적은 모두 삭제되었고.

물론, 정성국은 먼 훗날 비밀리에 보관한 문서들을 공개해, 윤휴의 업적을 알릴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그건 윤휴뿐만 아니라 자신마저 죽고 난 이후이니만큼, 실제 아버지의 업적이 공개되는 것을 보지 못할 테니 윤의제로서는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아버지인 윤휴가 살아생전에는 별다른 명성을 떨치지 못하는 것이, 그리고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아들로서 내심 안타까웠다.

이 때문에 윤의제는 차라리 윤휴에게 북미왕국으로 이주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몇 차례 권했었지만, 윤휴는 오히려 죽을 때가 가까워진 만큼, 개항장 인근에 묻히고 싶다며 이곳에 애착을 드러냈기에, 더는 권하지 못했고.

헌데, 오늘 자 북미신문에 실린 상훈제도의 개편과 훈장에 대해 쓰여 있는 기사를 보고, 북미왕국에서 이 훈장을 받는다면 아버지가 제대로 인정받는 것 아니겠는가 싶었는데, 기사 말미에 북미왕국인에게만 수여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자 낙담했고, 그 때문에 더욱 마음이 상했고 말이다.

해서 아버지인 윤휴와 훈장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슬쩍 이를 내비친 윤의제였는데, 아버지는 하나도 안타까울 것이 없다며 허허거리며 웃자, 윤의제는 그런 아버지가 더욱 안타까워 자신의 속내를 슬쩍 밝히자, 윤휴는 그런 아들을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며 다시 한번 타일렀다.

“그럴 리야 있겠느냐. 그저 훈장 수여자를 북미왕국인에 한정했기에 그런 것이겠지. 그리고...내가 조선인이다 보니 북미왕국에서 나에게 훈장을 수여하게 되면 여러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기도 하고 말이다.”

“그야 그렇지만...”

물론 윤의제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거야 몰래 훈장을 수여하면 그만 아닌가 싶었고.

해서 이를 말하려 할 때 안채 바깥에서 청지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 어르신.”

“음? 무슨 일이냐?”

“원상의 대방께서 손님 한 분과 함께 방문하셨습니다.”

“음? 원상의 대방이?”

이에 윤휴는 고개를 갸웃하며, 혹여 아들인 윤의제가 원상의 대방과 무슨 약속이라도 잡았나 싶어 윤의제를 바라보았지만, 윤의제 역시 의아한 기색이었기에, 생각을 멈추고 말했다.

“알겠다. 곧 나갈 테니 일단 사랑방으로 모시거라.”

“알겠습니다. 주인 어르신.”

* * *

윤휴가 윤의제와 함께 사랑방으로 들어가자, 미리 사랑방에 앉아 있던 원상의 대방인 이천호와 처음 보는 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윤휴에게 인사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백호 어르신.”

“허허허.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요새 무척 바쁘시다 들었는데 말입니다.”

“조선의 상계도 많이 커졌을뿐더러, 북미왕국의 도움으로 대외 무역이 활발해지니 무척 바쁠 수밖에 없더군요. 해서 격조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백호 어르신.”

“허허허. 아닙니다. 그보다 함께 오신 분은...”

윤휴가 이천호와 함께 온 처음 보는 인물을 바라보자, 이천호가 함께 온 이를 소개했다.

“아. 이분은...북미왕국 국왕 전하의 명령으로 북미왕국 본토에서 오신 관리청의 고위 관리이십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웃는 늑대라고 합니다.”

이천호의 소개가 끝나기 무섭게 웃는 늑대는 윤휴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고.

이에 윤휴는 처음 사랑방에 들어왔을 때, 이천호와 함께 방문한 이가 조선의 복식을 입었기에, 당연히 조선인, 아마 원상의 인물이 아닐까 싶었던 예측이 빗나갔기에, 잠깐 놀란 표정으로 웃는 늑대를 바라보다가, 급히 입을 열었다.

“아. 그렇습니까.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군요. 이쪽은 제 장남입니다.”

그렇게 네 사람은 통성명을 모두 마쳤고.

그 후 사랑방 안에 잠깐 적막이 감돌자, 윤휴는 곧바로 웃는 늑대를 바라보고 질문을 던졌다.

“헌데 관리청의 관리께서 무엇 때문에 이 뒷방 늙은이를 만나러 오신 겝니까?”

“뒷방 늙은이라니요. 개척촌을 운영하시면서 원상과 함께 조선의 유민들을 모아 북미 대륙으로 이주시켜 북미왕국의 건국과 발전에 큰 공을 세우시고, 북미왕국의 법체계를 정비하신 어르신이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웃는 늑대의 말에 윤휴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물론, 북미왕국의 고위 관리들이 자신에 대해 잘 알긴 하지만, 이는 조선 출신 고위 관리들과 법무청에 속한 이들에 한정된 이야기였지, 관리청 소속의 관리가 알법한 내용은 아니었다.

그나마 지금 눈앞에 있는 인물이 조선 출신이라면야, 개척촌 시절 윤휴를 먼발치서나마 보고 이를 알고 있나 보다 싶겠지만, 그것도 아니었고.

해서 윤휴가 꽤나 의외라는 듯 웃는 늑대를 바라보자, 웃는 늑대가 빙긋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관리청 소속인 제가 윤휴 님의 업적을 자세히 알고 있는 것이 의외이십니까?”

“허허허. 그렇습니다. 저와 관련된 사항은 북미왕국 내에서도 기밀인 것으로 압니다만...”

“그렇지요. 그렇기에 아마 대부분의 고위 관리들은 모를 겁니다. 물론, 조선 출신 고위 관리들이야 알겠지만 말입니다.”

웃는 늑대의 말에 윤휴는 고개를 끄덕이며, 헌데 너는 어찌 나에 대해 자세히 아느냐는 시선을 보내자, 옆에 앉아 있던 이천호가 끼어들었다.

“웃는 늑대는 북미왕국 국왕 전하의 명령을 받고, 건국 훈장을 수여하기 위해 이곳 조선까지 오셨습니다. 그러니 건국 훈장의 수여자인 백호 어르신의 업적에 관해 자세히 알고 있는 것이지요.”

“그게 무슨?!”

“예?!”

이천호의 말에 방금 전까지 북미신문을 보며 훈장에 관해 이야기했던 윤휴와 윤의제는 화들짝 놀라며 이천호를 바라보았고.

이에 웃는 늑대가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전 국왕 전하의 대리로 윤휴 어르신과 윤의제 님께 건국 훈장을 수여하기 위해, 이곳을 방문한 겁니다.”

“어? 저도...말입니까?”

웃는 늑대의 말에 윤의제가 눈을 크게 뜨자, 웃는 늑대가 당연하다는 얼굴로 답했다.

“그렇습니다. 윤의제님 역시, 윤휴 어르신을 도와 개척촌을 운영하며 북미왕국의 건국에 크게 공을 세우시지 않았습니까.”

자신을 추켜세우는 웃는 늑대의 말에 윤의제가 당황하며 입을 열었다.

“어...물론 개척촌의 운영을 돕긴 했지만, 북미왕국의 건국에 크게 공을 세웠다고는...”

“아닙니다. 윤의제님이 아니었다면, 개척촌 초기에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북미왕국의 건국이 미뤄졌을 거라고 전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윤의제님도 건국 훈장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정성국이 자신의 공을 인정해주었다는 말에 윤의제는 자연스럽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진정시키며, 질문을 던졌다.

“헌데 북미왕국의 훈장은 북미왕국인에게만 수여되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렇습니다만, 건국 훈장의 경우는 예외입니다. 여기 계신 윤휴 어르신과 윤의제님도 그렇고, 원상을 운영하며 북미왕국 건국에 크게 일조한 이천호 어르신을 비롯해 꽤 많은 분들이 조선인이니까요. 다만, 굳이 이 사실을 널리 알릴 필요는 없어 보야 알리지 않았을 뿐이지요.”

“아. 그렇습니까?”

웃는 늑대의 말에 윤의제가 탄성을 지르자, 웃는 늑대가 덧붙여 말했다.

“해서 원래는 여러분들을 북미왕국으로 초대해, 전하께서 직접 훈장을 수여할 생각이었습니다. 허나, 여러분들은 조선인이다 보니 공식적으로 훈장을 수여하게 되면, 조선에 숨겼던 사실들이 밝혀질 수밖에 없어, 서로 불편할 것 같아 이렇게 비공식적으로 훈장을 수여하게 된 것이지요.”

“아...”

웃는 늑대의 설명에 윤휴도, 윤의제도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웃는 늑대가 둘을 바라보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이제 훈장 수여식을 진행하도록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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