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탈출하라-849화 (849/850)

#849

그렇게 잉글랜드와 관련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난 후, 정성국과 조용한 곰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미지근해진 커피를 홀짝이며, 잠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그러다 조용한 곰은 문득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 참. 그리고 시베리아 부족 연합에 나가 있는 외무청 관리에게서 보고가 올라왔는데...준가르에서 새한성에 외교 사절을 파견하고 싶답니다.”

“음? 준가르에서?”

북미왕국과 준가르의 관계는 나름 괜찮은 편이었다.

이전부터 정성국의 명령에 따라 외무청 관리들이 상인으로 위장해 준가르와 접촉해오기도 했고, 준가르가 청나라와 한창 전쟁 중일 때, 북미왕국이 중간에서 두 나라를 중재해 결국 평화조약을 체결케 했었는데, 이때 북미왕국은 은근히 청나라를 압박하며 준가르의 편을 들었고, 덕분에 준가르는 중원으로 진출하지는 못했지만, 막대한 이득과 원나라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원나라 옥쇄마저 챙길 수 있었으니 준가르로서는 북미왕국을 우호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당연했다.

다만, 준가르는 내륙 깊숙이 위치한 국가이다 보니, 교통이 불편한 탓에 자주 왕래하기는 어려웠고.

물론, 북미왕국이 준가르와의 관계가 무척 중요하다고 판단했다면야, 비행기도 있겠다 준가르와 협상해서 항공로를 개척하고, 이를 이용해 외교관을 준가르에 주재시켜 연락망을 구축해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성국이 준가르를 나름 중요하게 여긴 것은 청나라의 신경을 분산시키기 위함인데, 이미 준가르는 제 역할을 톡톡히 해 주었고.

덕분에 북미왕국의 중재로 준가르와 청나라가 평화조약을 체결한 이상, 북미왕국에 있어 당장 준가르의 가치는 크지 않았다.

정확히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가며 준가르와 긴밀하게 교류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해야 할까.

해서, 그 이후 준가르와의 외교는 시베리아 부족 연합에 나가 있는 외무청 관리들이 전담하고 있었고, 이들도 준가르와 긴밀하게 교류하기보다는, 1년에 한 번 준가르와 교역하는 국영 상단을 통해 외교 서신을 주고받는 정도로 건조하게 교류하는 수준이었고.

헌데 갑자기 준가르에서 북미왕국의 수도인 새한성에 외교 사절을 파견하고 싶다고 하니, 정성국은 의아한 표정으로 준가르에 무슨 일이 있나 하는 생각하다가 문득 청나라의 사정을 떠올리고 미간을 찡그렸다.

“아. 혹시 청나라의 어수선한 상황을 확인하고 다시 침공을 생각하는 건가?”

강희제와 청나라 조정이 북경의 방어를 우선시하면서 시간을 끈 탓에, 북경으로 진군하던 반란군이 박살 나며 반란이 진정되나 싶었던 청나라 내부의 혼란은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었다.

다만, 이번에 북미왕국에서 청나라에 외국인 노동자를 모집하면서, 반란군을 은연중에 돕던 이들이나 굶주림에 지쳐 살기 위해 반란군에 합류했던 이들이 하나둘 북미왕국으로 향하는 배에 올라타기 시작하면서 청나라 내부가 조금 안정되는 모양새였고.

여기에 각지를 돌아다니며 반란군들을 진압할 토벌군의 구성 역시 겨우 끝내고 출정을 앞두고 있으니, 외무청에서는 올해나 내년 중에는 청나라 내부가 안정되리라고 보고 있었다.

헌데, 이런 상황에서 준가르가 평화조약을 깨고 청나라를 공격한다면, 청나라, 더 나아가서는 동아시아의 상황이 꽤나 복잡해지기에 정성국이 지레 걱정하자, 조용한 곰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예? 아하하하. 설마요. 물론 준가르가 단독으로 청나라와 평화조약을 체결했다면야, 현 청나라의 상황을 보고 욕심을 부려볼 수는 있었겠지요. 하지만 준가르가 청나라와 맺은 평화조약은 아국이 중재했고, 준가르는 아국이 얼마나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는 만큼, 섣불리 조약을 깨지는 않을, 아니 못할 겁니다.”

비록 북미왕국과 준가르가 긴밀하게 교류하지는 않지만, 시베리아 부족 연합을 통해 준가르도 북미왕국의 정보를 충분히 습득하고 있었다.

그러니 준가르는 북미왕국이 얼마나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고, 그런 만큼 준가르는 북미왕국이 중재한 청나라와의 평화조약을 결코 깨지 못할 거라고 확신하는 조용한 곰이었고.

“흐음. 그럴려나?”

정성국이 그 말에 수긍한 듯 보이자, 조용한 곰이 덧붙여 말했다.

“예. 그래서 준가르는 청나라와 평화조약을 체결한 이후, 몽골 지역에는 치안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병력만 배치하고, 당시 동원했던 병력을 모두 회군시킨 것 아니겠습니까.”

준가르는 청나라와 평화조약을 체결하자마자, 청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동원했던 주력 병력인 10만여 명을 모두 회군시켰는데, 이는 준가르가 청나라와 평화조약을 체결한 이상 청나라의 영토인 동쪽과 남쪽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뜻과도 같았고.

이는 유목민들이 세운 나라들이 대부분 약탈 경제로 돌아간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만큼 준가르가 청나라와 맺은 평화조약을 중요시한다는 것과 같았으며, 이는 준가르가 청나라를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이 조약을 중재한 북미왕국을 두려워해서일 것이 분명했다.

그런 만큼 준가르는 평화조약을 절대 깨지 않을 거라고 다시 한번 확신에 찬 어조로 이야기하는 조용한 곰이었고, 이에 정성국은 일리가 있다고 여겨 수긍했다.

“흠. 뭐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허면 준가르에서 대체 무슨 일로 아국에 외교 사절을 파견하겠다는 거지?”

이런 정성국의 의문에 조용한 곰이 당연한 것 아니냐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야 아국과 우호 관계를 다지기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음? 고작 친선을 위해 사절단을 파견한다고? 그 멀리서?”

“예. 아시다시피 준가르는 국경을 접한 시베리아 부족 연합과 교류가 잦은 편이라, 시베리아 부족 연합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편인데, 최근 시베리아 부족 연합의 발전이 꽤 눈부시잖습니까.”

러시아 차르국의 통치 아래에 있던 시베리아 지역의 경우, 정말 제대로 된 도시도 거의 없는 오지에 가까운 땅에 불과했었다.

허나 북미왕국이 개입해 시베리아 부족들이 연합을 이루어 러시아 차르국을 몰아낸 이후에는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일단 북미왕국이 시베리아 지역에 사는 이들이 필요로 하는 식량을 비롯한 각종 생필품을 무척 저렴한 가격에 공급해주자, 넓은 지역에 소규모로 흩어져 살던 시베리아 원주민들이 식량을 비롯한 각종 생필품을 구할 수 있는 시장이 존재하는 도시로 하나둘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인구가 모이기 시작했고.

인구가 모이니 자연스레 노동력을 쉽게 확보할 수 있었고, 이 노동력을 활용해 도시 주변을 개발하면서, 시베리아 부족 연합의 도시들은 점차 발전하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르며 시베리아 부족 연합의 발전은 더욱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북미왕국의 입장에서야 이러한 발전이 별 것 아닐지 몰라도, 시베리아 부족 연합 주변의 나라들, 즉 러시아 차르국이나 준가르, 청나라, 조선에서 보기에는 정말 놀라운 성장일 수밖에 없었고.

조용한 곰의 말에서 이를 이해한 정성국이 탄성을 지르며 중얼거렸다.

“아아. 그렇지. 그리고 시베리아 부족 연합의 발전에는 아국의 도움이 꽤 컸고. 그 때문에 준가르에서 관심을 보이는 건가?”

“그렇습니다. 준가르의 외교 사절과 접촉했던 외무청 관리의 이야기에 따르면, 준가르는 나라의 경제적 구조를 약탈 경제에서 시베리아 부족 연합처럼 생산 경제로 바꾸고 싶어하는 눈치였답니다.”

“허어. 그게 정말인가?”

정말 의외의 말이었기에 정성국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등을 떼고 몸을 앞으로 숙이며 되물었다.

물론, 준가르가 다른 유목 제국과는 다르게 상업에도 신경 썼고, 기후가 허락하는 한 농경도 병행하긴 했지만, 본질은 전형적인 유목 제국이었고 나라의 경제적 구조는 약탈 경제였다.

헌데 그런 준가르가 나라의 경제적 구조를 약탈 경제에서 생산 경제로 바꾸고 싶어한다는 것은, 나라의 정체성을 유목 세력에서 정주 세력으로 바꾸겠다는 소리와 같았고.

이는 준가르라는 나라가 더 오랫동안 유지될 기반이 생긴다는 뜻과도 같았다.

원래 유목 세력은 정주 세력과는 달리 강력한 기병을 쉽게 확보할 수 있다는 단 하나의 장점을 제외하면, 단점이 훨씬 많았다.

물론, 준가르는 다른 유목 제국과는 다르게 사회 구조가 조금 유연한 편이기는 했지만, 준가르 역시 유목 제국인 탓에, 유목 제국의 단점이라 할 수 있는 불안정한 정치 구조라던가 학문이 낙후되어 있어 거대한 세력을 제대로 통치할 대량의 인적 자원을 확보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 때문에 정성국은 준가르가 당장은 잘 나간다 하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다른 정주 세력에 뒤처지다 사라질 것으로 보았고.

더불어, 유목 제국이라 걸핏하면 주변국들을 약탈하는 것이 썩 탐탁지 않은 탓에 정성국은 준가르의 외교적인 가치가 떨어지니 적당히 거리를 두자는 외무청의 결정에 별다른 의견을 제시하지 않기도 했고 말이다.

헌데, 준가르가 정주화 된다면, 그리고 이 과정에서 북미왕국이 돕는 대신, 준가르를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다면, 북미왕국의 영향력은 중앙아시아까지 확대될 것이 분명했고, 준가르 주변국들도 준가르의 약탈에 떨지 않아도 될 테니, 꽤 매력적으로 보였고.

해서 정성국이 흥미를 보이자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물론 자세한 것은 직접 이야기를 나눠봐야겠지만 말입니다.”

조용한 곰의 대답에 정성국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결정을 내렸다.

“그럼 준가르의 외교 사절을 새한성으로 초대하도록 하게.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지.”

“알겠습니다. 전하.

* * *

“아. 드디어 훈장의 제작이 끝났다고?”

“그렇습니다. 전하.”

관리청장의 보고에 정성국은 반색했다.

상훈 제도를 개편하고 엄격한 심사를 통해 훈장 수여자의 명단마저 확정했지만, 아직까지 훈장 수여식을 열지 못한 것은 바로 훈장의 제작에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헌데 드디어 훈장의 제작이 끝났다고 하니, 미뤄두었던 훈장 수여식을 진행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정성국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이거 훈장 제작에 이렇게 시간이 걸릴 줄 알았다면, 좀 단순한 외형을 선택할 것을 그랬어.”

그랬다.

훈장 제작에 생각보다 시간이 걸린 것은 정성국이 수많은 견본품 가운데 가장 화려한 견본품들을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정성국은 단순하게 훈장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니만큼, 화려한 것이 좋지 않을까 싶어 견본품 가운데 가장 화려한 견본품들을 선택한 것이었지만, 화려하다는 것은 그만큼 장인들의 손이 많이 간다는 의미였다.

그냥 틀에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일일이 세공해야 할 정도로 말이다.

거기에 북미왕국을 건국한 후 공을 세운 7500여 명에게 달아줄 훈장을 만들어야 했으니.

물론 북미왕국에서 금속 공예 장인들을 총동원한다면야 금방 만들겠지만, 훈장 제작이 당장 시급한 일도 아닌데, 금속 공예 장인들을 총동원해 기존의 일을 내팽개치고 훈장 제작에 매달리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덕분에 훈장 수여식의 준비가 끝났음에도, 이를 미뤄야만 했고, 이 때문에 정성국이 농담처럼 훈장을 단순한 외형으로 만들 것을 그랬다고 이야기하자, 관리청장이 고개를 저었다.

“나라에 공을 세운 이에게 명예를 안겨주기 위해 만든 것이 훈장이니만큼, 화려한 것이 낫습니다. 물론 그만큼 손이 많이 가는 터라 생산량이 적기는 한데, 앞으로도 매년 수천 명에게 훈장을 수여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관리청장의 말마따나 정성국은 훈장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아무에게나 훈장을 수여할 생각은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긴 하지. 아무튼, 훈장 수여자의 명단은 이미 확정했고, 훈장의 제작도 끝났으니, 바로 훈장 수여식을 진행하면 되겠군.”

“바로요?”

“그래야지. 훈장 수여식을 열 준비는 다 해둔 상태인데 굳이 미룰 이유가 없잖나.”

이에 관리청장은 잠깐 고민하다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했다.

“그렇기야 한데...기왕 훈장 수여식이 늦춰진 김에, 일정을 조금 더 미루어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에 훈장 수여식을 진행하는 것이 의미 있지 않나 싶습니다만...”

어차피 훈장 수여식이 늦어진 만큼, 관리청장은 12월 말에 대대적으로 훈장 수여식을 진행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

북미왕국의 최대 명절이 바로 신년이다 보니, 그 전부터 신년을 기다리며 분위기가 달아오르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정성국은 잠깐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흠. 그건 썩 내키지 않는군. 12월 중순에는 북미상을 시상할 예정이라서 말이야.”

“어? 그렇습니까?”

북미상의 경우 모든 일을 왕실에서 주관했기에, 관리청장은 자세한 일정을 모르고 있었고, 그 때문에 관리청장이 정성국이 말에 눈을 크게 뜨자,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일단 북미상 위원회에서 내부적으로 12월에 북미상 시상식을 열기로 정하고, 이를 위해 한창 준비 중이네. 해서 북미상 시상식 전후로 언론을 이용해 북미상을 널리 알릴 계획이고. 헌데 훈장 수여식을 12월 말에 진행하면, 아무래도 화제가 분산될 수밖에 없지 않나.”

훈장 수여식이나 북미상 시상식이나 이번에 처음으로 진행하는 만큼, 언론을 통해 백성들에게 이를 자세히 알릴 필요도 있고, 또한 훈장 수여자들이나 북미상 수상자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할 필요도 있었는데, 일정이 겹쳐지면 화제가 분산될 것을 우려하는 정성국에 관리청장 역시 수긍했다.

“확실히...그럴 가능성이 크군요. 그리고 화제가 분산되면 훈장 수여자에게도, 북미상 수상자에게도 좋을 것은 없고요.”

“그렇지. 그렇다고 북미상 일정을 일부 조정한다 하더라도...12월 말에는 분위기가 너무 들떠 있는 터라, 훈장 수여식을 진행하기가 조금 그래. 집중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랄까?”

“아. 무슨 의미인지 알겠습니다. 허면 곧바로 언론에 알리고 2주 후에 훈장 수여식을 진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2주 후? 그 정도면 나쁘지 않겠네. 그러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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